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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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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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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석파정 서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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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eoul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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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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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시기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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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 =  연면적 8650.6㎡(약 2617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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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창의문로11길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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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서울미술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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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 https://seoulmuseum.org/INTR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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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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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glemap width="600" height="300" lat="37.594911" lon="126.962370" type="normal" zoom="12"
 +
icon="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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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94732, 126.963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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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glem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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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석파정.png|섬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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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개관한 사립미술관이다. 서울미술관 공식홈페이지에서는 본 미술관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서울미술관은 무엇보다 감상자가 창조자가 되는 미술관을 지향합니다. 감상자가 미술관과 전문가들의 권위에 눌려 주어진 정보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미술관이 아니라, 스스로 감상의 주체가 되어 창조적으로 감상하는 미술관을 지향합니다.'
 
== 내용 ==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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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전시를 기획하는데 특히 디어 마이 웨딩드레스, 서울미술관 신관 개관 기획전 《다색조선; 폴 자쿨레》전시는 여성 관람객의 큰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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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하고 싶은 점은, 서울미술관 부지에 석파정이 귀속되어있다는 점이다. 석파정은 현재 일부 건물이 팔려 '석파랑'이라는 식당에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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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는 서울미술관의 부속건물인 '석파정'을 중점에 두고 글을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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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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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정은 서울 성곽 북서쪽 밖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북악산과 인왕산이 만나는 산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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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지인 석산 중턱에 조성되어있다. 조선 말기의 건축술을 잘 조화시킨 대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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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하나로, 서쪽 바위산에서 흘러내리는 계류 한가운데 평대를 쌓고 그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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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식 건축기법을 가미해서 지은 유수성중관풍루가 있다. 또한 중국풍의 정자와 다리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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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양식을 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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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정은 북악산과 인왕산의 산록이 만나는 계곡부에 입지하고 정원은 지형적으로 높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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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산의 중턱 위에 위치하고 있어서 다른 정원과는 달리 담장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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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정 주변의 창의문 인근은 예로부터 장안의 이름난 명승지로 손꼽혀 왔으며, 자하문 밖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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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칭되어 왔다. 석파정은 바위산의 계류를 끌어들여 마당 앞을 흐르게 하고 계곡의 지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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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 연못과 정자를 배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ref>이원호 ( Won Ho Lee ),이종성 ( Jong Sung Lee ),김용기 ( Yong Ki Kim ).  "석파정(石坡亭)의 조영과 공간구성에 관한 기초 연구" 한국전통조경학회지 VOL.24 NO.1 (2006):21-3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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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흥근 소유의 삼계동 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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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정의 조영 초기의 모습은 김흥근이 조성한 삼계동 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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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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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원림이 위치한 삼계동은 ‘서울에서 가장 경관이 빼어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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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전면에 인왕산, 북악산이 위치하고 있으며, 북한산을 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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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삼는 경승지로 당시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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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례로 양의영(梁義永, 생몰년대 미상)의 『유북한기(遊北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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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에는 1858년 북한산을 유람하는 여정의 일부로 삼계동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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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를 포함하고 있으며 빼어난 원림의 경관을 예찬하였으며,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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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들이 숨어 지내며 수신하는 곳’으로 ‘매우 사치스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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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 만든 것’ 등으로 표현하고 있어 당시 사대부층의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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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한 상류문화로서 원림이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ref>이원호 ( Won Ho Lee ),김동현 ( Dong Hyun Kim ),김재웅 ( Jae Ung Kim ),최종희 ( Jong Hee Choi ).  "연구논문 : 조선후기 원림 석파정(石坡亭)의 공간변화양상에 관한 고찰" 한국전통조경학회지 VOL.33 NO.1 (2015):31-4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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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흥선대원군 소유의 석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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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정의 실제 조영자는 김흥근(金興根, 1796~1870)으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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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렴암(閑水雲簾庵)을 인수하여 별서로 조영한 것을 기원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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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하며, 그 후 흥선대원군이 경영한 바 있음을『매천야록(梅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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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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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근은 북문 밖 삼계동에서 장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장을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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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고 있었다. 대원군은 그의 별장을 팔 것을 요구했지만 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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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에겐 쇠귀에 경읽기였다. 그래서 대원군은 하루만이라도 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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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것을 재차 요청했다. 그러자 김흥근은 대원군의 강권에 어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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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이 허락하였는데 대원군은 고증을 청해 이곳에 함께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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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고종이 함께 다녀갔다는 말에 김흥근은 이렇게 푸념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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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상감이 와서 놀다간 곳은 감히 신하가 놀 수 없다.” 이 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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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이곳에 출입하지 않으면서 결국 대원군의 소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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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야록(梅泉野錄)』<ref>이원호 ( Won Ho Lee ),김동현 ( Dong Hyun Kim ),김재웅 ( Jae Ung Kim ),신현실 ( Hyun Sil Shin ).  "19세기 서울 옥호정(玉壺亭)과 석파정(石坡亭)을 통해 본 정원 특성" 한국전통조경학회지 VOL.32 NO.3 (2014):21-3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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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근의 삼계동 정사가 대원군 소유로 이전됨에 따라 그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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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이 원림의 기능뿐만 아니라 왕가의 별장 형태로 사용되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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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실록에서도 삼계정(三溪亭) 또는 삼계동 행차소(三溪洞 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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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所)으로 지칭되었으며 고종 4년(1867년) 탕춘대(湯春臺)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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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상시사(常試射)를 행할 때에는 행전(行殿)으로 사용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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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이는 석파정의 장소성의 변경됨에 따라 화원(畫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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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철의 석파정도병풍이 동궐도와 유사한 구도를 지니는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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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으로 작용하여 대원군 소유의 석파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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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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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정도병풍에서의 석파정은 백악산을 배경으로 계곡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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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림의 전면으로 수계가 통과하는 형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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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고 있다. 이는 해방직후 발간된 서울시사의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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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정은 개울을 건너가야 한다.’는 기록과 동일하게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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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까지 수계의 형태가 이어져 왔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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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있으며, 대원군 당시의 석파정은 수계를 경계로 하는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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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성을 지니고 있어 현재 석파정의 면적은 상대적으로 축소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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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를 보이고 있다.<ref>이원호 ( Won Ho Lee ),김동현 ( Dong Hyun Kim ),김재웅 ( Jae Ung Kim ),신현실 ( Hyun Sil Shin ).  "19세기 서울 옥호정(玉壺亭)과 석파정(石坡亭)을 통해 본 정원 특성" 한국전통조경학회지 VOL.32 NO.3 (2014):21-3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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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근대 석파정 소유변화에 따른 원형의 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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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 이르러 석파정의 공간변화는 서울미술관의 건립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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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기점으로 다시 분류할 수 있다. 서울미술관 건립 이전의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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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정은 흥선대원군 실정 후 후손에게 이어져왔으나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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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는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코롬바고아원’으로 사용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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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며, ‘시아식’병원으로 용도가 변경되었으며 이러한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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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멸실 위기에 처했던 석파정 별당채를 1958년 소전 손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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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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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12월 27일 경향신문에 보도된 내용에 의하면 19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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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실업가가 석파정을 매입하였으며, 재벌가에 의해 그 소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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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시 이전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석파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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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근과 관련된 안동김씨나 흥선대원군의 후손이 아닌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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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토지로 그 소유권이 수차례 변경되면서 관리소홀로 인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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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이 썩어가고 기왓장에 잡초가 자라는 등 이전의 모습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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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199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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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왔으며 1996년 동인문화원에서 석파정을 매입하고 수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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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따라 생활사박물관 형태로 일반에 공개하고자 하였으나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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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고증의 문제로 무산되었다. 이후 석파문화원에서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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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다시 석파정 일대를 매입하였으나 이전 소유자와 개인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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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문재로 소송에 휘말렸고, 석파정이 경매에 부쳐지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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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분쟁이 지속됨에 따라 훼손된 채로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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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술한 바와 같이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이 소유하던 시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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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점차 원형이 변질되었다. 다수의 건조물이 조영되었던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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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와는 달리 사랑채, 안채, 후원의 별채, 중국식 정자만이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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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있게 되었으며, 담장으로 위요된 공간 또한 소실되었다. 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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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에 해당하는 대문채는 대문만이 남아 있으며, 대문의 동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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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의 지형은 절토된 채로 방치되었다. <ref>이원호 ( Won Ho Lee ),김동현 ( Dong Hyun Kim ),김재웅 ( Jae Ung Kim ),신현실 ( Hyun Sil Shin ).  "19세기 서울 옥호정(玉壺亭)과 석파정(石坡亭)을 통해 본 정원 특성" 한국전통조경학회지 VOL.32 NO.3 (2014):21-3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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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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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석파문화원에서는 서울미술관의 건립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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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정을 민간에 공유하였는데 이에 따라 진입 동선이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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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로 연결되고 기존의 대문채가 사라지는 등 미술관의 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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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성격을 지니게 되면서 추가적인 원형의 변질이 발생되
 +
었다. 석파정 안채의 동측은 잔디밭으로 조성되었으며, 계류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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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편의 신라시대 석탑은 경주 근처 개인 소유의 경작지에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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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하고 조립한 것으로 2012년 석파정으로 이전 설치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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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기존의 원림과는 이질적인 성격의 공간 및 시설물이 도입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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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부대시설로 운영되고 있다.<ref>이원호 ( Won Ho Lee ),김동현 ( Dong Hyun Kim ),김재웅 ( Jae Ung Kim ),신현실 ( Hyun Sil Shin ).  "19세기 서울 옥호정(玉壺亭)과 석파정(石坡亭)을 통해 본 정원 특성" 한국전통조경학회지 VOL.32 NO.3 (2014):21-31</ref>
  
 
== 지식관계망 ==
 
== 지식관계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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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 주석 ==
 
== 참고문헌 ==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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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이원호 ( Won Ho Lee ),이종성 ( Jong Sung Lee ),김용기 ( Yong Ki Kim ).  "석파정(石坡亭)의 조영과 공간구성에 관한 기초 연구" 한국전통조경학회지 VOL.24 NO.1 (2006):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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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이원호 ( Won Ho Lee ),김동현 ( Dong Hyun Kim ),김재웅 ( Jae Ung Kim ),최종희 ( Jong Hee Choi ).  "연구논문 : 조선후기 원림 석파정(石坡亭)의 공간변화양상에 관한 고찰" 한국전통조경학회지 VOL.33 NO.1 (2015):3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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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이원호 ( Won Ho Lee ),김동현 ( Dong Hyun Kim ),김재웅 ( Jae Ung Kim ),신현실 ( Hyun Sil Shin ).  "19세기 서울 옥호정(玉壺亭)과 석파정(石坡亭)을 통해 본 정원 특성" 한국전통조경학회지 VOL.32 NO.3 (2014):21-31

2020년 4월 1일 (수) 22:39 기준 최신판


정의

석파정.png

2012년 8월 개관한 사립미술관이다. 서울미술관 공식홈페이지에서는 본 미술관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서울미술관은 무엇보다 감상자가 창조자가 되는 미술관을 지향합니다. 감상자가 미술관과 전문가들의 권위에 눌려 주어진 정보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미술관이 아니라, 스스로 감상의 주체가 되어 창조적으로 감상하는 미술관을 지향합니다.'

내용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전시를 기획하는데 특히 디어 마이 웨딩드레스, 서울미술관 신관 개관 기획전 《다색조선; 폴 자쿨레》전시는 여성 관람객의 큰 인기를 끌었다. 주목하고 싶은 점은, 서울미술관 부지에 석파정이 귀속되어있다는 점이다. 석파정은 현재 일부 건물이 팔려 '석파랑'이라는 식당에 가 있다. 이곳에서는 서울미술관의 부속건물인 '석파정'을 중점에 두고 글을 다룰 것이다.

  • 석파정

석파정은 서울 성곽 북서쪽 밖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북악산과 인왕산이 만나는 산록의 경사지인 석산 중턱에 조성되어있다. 조선 말기의 건축술을 잘 조화시킨 대표적인 정원의 하나로, 서쪽 바위산에서 흘러내리는 계류 한가운데 평대를 쌓고 그 위에 서양식 건축기법을 가미해서 지은 유수성중관풍루가 있다. 또한 중국풍의 정자와 다리 등이 외래양식을 띄고 있다. 석파정은 북악산과 인왕산의 산록이 만나는 계곡부에 입지하고 정원은 지형적으로 높은 석산의 중턱 위에 위치하고 있어서 다른 정원과는 달리 담장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석파정 주변의 창의문 인근은 예로부터 장안의 이름난 명승지로 손꼽혀 왔으며, 자하문 밖이라 통칭되어 왔다. 석파정은 바위산의 계류를 끌어들여 마당 앞을 흐르게 하고 계곡의 지형에 따라 연못과 정자를 배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

  • 1. 김흥근 소유의 삼계동 정사

석파정의 조영 초기의 모습은 김흥근이 조성한 삼계동 정사 로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 면 원림이 위치한 삼계동은 ‘서울에서 가장 경관이 빼어난 곳’ 으로 전면에 인왕산, 북악산이 위치하고 있으며, 북한산을 배산 으로 삼는 경승지로 당시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일례로 양의영(梁義永, 생몰년대 미상)의 『유북한기(遊北漢 記)』에는 1858년 북한산을 유람하는 여정의 일부로 삼계동 정 사를 포함하고 있으며 빼어난 원림의 경관을 예찬하였으며, ‘귀 한 사람들이 숨어 지내며 수신하는 곳’으로 ‘매우 사치스럽고 공교롭게 만든 것’ 등으로 표현하고 있어 당시 사대부층의 화 려한 상류문화로서 원림이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 2. 흥선대원군 소유의 석파정

석파정의 실제 조영자는 김흥근(金興根, 1796~1870)으로, 한 수운렴암(閑水雲簾庵)을 인수하여 별서로 조영한 것을 기원으 로 하며, 그 후 흥선대원군이 경영한 바 있음을『매천야록(梅泉 野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흥근은 북문 밖 삼계동에서 장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장을 소 유하고 있었다. 대원군은 그의 별장을 팔 것을 요구했지만 김흥 근에겐 쇠귀에 경읽기였다. 그래서 대원군은 하루만이라도 빌려 줄 것을 재차 요청했다. 그러자 김흥근은 대원군의 강권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하였는데 대원군은 고증을 청해 이곳에 함께 왔다. 얼마 후 고종이 함께 다녀갔다는 말에 김흥근은 이렇게 푸념했 다. “상감이 와서 놀다간 곳은 감히 신하가 놀 수 없다.” 이 말과 함께 이곳에 출입하지 않으면서 결국 대원군의 소유가 되었다. 『매천야록(梅泉野錄)』[3]

김흥근의 삼계동 정사가 대원군 소유로 이전됨에 따라 그 성 격이 원림의 기능뿐만 아니라 왕가의 별장 형태로 사용되었는 데, 실록에서도 삼계정(三溪亭) 또는 삼계동 행차소(三溪洞 行 次所)으로 지칭되었으며 고종 4년(1867년) 탕춘대(湯春臺)에 서 상시사(常試射)를 행할 때에는 행전(行殿)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는 석파정의 장소성의 변경됨에 따라 화원(畫員)인 이한철의 석파정도병풍이 동궐도와 유사한 구도를 지니는 요 인으로 작용하여 대원군 소유의 석파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 가 되고 있다. 석파정도병풍에서의 석파정은 백악산을 배경으로 계곡 사이 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림의 전면으로 수계가 통과하는 형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해방직후 발간된 서울시사의 ‘석 파정은 개울을 건너가야 한다.’는 기록과 동일하게 나타나 는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까지 수계의 형태가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으며, 대원군 당시의 석파정은 수계를 경계로 하는 영 역성을 지니고 있어 현재 석파정의 면적은 상대적으로 축소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4]

  • 3. 근대 석파정 소유변화에 따른 원형의 변질

근대에 이르러 석파정의 공간변화는 서울미술관의 건립전후 를 기점으로 다시 분류할 수 있다. 서울미술관 건립 이전의 석 파정은 흥선대원군 실정 후 후손에게 이어져왔으나 한국전쟁 이후에는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코롬바고아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시아식’병원으로 용도가 변경되었으며 이러한 과정 에서 멸실 위기에 처했던 석파정 별당채를 1958년 소전 손재형 선생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976년 12월 27일 경향신문에 보도된 내용에 의하면 1966년 한 실업가가 석파정을 매입하였으며, 재벌가에 의해 그 소유권 이 다시 이전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석파정은 김흥근과 관련된 안동김씨나 흥선대원군의 후손이 아닌 개인 의 토지로 그 소유권이 수차례 변경되면서 관리소홀로 인해기 둥이 썩어가고 기왓장에 잡초가 자라는 등 이전의 모습을 찾아 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199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 어 왔으며 1996년 동인문화원에서 석파정을 매입하고 수리함 에 따라 생활사박물관 형태로 일반에 공개하고자 하였으나 원 형 고증의 문제로 무산되었다. 이후 석파문화원에서 1997 년 다시 석파정 일대를 매입하였으나 이전 소유자와 개인 간 부채 문재로 소송에 휘말렸고, 석파정이 경매에 부쳐지는 등 의 분쟁이 지속됨에 따라 훼손된 채로 이어지고 있었다. 선술한 바와 같이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이 소유하던 시기 이 후 점차 원형이 변질되었다. 다수의 건조물이 조영되었던 이전 시기와는 달리 사랑채, 안채, 후원의 별채, 중국식 정자만이 남 아있게 되었으며, 담장으로 위요된 공간 또한 소실되었다. 진입 공간에 해당하는 대문채는 대문만이 남아 있으며, 대문의 동측 일대의 지형은 절토된 채로 방치되었다. [5]

  • 4.

2012년 석파문화원에서는 서울미술관의 건립과 함께 석파정을 민간에 공유하였는데 이에 따라 진입 동선이 미술관 건물로 연결되고 기존의 대문채가 사라지는 등 미술관의 부속 정원의 성격을 지니게 되면서 추가적인 원형의 변질이 발생되 었다. 석파정 안채의 동측은 잔디밭으로 조성되었으며, 계류 건 너편의 신라시대 석탑은 경주 근처 개인 소유의 경작지에서 수 습하고 조립한 것으로 2012년 석파정으로 이전 설치되는 등 기존의 원림과는 이질적인 성격의 공간 및 시설물이 도입된 채 부대시설로 운영되고 있다.[6]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시각자료

파노라마

갤러리

동영상

주석

참고문헌

  1. 이원호 ( Won Ho Lee ),이종성 ( Jong Sung Lee ),김용기 ( Yong Ki Kim ). "석파정(石坡亭)의 조영과 공간구성에 관한 기초 연구" 한국전통조경학회지 VOL.24 NO.1 (2006):21-31
  2. 이원호 ( Won Ho Lee ),김동현 ( Dong Hyun Kim ),김재웅 ( Jae Ung Kim ),최종희 ( Jong Hee Choi ). "연구논문 : 조선후기 원림 석파정(石坡亭)의 공간변화양상에 관한 고찰" 한국전통조경학회지 VOL.33 NO.1 (2015):31-40
  3. 이원호 ( Won Ho Lee ),김동현 ( Dong Hyun Kim ),김재웅 ( Jae Ung Kim ),신현실 ( Hyun Sil Shin ). "19세기 서울 옥호정(玉壺亭)과 석파정(石坡亭)을 통해 본 정원 특성" 한국전통조경학회지 VOL.32 NO.3 (2014):21-31
  4. 이원호 ( Won Ho Lee ),김동현 ( Dong Hyun Kim ),김재웅 ( Jae Ung Kim ),신현실 ( Hyun Sil Shin ). "19세기 서울 옥호정(玉壺亭)과 석파정(石坡亭)을 통해 본 정원 특성" 한국전통조경학회지 VOL.32 NO.3 (2014):21-31
  5. 이원호 ( Won Ho Lee ),김동현 ( Dong Hyun Kim ),김재웅 ( Jae Ung Kim ),신현실 ( Hyun Sil Shin ). "19세기 서울 옥호정(玉壺亭)과 석파정(石坡亭)을 통해 본 정원 특성" 한국전통조경학회지 VOL.32 NO.3 (2014):21-31
  6. 이원호 ( Won Ho Lee ),김동현 ( Dong Hyun Kim ),김재웅 ( Jae Ung Kim ),신현실 ( Hyun Sil Shin ). "19세기 서울 옥호정(玉壺亭)과 석파정(石坡亭)을 통해 본 정원 특성" 한국전통조경학회지 VOL.32 NO.3 (2014):21-31
이원호 ( Won Ho Lee ),이종성 ( Jong Sung Lee ),김용기 ( Yong Ki Kim ). "석파정(石坡亭)의 조영과 공간구성에 관한 기초 연구" 한국전통조경학회지 VOL.24 NO.1 (2006):21-31

이원호 ( Won Ho Lee ),김동현 ( Dong Hyun Kim ),김재웅 ( Jae Ung Kim ),최종희 ( Jong Hee Choi ). "연구논문 : 조선후기 원림 석파정(石坡亭)의 공간변화양상에 관한 고찰" 한국전통조경학회지 VOL.33 NO.1 (2015):31-40

이원호 ( Won Ho Lee ),김동현 ( Dong Hyun Kim ),김재웅 ( Jae Ung Kim ),신현실 ( Hyun Sil Shin ). "19세기 서울 옥호정(玉壺亭)과 석파정(石坡亭)을 통해 본 정원 특성" 한국전통조경학회지 VOL.32 NO.3 (2014):2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