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의 두 판 사이의 차이
(같은 사용자에 의한 3개의 중간 편집이 숨겨짐) | |||
24번째 줄: | 24번째 줄: | ||
그러나 성서조선은 1942년 3월호에서 한국민족의 영혼을 찬양한 내용이 있다는 이유로 | 그러나 성서조선은 1942년 3월호에서 한국민족의 영혼을 찬양한 내용이 있다는 이유로 | ||
불온잡지로 지목되어 폐간된다. 그리고 김교신을 비롯한 [https://ko.wikipedia.org/wiki/%ED%95%A8%EC%84%9D%ED%97%8C 함석헌], [https://ko.wikipedia.org/wiki/%EC%86%A1%EB%91%90%EC%9A%A9 송두용],[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B%8B%AC%EC%98%81 유달영] 등 13명은 | 불온잡지로 지목되어 폐간된다. 그리고 김교신을 비롯한 [https://ko.wikipedia.org/wiki/%ED%95%A8%EC%84%9D%ED%97%8C 함석헌], [https://ko.wikipedia.org/wiki/%EC%86%A1%EB%91%90%EC%9A%A9 송두용],[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B%8B%AC%EC%98%81 유달영] 등 13명은 | ||
− | + | [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B%8C%80%EB%AC%B8%ED%98%95%EB%AC%B4%EC%86%8C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수감되는데, 이 사건은 성서조선사건이라고 불리게 된다. | |
63번째 줄: | 63번째 줄: | ||
[[파일:조선성서.jpg|300픽셀]] | [[파일:조선성서.jpg|300픽셀]] | ||
− | ''' ▲김교신이 편찬한 성서조선'''<ref>[ | + | ''' ▲김교신이 편찬한 [https://ko.wikipedia.org/wiki/%EC%84%B1%EC%84%9C%EC%A1%B0%EC%84%A0 성서조선]'''<ref>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75592&cid=46647&categoryId=46647 네이버 지식백과] </ref> |
69번째 줄: | 69번째 줄: | ||
[[파일:김교신2.jpg|400픽셀]] | [[파일:김교신2.jpg|400픽셀]] | ||
− | '''▲김교신과 함께 성서조선을 편찬한 사람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oid=047&aid=0002082736</ref> | + | '''▲김교신과 함께 성서조선을 편찬한 사람들'''<ref> [https://news.naver.com/main/read.nhn?oid=047&aid=0002082736 오마이뉴스] </ref> |
==='''동영상'''=== | ==='''동영상'''=== |
2019년 6월 24일 (월) 23:32 기준 최신판
인물 정보 | |
---|---|
이름 | 김교신 |
출생 | 1901년~1945년 |
성별 | 남성 |
직업 | 교육자, 종교인 |
경력 | 1927년 7월 월간 동인지 『성서조선(聖書朝鮮)』 창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양정중학교·경기중학교·개성 송도중학교 근무 |
정의
내용
- 인물정보[2]
1. 김교신은 일본 유학 당시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여 우리말 성경을 읽고 연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귀국 후 1927년 7월, 월간 동인지 『성서조선(聖書朝鮮)』을 창간한다.
그러나 성서조선은 1942년 3월호에서 한국민족의 영혼을 찬양한 내용이 있다는 이유로 불온잡지로 지목되어 폐간된다. 그리고 김교신을 비롯한 함석헌, 송두용,유달영 등 13명은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수감되는데, 이 사건은 성서조선사건이라고 불리게 된다.
2. 김교신은 민족적 기독교주의자였다.
그는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의 가슴으로 성경을 읽는 방법으로 기독교를 이해했다.
기독교가 교회라는 체제를 벗어나서 민중 속에 들어가야 하며,
한국이라는 토양 위에서 새롭게 꽃피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교신은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위탁하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한국의 쓰라린 역사를 바탕으로 찾아내는 일을 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이러한 점에서 김교신은 민족적이고 민중적이며, 토착적인 기독교주의자였다.
"불혹의 김교신. 그는 1940년 가을 서울 제1고보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는 수업도 일본말로 해야만 했다.
그러나 김교신은 끝끝내 조선말로 수업을 진행했다.
당연히 교내에서 문제가 되었다.
심지어 조선인 학생 중에서도 조선말 수업에 반발하는 자가 있었다.
조선인 으로서의 자존심이 강했던 김교신은
분명한 태도로 동화정책에 동조하는 학생들과 대치했다. "
멀티미디어
이미지
▲김교신과 함께 성서조선을 편찬한 사람들[5]
동영상
- 김교신 소개 동영상
- 성서조선 관련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