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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1910년 서울 태생. 서울 누상동에 있는 신명학교를 졸업하고 동광학교(중학과정)에 입학했으나 1922년 동광학교가 해체되면서 보성고보에 편입했다. 1926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하였으며, 1929년 졸업 후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했다. 1929년 12월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되었다. 1930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에 첫 장편소설 「12월12일」을 연재(2월-12월)하였으며, 1931년 7월 『조선과 건축』에 일본어 시 「이상한 가역반응」을 발표하고, 8월호에 일본어 연작시 「조감도」를, 10월호에 「3차각설계도」를 발표했다. 1932년 『조선』 3월호에 소설 「지도의 암실」와 4월호에는 소설 「휴업과 사정」을 잇달아 발표하였으며, 『조선과 건축』 7월호에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어 연작시 「건축무한육면체」를 발표했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3747&cid=41708&categoryId=41737 이상], | + |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1910년 서울 태생. 서울 누상동에 있는 신명학교를 졸업하고 동광학교(중학과정)에 입학했으나 1922년 동광학교가 해체되면서 보성고보에 편입했다. 1926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하였으며, 1929년 졸업 후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했다. 1929년 12월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되었다. 1930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에 첫 장편소설 「12월12일」을 연재(2월-12월)하였으며, 1931년 7월 『조선과 건축』에 일본어 시 「이상한 가역반응」을 발표하고, 8월호에 일본어 연작시 「조감도」를, 10월호에 「3차각설계도」를 발표했다. 1932년 『조선』 3월호에 소설 「지도의 암실」와 4월호에는 소설 「휴업과 사정」을 잇달아 발표하였으며, 『조선과 건축』 7월호에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어 연작시 「건축무한육면체」를 발표했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3747&cid=41708&categoryId=41737 이상], 한국현대문학대사전(권영민,2004), 네이버지식백과.</ref> |
− | 1933년 각혈로 기사의 직을 버리고 종로에서 다방 | + | 1933년 각혈로 기사의 직을 버리고 종로에서 다방 ‘[[제비(다방)|제비]]’를 차려 경영하였다. 이 무렵 이곳에 [[이태준|이태준(李泰俊)]]·[[박태원|박태원(朴泰遠)]]·[[김기림|김기림(金起林)]]·[[윤태영|윤태영(尹泰榮)]]·[[조용만|조용만(趙容萬)]] 등이 출입하여 이상의 문단 교우가 시작되었다. 1934년에 [[구인회|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여 특히 [[박태원]]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삽화를 그려주기도 하였다. 그 뒤 1935년 다방을 폐업하고 카페 ‘쓰루[鶴]’, 다방 ‘무기[麥]’ 등을 개업하였으나 경영에 실패하고 1936년 [[구본웅|구본웅(具本雄)]]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창문사(彰文社)에 취직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퇴사하였다. 그 해 6월을 전후하여 [[변동림|변동림(卞東琳)]]과 혼인한 뒤 곧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나 1937년 사상불온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로 인하여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그 해 4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하였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4568 이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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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30일 (화) 16:32 기준 최신판
이상(李箱) | |
대표명칭 | 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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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李箱 |
출생일 | 1910.9.23 |
사망일 | 1937.4.17(26세) |
본관 | 강릉김씨 |
이칭 | 김해경(金海卿), 하융 |
출생지 | 경성 서서 인달방 사직동계 사직동(서울 종로구 사직동) |
사망지 | 일본 제국 도쿄제국대학 부속병원 |
학력 |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부 |
직업 | 소설가, 시인, 수필가, 삽화가, 건축가 |
정의
일제강점기의 시인, 소설가, 삽화가, 건축가.
내용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1910년 서울 태생. 서울 누상동에 있는 신명학교를 졸업하고 동광학교(중학과정)에 입학했으나 1922년 동광학교가 해체되면서 보성고보에 편입했다. 1926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하였으며, 1929년 졸업 후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했다. 1929년 12월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되었다. 1930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에 첫 장편소설 「12월12일」을 연재(2월-12월)하였으며, 1931년 7월 『조선과 건축』에 일본어 시 「이상한 가역반응」을 발표하고, 8월호에 일본어 연작시 「조감도」를, 10월호에 「3차각설계도」를 발표했다. 1932년 『조선』 3월호에 소설 「지도의 암실」와 4월호에는 소설 「휴업과 사정」을 잇달아 발표하였으며, 『조선과 건축』 7월호에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어 연작시 「건축무한육면체」를 발표했다.[1]
1933년 각혈로 기사의 직을 버리고 종로에서 다방 ‘제비’를 차려 경영하였다. 이 무렵 이곳에 이태준(李泰俊)·박태원(朴泰遠)·김기림(金起林)·윤태영(尹泰榮)·조용만(趙容萬) 등이 출입하여 이상의 문단 교우가 시작되었다. 1934년에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여 특히 박태원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삽화를 그려주기도 하였다. 그 뒤 1935년 다방을 폐업하고 카페 ‘쓰루[鶴]’, 다방 ‘무기[麥]’ 등을 개업하였으나 경영에 실패하고 1936년 구본웅(具本雄)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창문사(彰文社)에 취직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퇴사하였다. 그 해 6월을 전후하여 변동림(卞東琳)과 혼인한 뒤 곧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나 1937년 사상불온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로 인하여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그 해 4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하였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