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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29일 (화) 19:02 판
목차
Theme
임을 위한 행진곡
Synopsis
노래극 <넋풀이>의 주제가로 사용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어떻게 5.18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전 세계의 민주와 인권 투쟁의 현장에서 힘차게 울리게 되었을까?
Storyline
Episode 1: 들불야학 - 광주 최초의 노동야학
1978년, 박기순 열사가 중심이 되어 만든 광주 최초의 노동 야학이다.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많은 대학생들이 노동 야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전태일이 생전에 누군가 함께 노동법을 공부하고 함께 투쟁할 친구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에 공감한 대학생들이 하나둘 야학을 만들어갔다. 박기순은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1978년 6월) 때 시위를 주도하다가 전남대에서 강제 제적을 당하였는데, 그 후 서울에 있는 겨레터야학을 알게 되면서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서울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광주에 내려온 윤상원을 설득하여 합류시키게 되고, 신영일, 나상진, 전용호, 박관현, 박효선 등도 차차 동참하였다. 야학의 창시자 박기순은 1978년 12월에 연탄가스로 갑자기 사망하였고, 이후 야학의 리더는 윤상원이 맡게 되었다.
Episode 2: 투사회보 - 5.18민주화운동을 알린 시민언론
5.18민주화운동 기간에 윤상원 열사가 들불야학 동지들과 함께 발간한 저항 언론물이다. 당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들의 폭압으로 고립된 광주의 비극적인 상황을 대내외에 알리고자 하였다.1980년 5월 18일 0시 전국에 갑자기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5월 19일, 단지 민주화를 열망할 뿐인 광주 시민들을 향하여 공수부대는 집단 발포와 학살을 자행하였다(5.18민주화운동 시작). 이를 목격한 윤상원은 투쟁에 참여하면서 야학 활동가들과 함께 '투사회보'를 제작하여 고립된 광주의 상황을 알리고자 하였다. 광천시민아파트 주민들이 모아준 돈으로 종이와 등사기를 구입하여 제작, 배포하였다. 5월 21일에 제 1호를 시작으로, 25일에 제 8호가 만들어졌고, 26일 부터는 '민주시민회보'로 이름을 바꾸었다.
Episode 3: 박기순과 윤상원, 영혼으로 하나가 되다
1980년 5월 26일 오후 5시, 윤상원 대변인은 여러 외신 기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회견을 열었다. 회견 말미에 그가 "...우리는 오늘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들을 승자로 기억할 것입니다...”라고 했던 말은 차후에 현실이 되었다. 5월 27일 04시, 약 2만 명의 특수부대와 공수여단은 수류탄, M16 등 각종 살상 무기로 무장, 도청 진입 작전을 실시했고 옛 전남도청 2층 민원실에 있던 윤상원과 동지들은 그들의 총격에 처참하게 사망하였다. 1982년 2월 20일 광주시 망월동 묘역에서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열렸다. 두 달 후 작가 황석영 의 집에서 두 사람의 영혼 결혼식을 기리는 창작 노래극 ‘넋풀이’(부제:빛의 결혼식)가 제작되었고 이 극의 마지막을 장식한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백기완 원작, 황석영 작사, 김종률 작곡)이었다.
Episode 4: 임을 위한 행진곡 - 광주를 넘어 세계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되다
‘사랑도 명예도~’로 시작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대한민국 대표 민중가요이자 5.18민주화운동 공식 추모곡이다. 1981년 5월 대학가요제 출신 전남대 학생 김종률이 작곡했으며, 가사는 백기완의 장편시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의 일부를 빌려 소설가 황석영이 지었다. 노래극 ‘넋풀이–빛의 결혼식’의 마지막을 장식할 합창곡으로 기획돼, 1982년 2월 광주 망월동 공동묘지에서 치러진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됐다. 풍부한 서정성과 비장함으로 큰 감동을 주어 카세트테이프 복사본, 악보 필사본 및 구전을 통해 ‘민중가요'로 빠르게 유포되어 순식간에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1997년 5월 18일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된 이후 2008년까지 5.18기념식에서 제창돼 왔으나 이명박 정부가 제창을 식순에서 제외하고 식전행사 곡으로 변경하고, 2011년에는 본 행사에 포함됐으나 원하는 사람만 합창단과 함께 부르는 우여곡절을 겪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제창으로 복원됐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대한민국의 인권운동가들에 의해 해외에 소개되고 대한민국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한 이주노동자들을 통해서도 해외에도 널리 알려졌다. 홍콩과 대만, 미얀마 등의 민주화 투쟁 현장에서 현지어로 번안되어 불렸다. 현지어로 번안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리는 것으로 알려진 나라는 홍콩, 대만, 캄보디아, 태국, 말레이시아, 미얀마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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