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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H 교육용 위키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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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4-22T04:30:44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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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소론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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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4T17:39: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타입 : 개념&lt;br /&gt;
*용어 : 소론(少論)&lt;br /&gt;
*출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붕당론(朋黨論)』&lt;br /&gt;
*편자 :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조선 후기 [[서인 KU|서인(西人)]]에서 분파된 정파(政派).&lt;br /&gt;
조선 숙종때 [[송시열 KU|송시열]]과 [[윤증 KU|윤증]]의 갈등으로 인하여 [[서인 KU|서인]]이 [[노론 KU|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lt;br /&gt;
[[노론 KU|노론]]의 소속된 중심인물은 [[송시열 KU|송시열]], [[김창집 KU|김창집]], [[민유중 KU|민유중]] 등이고, 소론은 [[윤증 KU|윤증]], [[박세채 KU|박세채]], [[남구만 KU|남구만]]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참조항목==&lt;br /&gt;
[[노론 KU|노론]]&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C%A0%EB%A6%BC_KU</id>
		<title>유림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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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4T17:36: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Created page with &amp;quot;==Meta Data== *타입 : 개념 *용어 : 유림(儒林) *편자 : 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 필암서원 201310038 임경...&amp;quot;&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타입 : 개념&lt;br /&gt;
*용어 : 유림(儒林)&lt;br /&gt;
*편자 :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0038 임경희]]&lt;br /&gt;
----&lt;br /&gt;
&lt;br /&gt;
== 요약 ==&lt;br /&gt;
'유림(儒林)'의 '林'은 숲처럼 많은 사람들의 집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유림은 &amp;quot;[[공자 KU|공자(孔子)]]를 숭상하고 유교를 따르는 사람들&amp;quot;이란 뜻이다.&lt;br /&gt;
그러나 오늘날의 유림은 &amp;quot;유학(儒學)을 공부하며 유교적 신념을 고수하는 사람&amp;quot; 혹은 &amp;quot;성균관과 향교를 드나들며 학문을 하고 제사를 지내는 사람&amp;quot;정도로 좁혀 봐야 한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유림은 크게 성균관, 향교, 유도회를 주축으로 운영된다. 즉, 일반적으로 성균관과 전국 234개의 향교, 289개의 유도회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유림'이라고 보고있다. &lt;br /&gt;
&lt;br /&gt;
'성균관'은 서울에서, '향교'는 지방에서 유학교육과 성현에 대한 제사를 담당하며, 지역별로 조직된 유교인들의 모임인 '유교회'는 사회봉사 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다. &lt;br /&gt;
&lt;br /&gt;
성균관(成均館)은 중앙의 교육-제의기관임과 동시에 한국 유림의 중앙행정기관라 할 수 있다. 법적으로 성균관(재단법인)은 종교단체로 분류돼 문화관광부가 관할하고 있다. 전국 유림들의 유일한 의사결정기구인 유림총회가 열리는 곳도 성균관이다. 성균관장은 전국 234개 향교의 교장격인 전교(典校)를 임명한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은 교육 기관의 기능과 함께 공자를 비롯한 성현을 모시는 사묘(祠廟)의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lt;br /&gt;
유교는 그동안 종교라기 보다는 하나의 사회적 윤리로서 인식되었으나, 1990년대 들어 유교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종교화가 급선무라는 주장이 대두되어 최근 유교의 현대화, 종교화 작업이 논의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B%88%EB%AA%BD%EC%9E%AC_KU</id>
		<title>훈몽재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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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4T17:28: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File:1661894.jpg|200px]]&lt;br /&gt;
&lt;br /&gt;
==Meta Data==&lt;br /&gt;
*타입 : 문화유산&lt;br /&gt;
*한글항목명 : 훈몽재&lt;br /&gt;
*한자항목명 : 訓蒙齋&lt;br /&gt;
*지정 번호 :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89호&lt;br /&gt;
*지정연원일 : 2012.11.02&lt;br /&gt;
*주소 :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lt;br /&gt;
*위치 : [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5.471961&amp;amp;longi=126.968853&amp;amp;pname=훈몽재 유지 위도 35.471961 / 경도 126.968853]&lt;br /&gt;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훈몽재는 조선 명종 3년(1548) [[김인후 KU|하서]] [[김인후 KU|김인후]]가 처향(妻鄕)인 순창의 점암촌에 이거하고, 초당을 세워 훈몽이라는 편액을 걸고 강학했던 곳이다.&lt;br /&gt;
&lt;br /&gt;
[[김인후 KU|김인후]]가 훈몽재에 머물렀던 시기는 1548년부터 그가 부친상을 당하여 [[장성 KU|장성]]으로 돌아간 1549년까지 약 2년간이다.&lt;br /&gt;
&lt;br /&gt;
이후, 1680년경 [[김인후 KU|김인후]]의 5대 손인 김시서가 인근에 자연당을 짓고 기거하며 훈몽재를 중건하여 후학을 양성하였으나, 다시 퇴락하였다. 1820년경 [[김인후 KU|김인후]]의 후손들이 점암마을에 훈몽재를 중건하고, 어암서원을 건립하여 [[김인후 KU|김인후]], 김시서, [[정철 KU|정철]], [[이이 KU|이이]]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나, [[흥선대원군 KU|대원군]]의 [[서원철폐령 KU|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훈몽재가 중건되었으나, 1951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lt;br /&gt;
&lt;br /&gt;
2005년 전주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표토층의 10~20㎝ 아래에서 훈몽재의 유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현재는 복토작업이 이루어져 있다.&lt;br /&gt;
&lt;br /&gt;
지정대상지에 인접하여 훈몽재와 부속건물인 자연당, 양정관, 심연정이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 추령천변에는 대학암(大學巖)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정철 KU|송강]] [[정철 KU|정철]]이 이곳에서 [[김인후 KU|김인후]]에게 대학을 배웠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9%80%EC%9D%B8%ED%9B%84_KU</id>
		<title>김인후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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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4T17:25: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 호남사림의 형성 */&lt;/p&gt;
&lt;hr /&gt;
&lt;div&gt;[[File:Kih.jpg|300px|thumb|&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하서 김인후'''&amp;lt;/div&amp;gt;]]&lt;br /&gt;
&lt;br /&gt;
== Meta Data ==&lt;br /&gt;
* 타입: 인물&lt;br /&gt;
* 한글이름: 김인후&lt;br /&gt;
* 한자이름: 金麟厚&lt;br /&gt;
* 생년: 1510&lt;br /&gt;
* 몰년: 1560&lt;br /&gt;
* 역할: 조선의 문신, 학자&lt;br /&gt;
*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410300김은서]],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0038 임경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요약 ==&lt;br /&gt;
김인후(金麟厚, 1510년 ~ 1560년)는 조선 중기 문신이자 유학자이다. 자는 후지, 호는 하서(河西), 본관은 울산이다. 전라남도 장성 출신이며 김안국의 문인이다.&lt;br /&gt;
김인후는 성균관에서 퇴계 이황과 학문을 닦았으며, 과거에 급제한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홍문관 박사 겸 세자를 가르치는 세자시강원 설서를 역임하면서 인종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고, 그 점을 크게 평가받아 [[18선정 KU|18명의 현인]]으로 추앙받았다. 그가 모셔진 필암서원은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KU|서원철폐령]]에도 살아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문정공 하서 김인후 선생은 공자를 모신 사당(문묘)에 신주를 모신 우리나라 18분 선정 가운데 한분으로서 중종 5년(1510) 장성현 대맥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울산, 자는 후지요, 호는 하서 또는 담재이고, 명종 15년(1560) 51세에 돌아가셨다. 호남 유림의 종장으로 추앙받았으며 22세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31세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34세때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었으며, 정조 20년(1796)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김인후 선생은 열살 때 김안국에게서 &amp;lt;소학&amp;gt;을 배웠고, 1531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 이황 등과 교우가 두터웠으며 세자 보도의 중임을 맡았다. 홍문관 박사 겸 세자를 가르치는 세자시강원 설서를 역임하면서 [[인종 KU|인종]]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인종은 중종의 아들로 인품이 훌륭하고 학자들을 좋아했기때문에 연산군대 이후 중앙으로 진출한 사림출신 관료와 학자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지만 병약하여 즉위 8개월만에 사망하였다. 정조는 영의정을 증직하고 문정이란 시호를 하사하였다. [[기묘사화 KU|기묘사화]] 때 죽음을 당한 선비들의 원한을 신원하였고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으로 돌아갔다. 그 후 모든 벼슬을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오직 성.경의 실천궁행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논설과 의리가 명백했던 선생은 내실을 소흘하고 밖으로만 열심인 선비들을 호되게 꾸중했다고 하며 도의와 절개로 일관했던 선비의 표상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학문적 업적뿐만 아니라 인종의 스승이었던 점이 당대 및 후대 왕들과 학자들의 존경을 받았던 큰 동기가 되어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 있는 문묘에 모셔진 우리나라 18명의 현인 가운데 유일한 호남출신으로 이 지방 유림들의 큰 어른으로 추앙받아 왔다. 후에 대한민국에서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와 기업인 김연수의 선조가 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 하서의 문학과 예술 ==&lt;br /&gt;
하서는 16세기 사림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던 시기에 도학자로서의 자기세계를 확고하게 살았던 지식인이었다. 그는 훈구관료들의 전횡에 반발하여 36세의 젊은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와 명분과 의리를 지켜 끝까지 현실에 나오지 않은 사실에서 그의 군자로서의 행동과 인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서는 1600여 수에 가까운 시를 남겼다. 16세기 호남에는 면앙정시가단과 성산시가단이 형성될 만큼 가사문학이 융성하였다. 하서 김인후는 면앙정 송순의 문인이며, 성산시가단 정철의 스승으로 시문학 발전에도 크게 기여를 하였다. 이로 인해 면앙정과 소쇄둰 등 여러 정자와 원림에 그의 시가 남아 있다. 하서는 중국의 유명한 칠언율시 가운데 두 대구가 서로 잘 맞는 시 100수를 골로 음과 훈을 달고 한글로 번역한 '[[백련초해 KU|백련초해]]'를 짓기도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 평생을 바친 실천적 도학 ==&lt;br /&gt;
하서 김인후 선생은 중국 송나라 [[정주학 KU|정주학]]과 우리나라 포은 [[정몽주 KU|정몽주]], 정암 [[조광조 KU|조광조]]로부터 내려온 학통을 이어받은 도학자다. 소학, 대학, 중용, 효경, 서명, 역경을 평생 동안 연구하여 실천적 도학을 추구하였다. 우주관, 인성관, 수양론, 경세론, 의리론이 집약되어 있는 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 천명도 등을 저술하였는데 현재는 천명도만 남아 있다. 선생은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 예학에 밝았으며 필법은 진서, 초서, 전서, 예서에서 모두 극치를 이루었다 자연을 벗 삼아 당대 명사들과 교류하고 백화정, 훈몽재, 낙덕정, 소쇄원, 면양정, 식영정, 환벽당 등에 출입하여 한시와 부 등 1,600여수를 지어 전하여 오는데 경구와 고사를 많이 활용한 맑고 우아한 도학자로서의 인품을 잘 나타낸 주옥같은 시들이다. 국문학에도 조예가 높고 깊어 국문학 가단에서는  면앙정(송순) 가단에서 성산(정철) 가단으로 이어지는 중간적 역할을 하여, 국문학의 새 장을 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선생의 국문학시는 '자연가', '도임사수원가', '백구가' 등 3수가 있다. 선생이 저작한 '백련초해'는 고대의 명시 100수를 모아 국문으로 음을 달고 해설하여 쓴 것이다. 근대 어휘 475개와 고어 사전류에도 없는 어휘 21개, 희귀한 어휘 19개가 나타나 있어 국어 어문학적인 면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당시 학자들이 천시하던 '한글'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광해 2년(1610) 판각하여 필암서원에 보관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호남사림의 형성 ==&lt;br /&gt;
하서는 호남의 풍요롭고 활달한 분위기와 낭만적 정조를 시가로 즐겨 나타냈던 호남가단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호남가단의 최초형성기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송순 KU|면앙정]] [[송순 KU|송순]]의 가르침을 받았고, 호남가단을 완성시킨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정철 KU|송강]] [[정철 KU|정철]]이 자신의 문하를 드나들었던 것에서 하서가 호남가단의 형성과 전개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짐작하게 된다. 호남가단에서 활동한 주요 인물로는 면앙정의 주인공 송군과 이른바 식영정 사선으로 알려진 석천 임억령, 서하당 김성원,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을 들 수가 있다. 하서의 국문시가 작품활동은 송순, 정철에 비해 다소 뒤지지만 한시 활동에 있어서는 양인을 훨씬 능가하였다. 하서가 단순히 도학자로서 재도문학의 굴레에 얽매였다기 보다는 호방하게 시화하는데 충실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호남가단의 활동 작품을 보면 &amp;lt;어암잡영&amp;gt; 20수와 &amp;lt;[[소쇄원 48영 KU|소쇄원 48영]]&amp;gt;과 &amp;lt;면앙정 30영&amp;gt; 등의 자연시를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 구국대열에 앞장선 장성 선비들 ==&lt;br /&gt;
연산군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반정군을 일으키자고 격문을 돌리는 등 정의를 위해 늘 앞장섰던 김개, 의리사상을 깊게 간직한 호남사림의 큰 맥을 이루게 했던 신평인 송흠이나 울산인 김인후, 청백리로 명성을 떨친 태인인 박수량은 모두 장성이 낳은 인재들이다. 임진왜란으로 전국토가 짓밟히고 백성들이 유린당할 때 의병에 앞장선 장성인들이 많았는데 김경수의 남문창의를 비롯하여 기효간, 기효근의 의병활동, 화차를 발명하여 행주싸움을 승리로 이끈 변이중, 동래산성에서 적을 맞아 순국한 양산군수 조영규 등이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크게 공헌했고, 입암산성에서 순절한 윤진의 충절은 장성인의 정신을 웅변해 주고 있다.&lt;br /&gt;
&lt;br /&gt;
[[File:Injh.jpg|400px|thumb|&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하서선생이 세자때 인종에게 학문을 교육하는 모습을 재현&amp;lt;/div&amp;gt;]]&lt;br /&gt;
== 각별했던 하서와 [[인종 KU|인종]] ==&lt;br /&gt;
하서와 인종은 각별했다. 하서는 인종의 세자 시절 세자를 모시고 공부하는 곳인 세자시강원에서 세자보도라는 직책으로 인종에게 글을 가르쳤다. 인종은 하서의 강의에 매료됐고, 의기가 상통하여 그 정표로 세자가 직접 친 [[묵죽도 KU|묵죽도]]를 하사했다고 한다. 이 묵죽도 하단에는 하서가 지은 시가 적혀 있다. 인종이 재위 9개월만에 병사하자 그 충격으로 하서는 낙향하고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고향 장성으로 돌아와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고 시작으로 마음을 달래며 후진을 키우는데 전념했다. 하서는 인종이 서거한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술병을 가지고 집 남쪽에 있는 산에 올라 '한잔 마시고 한번 곡하고...'를 거듭해 밤을 지새고 내려오기를 평생동안 거른 일이 없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 출처 ==&lt;br /&gt;
필암서원&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6%B5%EA%B3%A1%EB%8C%80_KU</id>
		<title>통곡대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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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4T16:43:1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타입: 장소&lt;br /&gt;
*한글명: 통곡대&lt;br /&gt;
*주소: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lt;br /&gt;
*위치: [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5.302262&amp;amp;longi=126.735431&amp;amp;pname=통곡대 위도 35.302262 / 경도 126.735431]&lt;br /&gt;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410322이채연]]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김인후 KU|하서]]의 인품은 고매하였으며 의리가 있었다. 정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이다. 마침 [[김인후 KU|하서]]와 사제의 인연을 맺었던 인종이 즉위한 지 겨우 8개월 만에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결심을 더욱 확고해졌다. 고향 장성으로 돌아온 [[김인후 KU|하서]]는 인종의 기일이 되면 집 뒤편에 있는 산에 올라가 온종일 통곡을 하고 돌아왔다. 평생 인종을 잊지 못하고 그를 향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행했던 [[김인후 KU|하서]]의 통곡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다.1560년 5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임종 후에도 옥과현감 이후의 관직은 비문에 쓰지 말라는 유언을 자손들에게 남기어 인종에 대한 절의를 표시했다. 계란처럼 생겼다는 난산(卵山) 뒤편에 지금도 [[김인후 KU|하서]]가 통곡하던 통곡대 바위가 홀로 서 있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A7%A5%EB%8F%99%EC%83%9D%EA%B0%80%ED%84%B0_KU</id>
		<title>맥동생가터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A7%A5%EB%8F%99%EC%83%9D%EA%B0%80%ED%84%B0_KU"/>
				<updated>2014-06-14T16:42: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타입: 장소&lt;br /&gt;
*한글명: 맥동생가터&lt;br /&gt;
*주소: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 마을&lt;br /&gt;
*위치: [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5.305940&amp;amp;longi=126.729168&amp;amp;pname=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 마을 위도 35.305940 / 경도 126.729168]&lt;br /&gt;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410300김은서]]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9%A9%EB%A3%A1%EA%B0%95_%EC%83%9D%ED%83%9C%EA%B3%B5%EC%9B%90_KU</id>
		<title>황룡강 생태공원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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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4T16:41:3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File:Hwang.jpg|400px|thumb|&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황룡강 생태공원'''&amp;lt;/div&amp;gt;|300px]]&lt;br /&gt;
&lt;br /&gt;
==Meta Data==&lt;br /&gt;
*타입: 장소&lt;br /&gt;
*한글명: 황룡강 생태공원&lt;br /&gt;
*주소: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기산리 &lt;br /&gt;
*위치: [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5.295706&amp;amp;longi=126.772616&amp;amp;pname=황룡강 생태공원 위도 35.295706 / 경도 126.772616]&lt;br /&gt;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410300김은서]]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0038 임경희]]&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와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대동 사이를 흐르는 강으로 해오라기, 쇠백로 등 새들과 버들치, 갈겨니 등 민물고기와 물풀이 저마다의 자리를 찾아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비교적 생태계가 잘 보관된 강이다. &lt;br /&gt;
황룡강이라는 이름은 요월정에서 봉덕리에 이르는 구간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lt;br /&gt;
총길이는 61.9km이고 유역면적은 551.4km²이다. 장성군 내에서의 길이는 32.8km에 이르며, 22개의 지류를 갖고 있는 곳으로 황룡강 둔치에 피어나는 유채꽃과 분수를 바라보며 걷을 수 있다.&lt;br /&gt;
[[입암산 KU|입암산]]과 [[백암산 KU|백암산]]의 물줄기가 모여 일급수에 가까운 장성호를 이루고, 황룡강으로 흘러들며, 그 황룡강을 따라 전국에서 몰려드는 강태공들의 시원스런 손놀림이야 말로 그 맛을 느끼기에 최적의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AA%A8%EC%95%94_%EC%82%BC%EB%A6%BC%EC%9A%95%EC%9E%A5_KU</id>
		<title>모암 삼림욕장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AA%A8%EC%95%94_%EC%82%BC%EB%A6%BC%EC%9A%95%EC%9E%A5_KU"/>
				<updated>2014-06-14T16:40:3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File:Moam.jpg|400px|thumb|&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모암 삼림욕장'''&amp;lt;/div&amp;gt;]]&lt;br /&gt;
==Meta Data==&lt;br /&gt;
*타입: 장소&lt;br /&gt;
*한글명: 모암 삼림욕장&lt;br /&gt;
*주소: 전라남도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 산115&lt;br /&gt;
*위치: [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5.375976&amp;amp;longi=126.741854&amp;amp;pname=모암 삼림욕장 위도 35.375976 / 경도 126.741854]&lt;br /&gt;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410300김은서]]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0038 임경희]]&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구역면적: 26ha&lt;br /&gt;
*개장년도: 2001년&lt;br /&gt;
*특징: 국내최대의 삼나무와 편백나무 조림지로 유명한 축령산자락에 위치하며 축령산은 70년대 중반에 조림시범지역으로 지정돼 박정희 대통령이 헬기로 방문&lt;br /&gt;
*주요시설 &lt;br /&gt;
- 기반시설 : 산책로1,400m, 산림광장 1개소&lt;br /&gt;
- 편익시설 : 테크 5개소, 평상 3개소, 벤취 8개, 야외탁자 14개, 목계단, 안내판 등 &lt;br /&gt;
- 체육시설 : 산림미로시설 1개소, 산림체험시설 1개소 &lt;br /&gt;
- 교육시설 : 강의대 1개소, 식물원조성 1개소, 산림해설판 &lt;br /&gt;
- 위생시설 : 음수대 3개소, 화장실 3개소 &lt;br /&gt;
*주변관광지 &lt;br /&gt;
- 필암서원(15Km), 백비(16Km), 황룡전적지(15Km), 장성댐(15Km), 백양사 (20Km), 방장산 자연휴양림(20Km)&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0%A9%EC%9E%A5%EC%82%B0_%EC%9E%90%EC%97%B0%ED%9C%B4%EC%96%91%EB%A6%BC_KU</id>
		<title>방장산 자연휴양림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0%A9%EC%9E%A5%EC%82%B0_%EC%9E%90%EC%97%B0%ED%9C%B4%EC%96%91%EB%A6%BC_KU"/>
				<updated>2014-06-14T16:40:0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File:Bangj.jpg|400px|thumb|&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방장산 자연휴양림'''&amp;lt;/div&amp;gt;]]&lt;br /&gt;
==Meta Data==&lt;br /&gt;
*타입: 장소&lt;br /&gt;
*한글명: 방장산 자연휴양림&lt;br /&gt;
*주소: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방장로 353  &lt;br /&gt;
*위치: [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5.444958&amp;amp;longi=126.749055&amp;amp;pname=방장산 자연휴양림 위도 35.444958 / 경도 126.749055]&lt;br /&gt;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410300김은서]]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0038 임경희]]&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숙박시설 당일 15:00 ~ 익일 12:00&lt;br /&gt;
*일일개장 09:00 ~ 18:00&lt;br /&gt;
*객실 19개&lt;br /&gt;
*남북의 경계지역이며 노령산맥의 끝자락에 자리잡은 방장산은, 주변 평야지대에 우뚝솟아 신비한 구름속에 가리워져 있다하여 예부터 지리산, 무등산과 함께 호남의 삼신산이라 불리웠으며, 험준한 산세로 도적떼들이 숨어살았는데 이들에게 잡혀간 한 여인이 남편이 구해주러 오지않자 기다림에 지쳐 부른 「방등산가」(방장산의 옛명)가 있다. 그리고 정상에서 고창평야와 멀리 서해바다를 볼 수 있어 해마다 패러글라이딩대회가 열리고 있으며 주말이면 등산객들이 끊이지 않는다.&lt;br /&gt;
교육ㆍ체험학습의 장으로 숲 해설프로그램, 편백비누만들기, 목걸이 만들기, 밀랍양초 만들기 등이 있다. 자연과의 친화도를 높이는 프로그램들이 많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B%94%EC%84%B1%EA%B3%84%EA%B3%A1_KU</id>
		<title>월성계곡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B%94%EC%84%B1%EA%B3%84%EA%B3%A1_KU"/>
				<updated>2014-06-14T16:39:2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File:Wols.jpg|400px|thumb|&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월성계곡'''&amp;lt;/div&amp;gt;|300px]]&lt;br /&gt;
==Meta Data==&lt;br /&gt;
*타입: 장소&lt;br /&gt;
*한글명: 월성계곡&lt;br /&gt;
*주소: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월성리 두무동&lt;br /&gt;
*위치: [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5.337511&amp;amp;longi=126.864875&amp;amp;pname=월성계곡 위도 35.337511 / 경도 126.864875]&lt;br /&gt;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410300김은서]]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0038 임경희]]&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월성계곡은 260ha에 조성된 편백 · 삼 · 소나무 등 울창한 숲과 깊은 골을 따라 형성된 맑은 계곡 때문에 여름철 조용한 휴식을 즐기려는 가족단위 피서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lt;br /&gt;
특히 계곡 아래에는 강태공들이 즐겨 찾는 월성 저수지가 있고, 장성군과 담양군의 경계인 한재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병풍산까지 연결된 5Km 등산로(2시간 소요)는 장성과 담양의 아름다운 들녁을 한눈에 바라보며 산행을 즐길 수 있다.&lt;br /&gt;
그리고 홍길동 우드랜드는 10ha의 군유림에 임도, 산책로를 비롯하여 무한궤도 외 13종의 각종 탐험놀이 시설과 자연학습장을 갖추고 있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E%A5%EC%84%B1%EB%AC%B8%ED%99%94%EC%98%88%EC%88%A0%ED%9A%8C%EA%B4%80_KU</id>
		<title>장성문화예술회관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E%A5%EC%84%B1%EB%AC%B8%ED%99%94%EC%98%88%EC%88%A0%ED%9A%8C%EA%B4%80_KU"/>
				<updated>2014-06-14T16:37: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File:Jangcul.jpg|500px|thumb|&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장성문화예술회관'''&amp;lt;/div&amp;gt;|300px]]&lt;br /&gt;
==Meta Data==&lt;br /&gt;
*타입: 장소&lt;br /&gt;
*한글명: 장성문화예술회관&lt;br /&gt;
*주소: 장성읍 문화로 110 (기산리 388번지) &lt;br /&gt;
*위치 : [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5.302146&amp;amp;longi=126.766524&amp;amp;pname=장성문화예술회관 위도 35.302146 / 경도 126.766524]&lt;br /&gt;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410300김은서]]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0038 임경희]]&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건립규모: 지하1층, 지상3층, 층고 32m, 연면적 약2,200평, 건축면적 약1072.94평 &lt;br /&gt;
*객석: 대공연장 696석(1층 504석 - 일반 496, 장애인 8, 2층 192석)/ 소공연장 206석(일반석 202석, 장애인석 4석) &lt;br /&gt;
*용도:  공연장 (지상3층, 지하1층) &lt;br /&gt;
*개관일 1차: 2011. 9. 4.(소공연장), 2차 2014. 3. 21.(대공연장)&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6%88%ED%83%9C%EC%82%B0_KU</id>
		<title>불태산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6%88%ED%83%9C%EC%82%B0_KU"/>
				<updated>2014-06-14T16:36: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 타입: 장소&lt;br /&gt;
* 한글항목명: 불태산&lt;br /&gt;
* 주소: 대한민국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 진원리 735&lt;br /&gt;
* 위치: [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5.273439&amp;amp;longi=126.835750&amp;amp;pname=불태산 위도 35.273439 / 경도 126.835750]&lt;br /&gt;
*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410329정솔]]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전라남도 장성군의 남동면에 위치한 산이다(고도：636m). 군의 진원면 진원리와 장성읍 유탕리와 경계에 있는 산으로 동서방향의 산줄기이다. 조선 시대 사료에는 불대산으로 기재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진원)에 &amp;quot;불대산은 현에서 북쪽으로 5리 떨어져 있는 진산이다.&amp;quot;라고 수록되어 있다. 『대동지지』(장성)에 불대산(佛臺山)은 &amp;quot;동남 25리로 광주와의 경계에 있고, 암자가 5개이다.&amp;quot;고 하였으며, &amp;quot;진원고읍성(珍原古邑城)이 남쪽으로 15리 불대산 동쪽 기슭에 있다.&amp;quot;라는 기록이 있다. 『해동지도』(장성)에 보면 불대산(佛臺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병풍산과 사이에 한치가 묘사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와 『1872년지방지도』에도 모두 불대산(佛臺山)으로 기재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장성군읍지』에 &amp;quot;술자가 전하길 산세가 용이 달리는 형국이니 절을 세우고 상하연(上下淵)이라 일컫고, 진압하도록 하였다. 산 동북에 대소(大小) 골이 있는데 신라 때 그곳에 안룡(安龍), 정룡(定龍), 청룡(靑龍)의 3개의 절을 세웠는데 지금은 성터만 있다.&amp;quot;라는 기록이 있다. 불대산이 한자로 오기(誤記)되면서 불태산(佛台山)으로 불려 졌던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3%A0%EC%84%B1%EC%82%B0_KU</id>
		<title>고성산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3%A0%EC%84%B1%EC%82%B0_KU"/>
				<updated>2014-06-14T16:35:4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 타입: 장소&lt;br /&gt;
* 한글항목명: 고성산&lt;br /&gt;
* 한자항목명: 方丈山&lt;br /&gt;
* 주소: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부성리 &lt;br /&gt;
* 위치: [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5.308126&amp;amp;longi=126.640374&amp;amp;pname=고성산 위도 35.308126 / 경도 126.640374]&lt;br /&gt;
*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410329정솔]]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전라남도 장성군의 서부에 위치한 산이다(고도：547m). 군의 삼계면 부성리와 영광군 대마면 성산리의 경계에 있고 동서간의 장벽을 이룬다. 산맥의 방향에 따라 산세도 남북으로 주능선을 뻗은 영산북맥으로 영산강과 와탄천의 분수령이다. 와탄천의 상류인 성산천이 발원한다. 고성산과 남쪽의 월랑산의 사이에 마치(馬峙)가 있어 동서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다.&lt;br /&gt;
&lt;br /&gt;
『장성군읍지』에 &amp;quot;고성산(古城山)은 삼계에 있고, 취령산으로부터 나온다. 영광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주천자(朱天子)묘가 있다고 전한다.&amp;quot;는 기록과 &amp;quot;삼계에 있는 금강천이 고성산에서 나온다.&amp;quot;라는 기사내용이 있다. 『대동지지』(성지)에 &amp;quot;삼계고현성(森溪古縣城)이 남쪽으로 30리에 있으며 산 위에 흙으로 쌓은 유적이 있으며, 고성산(高城山)이라 칭한다.&amp;quot;고 기록하였다. 『대동여지도』에 고성산(高城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도 고성산(高城山)으로 기재하고 있다. 고성산 아래 삼계면 생촌리 생촌 마을은 성이 있기 때문에 성 마을이라 했는데, 이것이 성말＞생말로 변해왔고 한자화되면서 생촌(生村)으로 변하였다. 무생말이라 부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3%91%ED%92%8D%EC%82%B0_KU</id>
		<title>병풍산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3%91%ED%92%8D%EC%82%B0_KU"/>
				<updated>2014-06-14T16:34: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 타입: 장소&lt;br /&gt;
* 한글항목명: 병풍산&lt;br /&gt;
* 주소: 전라남도 담양군 수북면 대방리&lt;br /&gt;
* 위치: [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5.316733&amp;amp;longi=126.895162&amp;amp;pname=병풍산 위도 35.316733 / 경도 126.895162]&lt;br /&gt;
*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410329정솔]]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산의 높이는 822m이며, 용구산이라고도 한다. 산세가 병풍을 두른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병풍산이라고 부른다. 산 아래에는 대방저수지가 있고, 이 저수지를 끼고 조성된 성암야영장이 있다. 산에는 금학봉·천정봉·깃대봉·신선봉·투구봉 등 기암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들이 즐비하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가면 바위 밑에 샘이 솟는 굴이 있다. 이 샘은 용구샘이라고 부르는데, 물이 맑고 깨끗하다. &lt;br /&gt;
----&lt;br /&gt;
산행은 저수지를 지나 야영장 뒤편의 계곡에서 시작된다. 먼저 동쪽 끝의 봉우리인 동봉에 오른 뒤 정상에 도착한다. 정상에 오르면 시원하게 펼쳐진 나주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안부에 이른다. 안부에서 바로 용구샘을 지나 하산할 수도 있다. 종주하려면 안부에서 서쪽 능선을 따라 올라 서봉에 이른다. 서봉에서 다시 묵묘를 지나 내려오면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은 대치면 소재지로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가면 야영장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이 코스는 4시간 정도 소요된다. &lt;br /&gt;
----&lt;br /&gt;
야영장에서 용구샘을 지나 안부를 거친 다음 정상에 오르는 코스도 있다. 하산은 정상에서 동봉을 거쳐 야영장으로 내려온다. 이 코스는 3시간 정도 소요된다. 또 다른 코스로는 야영장에서 만남대와 신선대를 지나 용구샘에 이르고, 이어 정상에 도착한다. 정상에서 동쪽 능선을 타고 무명봉에 이르고, 이어 남동쪽 능선을 따라 내려와 대방저수지로 하산하는 코스이다. 이 코스는 약 9㎞ 거리로, 4시간 정도 소요된다. &lt;br /&gt;
----&lt;br /&gt;
교통편은 담양공용터미널에서 병풍산행 버스를 이용한다. 광주에서 갈 경우에는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수북면 소재지나 성암야영장까지 가면 된다. 자동차를 이용하면, 담양읍에서 장성 방면으로 24번 국도를 타고 수북면 소재지에 도착한다. 수북초등학교 앞에서 우회전하여 군도 3호선을 타고 가면 등산로 입구인 성암야영장이 나온다. &lt;br /&gt;
----&lt;br /&gt;
숙박은 산 아래 민박을 이용한다. 성암야영장은 운동장·수영장 등이 갖추어져 있고, 학습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일반 기업체나 사회 단체, 학생들의 수련장으로 이용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B6%95%EB%A0%B9%EC%82%B0_KU</id>
		<title>축령산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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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4T16:33:3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 타입: 장소&lt;br /&gt;
* 한글항목명: 축령산&lt;br /&gt;
* 주소: 전라남도 장성군 서삼면&lt;br /&gt;
* 위치: [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5.370603&amp;amp;longi=126.729307&amp;amp;pname=축령산 위도 35.370603 / 경도 126.729307]&lt;br /&gt;
*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410329정솔]]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전라남도 장성군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북일면과 서삼면 그리고 고창군 고창읍 은사리 경계에 있는 산지이다(고도：454m). 50~60년 된 편백과 삼나무의 숲이 잘 조림되어 산림욕장으로 유명하다. 산 아래는 영화 마을로 알려진 금곡 마을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amp;quot;취령산은 현 서쪽 20리에 있다.&amp;quot;고 하였고 &amp;quot;취서사(鷲棲寺)는 취령산에 있는데, 석탑과 석종이 있다. 송(宋) 나라 때에 중 운묵(雲默)이 있었는데, 중국에 외유하였고, 글씨를 잘 써서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그가 죽자 제자가 탑과 종을 세워서 유해를 안치하였다.&amp;quot;라고 수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대동지지』에 &amp;quot;취령산은 군 서쪽 25리에 고창 경계에 있다.&amp;quot;는 기록과 &amp;quot;취령산은 서삼면 서단에 있으며, 매남산(梅南山) 혹은 우리산(牛利山)이라고 부르는 산에서 유래하며, 남쪽에 골짜기가 열려있다.&amp;quot;는 기록이 있다. 『광여도』와 『지승』(장성)에는 취령산이 그 산에 있다는 취서루라는 절과 함께 표기된다. 『대동여지도』에 취령산으로 기재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0%A9%EC%9E%A5%EC%82%B0_KU</id>
		<title>방장산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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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4T16:32: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 타입: 장소&lt;br /&gt;
* 한글항목명: 방장산&lt;br /&gt;
* 한자항목명: 方丈山&lt;br /&gt;
* 주소: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lt;br /&gt;
* 위치: [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5.455256&amp;amp;longi=126.755074&amp;amp;pname=방장산 위도 35.455256 / 경도 126.755074]&lt;br /&gt;
*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410329정솔]]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방장산(方丈山)은 전라북도 고창군과 전라남도 장성군에 걸쳐 있는 산이다. 높이는 743m이다.[1]&lt;br /&gt;
&lt;br /&gt;
옛 이름은 반등산(半登山) 또는 방등산(方登山, 方等山)으로, 지리산, 무등산과 함께 호남의 삼신산으로 불려 왔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0%B1%EC%95%94%EC%82%B0_KU</id>
		<title>백암산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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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4T16:31:5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 내용 */&lt;/p&gt;
&lt;hr /&gt;
&lt;div&gt;[[File:Backa.jpg|400px|thumb|&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백암산'''&amp;lt;/div&amp;gt;]]&lt;br /&gt;
==Meta Data==&lt;br /&gt;
* 타입: 장소&lt;br /&gt;
* 한글항목명: 백암산&lt;br /&gt;
* 한자항목명: 白巖山&lt;br /&gt;
* 주소: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신성리 &lt;br /&gt;
* 위치: [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5.443296&amp;amp;longi=126.859067&amp;amp;pname=백암산 위도 35.443296 / 경도 126.859067]&lt;br /&gt;
*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410329정솔]]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0038 임경희]]&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백암산(白巖山)은 전라북도, 전라남도의 내장산(內藏山) 줄기에 있는 산이다. 암석이 모두 흰색이라 백암산이라 하였다. 산 아래에 [[백양사 KU|백양사]]가 있어서 백양산(白羊山)으로 아는 경우도 있다.&lt;br /&gt;
&lt;br /&gt;
내장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으며, 높이는 741미터이다. 한국 8경 중의 하나로 선정된 명승지로, '가을의 내장'에 대하여 '봄의 백양'이라 할 만큼 봄 경치가 아름답다. 산 속에는 천연기념물인 비자나무 숲이 울창하여 남국의 정취를 돋워준다. 학바위(鶴岩)도 이곳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lt;br /&gt;
&lt;br /&gt;
== 볼거리 ==&lt;br /&gt;
*학바위&lt;br /&gt;
*백양사, 백양산12경&lt;br /&gt;
*영천굴&lt;br /&gt;
*천연기념물 비자나무, 굴거리나무&lt;br /&gt;
*남룡폭포&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8%88%EA%B3%A1_%EC%98%81%ED%99%94%EC%B4%8C_KU</id>
		<title>금곡 영화촌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8%88%EA%B3%A1_%EC%98%81%ED%99%94%EC%B4%8C_KU"/>
				<updated>2014-06-14T16:31:0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File:Keumk.jpg|500px|thumb|&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금곡 영화촌'''&amp;lt;/div&amp;gt;|300px]]&lt;br /&gt;
&lt;br /&gt;
==Meta Data==&lt;br /&gt;
* 타입: 장소&lt;br /&gt;
* 한글항목명: 금곡 영화촌&lt;br /&gt;
* 주소: 전라남도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lt;br /&gt;
* 위치: [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5.396064&amp;amp;longi=126.737466&amp;amp;pname=금곡 영화촌 위도 35.396064/ 경도 126.737466]&lt;br /&gt;
*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410329정솔]]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0038 임경희]]&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장성군 [[축령산 KU|축령산]] 자락의 오지 마을은 영화 촬영으로 유명한 장소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태백산맥」의 주요 무대로 사용되면서 시작된 촬영은 옛 농촌 풍경을 담는 영화에서 드라마까지 쉼 없이 계속되고 있다. 태양광이 좋고 소음이 차단되는 최적의 촬영조건을 갖추어 마치 야외 세트장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분명 이곳은 농사를 짓고 나무를 하는 주민들이 살아가는 마을이다. &lt;br /&gt;
백발의 어르신들과 함께 마을을 지키는 것은 동네 이곳저곳에 자리하는 고인돌과 당산나무 등 옛 모습의 유물들이다.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농촌의 모습까지 영화 촬영의 소품으로 활용되면서 그 가치가 더욱 높아졌다. 마을 입구에서 울창한 숲이 있는 뒷동산까지 산책하듯 거닐기에도 좋고 주민들이 준비하는 체험 프로그램을 경험하는 것도 즐겁다.&lt;br /&gt;
&lt;br /&gt;
축령산을 뒤로 한채 동향으로 자리잡은 마을로 태양광선이 좋고 소음 차단이 완벽한 지역으로 영화촬영의 최적지이다. 지금까지 금곡마을은 오지로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50~60년대의 마을경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마을입구 다랑이 논 사이로 30여개의 고인돌, 연자방아, 당산나무와 당산석, 모정, 초가 등 전통유적이 산재해있다. 마을 어귀의 울창한 당산나무로 시작해 고샅길 넘어 싸리나무 담장에 초가집, 다랑이 논, 황소를 이용한 재래식 영농법, 동네 어귀에서 만난 주름진 할머니의 표정까지 모두 박물관에서나 만날 법한 순 토종이다.&lt;br /&gt;
이 평화롭고 한적한 마을이 최근 유명세를 타고 있다. 남면이 고향인 임권택 감독의 영화 태백산맥(1994년 제작)과 이영재 감독의 내 마음의 풍금(1998년 제작) 이 외에도 김수용 감독의 침향을 비롯하여 MBC TV 드라마 왕초 등이 이 곳에서 촬영되었다.또 화가 황순칠이 이 마을을 주제로 한 작품 고인돌 마을로 지난 1995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영예를 안았다. 실제로 마을 건너 들판에 여기저기 고인돌이 놓여있어 마을의 유래가 깊음을 말해주고 있다.&lt;br /&gt;
또 바로 인접해 있는 국내 최대의 삼림욕장인 축령산 휴양림과 연계하여 지난 1995년부터 전통초가집 건립, 전선주의 지중화사업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영화 · 민속촌으로 가꾸고 있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E%85%EC%95%94%EC%82%B0%EC%84%B1_KU</id>
		<title>입암산성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E%85%EC%95%94%EC%82%B0%EC%84%B1_KU"/>
				<updated>2014-06-14T16:30: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File:Ipa.jpg|400px|thumb|&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입암산성'''&amp;lt;/div&amp;gt;]]&lt;br /&gt;
&lt;br /&gt;
==Meta Data==&lt;br /&gt;
* 타입: 장소&lt;br /&gt;
* 한글항목명: 입암산성&lt;br /&gt;
* 한자항목명: 笠岩山城&lt;br /&gt;
* 주소: 대한민국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 678&lt;br /&gt;
* 위치: [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5.485160&amp;amp;longi=126.824559&amp;amp;pname=입암산성 위도 35.485160 / 경도 126.824559]&lt;br /&gt;
*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410329정솔]]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0038 임경희]]&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장성 입암산성(長城 笠岩山城)은 전라남도 장성군 입암산에 쌓은 산성이다. 전라도를 방어하는 데 중요한 곳으로 노령산맥에 이어져 전라북도 정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높이 626미터인 입암산의 계곡 능선을 따라 만든 포곡식 산성으로 약 3.2킬리미터 정도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연혁 및 유래 ==&lt;br /&gt;
입암산성의 축성시기는 기록이 없으나 삼한시대의 성으로 추측되고 있다. 후백제시대 나주를 왕건에게 점령당한 견훤의 중요한 요새이기도 했던 이 곳은 고려 고종 43년(1256년) 몽골 6차 침입때의 격전지였음이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 있다. 성의 밑부분은 백제 것이며, 상부는 조선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기초부분에 종출초석이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으며, 천연암반을 이용하여 지표수가 자연스럽게 방출된 점 등에서 선조들의 자연 이용의 지혜를 엿볼수 있다. 서쪽의 갓바위에서는 남쪽으로 넘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감시할 수 있고, 사방이 높고 중간은 넓어 외부에서 성안을 들여다 볼수 없는 천혜적인 요새지다.&lt;br /&gt;
고려말 몽골에 대항할 때에 송군비 장군이 몽골군을 물리친 성으로도 유명하며, 조선시대에는 왜적에 맞서 대항하던 윤진장군이 장렬히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국난극복의 요충지로서 효종 때에는 성을 개축하여 둘레 길이가 2795보에 달했다. 또한 4곳의 포루와 2개소의 성문, 3개소의 암문이 있었으며, 성내에 흐르는 계곡물로 만들어진 9곳의 연못 외에 샘 14곳을 더 파서 물걱정이 없게 되었다.&lt;br /&gt;
성안에는 5개의 사찰이 있었고, 승장 1명을 두었으며, 각종 무기를 두는 군기고와 군량 7천석 이상을 비축할수 있는 창고가 있었다. 아직까지도 정연하게 쌓은 성벽이 무너지지 않은곳이 많은데다 남북의 두문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웅장했던 성의 모습을 연상케 하고 있으며, 피와 땀으로 내 나라를 지키려던 조상들의 숨결이 들리는 듯한 매우 유서깊은 호국유적이다.&lt;br /&gt;
지금은 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성곽과 윤진의 순의비가 있고, 가을 억새는 장관을 이룬다.&lt;br /&gt;
&lt;br /&gt;
== 등산코스 ==&lt;br /&gt;
&lt;br /&gt;
 '''1코스''' 전남대 수련원 → 계곡갈림길 → 입암산성남문 → 북문 → 갓바위 → 전남대 수련원(총 8㎞, 약 3시간 20분)&lt;br /&gt;
 '''2코스''' 등산코스 2전남대 수련원 → 입암산성남문 → 노령역(총 6㎞, 약 2시간 30분)&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9%8D%EA%B8%B8%EB%8F%99_%ED%85%8C%EB%A7%88%ED%8C%8C%ED%81%AC_KU</id>
		<title>홍길동 테마파크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9%8D%EA%B8%B8%EB%8F%99_%ED%85%8C%EB%A7%88%ED%8C%8C%ED%81%AC_KU"/>
				<updated>2014-06-14T16:29:5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File:Parkh.jpg|500px|thumb|&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Meta Data==&lt;br /&gt;
*타입: 장소&lt;br /&gt;
*한글명: 홍길동 테마파크&lt;br /&gt;
*주소 : 대한민국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371-1&lt;br /&gt;
*위치 : [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5.320543&amp;amp;longi=126.727508&amp;amp;pname=홍길동 테마파크 위도 35.320543 / 경도 126.727508]&lt;br /&gt;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410331정주원]][[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0038 임경희]]&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생가터는 원형대로 보존 자리를 옮겨 생가복원 및 전시관에 출토유물 및 [[홍길동]] 관련자료(영상물, 연구논문, 문화작품 등), 다양한 캐릭터, 입체영상물이 전시되어 있고 [[홍길동]]축제를 비롯한 [[홍길동]] 문화콘텐츠를 체험할 수 있는 장성군의 관광 명소입니다. &lt;br /&gt;
특히 여름철 청소년 야영장은 테마파크를 정원삼아 산책할 수 있는 색다른 캠핑의 매력으로 캠퍼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4D 영상관에서 [홍길동2084], [Let's go 활빈당] 상영되고 있고 [[홍길동]] 광장 분수에서의 물놀이는 초등학생들의 인기가 아주 많습니다.&lt;br /&gt;
최근에는 이 마을에서 태어난 청백리 [[박수량]] 선생의 청백리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청백한옥]이란 이름의 전통한옥이 건립되었습니다. 청렴교육관광으로 찾아오신 많은 분들이 청백리문화를 체험하는 곳으로 각광받고 있습니다.이 밖에도 [[홍길동]] 테마파크의 여행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는 다양한 기념품을 전시 판매하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82%A8%EC%B0%BD%EA%B3%84%EA%B3%A1_KU</id>
		<title>남창계곡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82%A8%EC%B0%BD%EA%B3%84%EA%B3%A1_KU"/>
				<updated>2014-06-14T16:29: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File:Namc.jpg|400px|thumb|&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남창 계곡'''&amp;lt;/div&amp;gt;]]&lt;br /&gt;
&lt;br /&gt;
==Meta Data==&lt;br /&gt;
*타입: 장소&lt;br /&gt;
*한글명: 남창계곡&lt;br /&gt;
*주소 :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남창로399&lt;br /&gt;
*위치 : [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5.458061&amp;amp;longi=126.841116&amp;amp;pname=남창계곡 위도 35.458061 / 경도 126.841116]&lt;br /&gt;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410331정주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0038 임경희]]&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광주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입암산 기슭에 위치한 남창계곡은 산성골, 은선동, 반석동, 하곡동, 자하동, 내인골 등 여섯갈래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길이가 십여리에 이른다.&lt;br /&gt;
계곡 곳곳마다 크고 작은 폭포와 기암괴석이 늘어서 있는 모습은 마치 선계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온갖 새소리가 그침이 없는 울창한 수목과 산천어의 작은 놀림까지 들여다 보이는 수정처럼 맑은 계곡물과 계곡을 따라 지루하지 않게 이어지는 오솔길은 남창계곡이 자랑하는 가장 빼어난 멋이다. &lt;br /&gt;
또, 남창계곡이 시작되는 입구인 전남대학교 임업수련원에서 1시간 정도 올라가면 삼한시대때 축성한 입암산성을 둘러 볼 수 있다. 이곳에서 호국선영의 기개와 호국정신을 되새기는 것도 또 다른 관광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lt;br /&gt;
전남·북을 잇는 고속도·철도·국도가 모두 산 서쪽 갈재협곡을 통해 있는 교통의 요충지인 입암산 주위에 축성한 입암산성은 총연장 5천2백8미터의 석성이다. 남쪽을 제외한 3면이 급경사를 이룬 천혜의 요새지로 고려때는 송군비 장군이 몽고군을 격퇴하고, 정유재란때는 윤진 장군이 왜장 소서행장과 맞서 싸우다 순절한 역사의 현장이다.&lt;br /&gt;
이 밖에 산성의 서쪽 정상에 있는 갓바위와 마당바위, 베틀바위, 상여바위, 족두리바위, 쥐똥바위 등의 기암괴석들이 즐비해 시간적 여유가 있는 여행객이라면 한번쯤 해발 6백8십여 미터의 정상에 올라 국립공원 백양사 지구로 지정된 빼어난 주변경관을 굽어볼 만 하다. 인근에는 대한팔경 중의 하나로 서기 632년(백제 무왕33년)에 여환선사가 창건한 백양사와 장성호, 장성호 관광지 등의 명소가 있어 하루 관광코스로 최적의 여건을 갖추고 있다.&lt;br /&gt;
&lt;br /&gt;
== 등산코스 ==&lt;br /&gt;
 주차장 → 전남대수련원 → 은선계곡 → 갓바위 → 입암산성 → 전남대수련원 → 백양사(7㎞, 4시간 소요)&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E%A5%EC%84%B1%ED%98%B8_KU</id>
		<title>장성호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E%A5%EC%84%B1%ED%98%B8_KU"/>
				<updated>2014-06-14T16:28: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File:Jangs.jpg|400px|thumb|&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장성호'''&amp;lt;/div&amp;gt;]]&lt;br /&gt;
&lt;br /&gt;
==Meta Data==&lt;br /&gt;
*타입: 장소&lt;br /&gt;
*한글명: 장성호&lt;br /&gt;
*한자명: 長城湖&lt;br /&gt;
*주소 :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용강리 164-1 &lt;br /&gt;
*위치 : [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5.389539&amp;amp;longi=126.839887&amp;amp;pname=장성호 위도 35.389539 / 경도 126.839887]&lt;br /&gt;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410331정주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0038 임경희]]&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전라남도 장성군에 있는 호수이다. 백암산과 입암산의 깊은 계곡을 따라 흘러내린 황룡강의 상류를 막아 광주광역시 광산구, 나주시, 장성군, 함평군 등 4개 시․군․구의 농토를 적셔주는 젖줄 구실을 하고 있는 장성호는 최근들어 낚시터, 수상스키, 카누 등 전국적인 수상 관광지로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lt;br /&gt;
잉어, 쏘가리, 빙어, 붕어 등 각종 민물고기가 많아 강태공들의 발길이 연중 끊이지 않는 장성호는 1977년 장성호 관광지로 지정되는 등 장성관광의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lt;br /&gt;
댐 아래 넓게 설치된 주차장과 상류에 관광지에는 가족유희장, 취사장 등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가족이나 직장동료들의 단체활동이 가능하며, 인근 주변 미락단지의 음식맛을 맛보지 않은 사람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할 정도이다.&lt;br /&gt;
2005년에 준공된 장성문화예술공원에는 우리나라 및 세계적으로 문화예술인의 혼이 담긴 시(詩), 서(書), 화(畵), 어록(語錄) 103점의 작품을 조각에 새겨 설치한 최대규모의 조각공원이 들어서 있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B6%95%EB%A0%B9%EC%82%B0_%ED%9C%B4%EC%96%91%EB%A6%BC_KU</id>
		<title>축령산 휴양림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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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File:Chuk.jpg|400px|thumb|&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축령산 휴양림'''&amp;lt;/div&amp;gt;]]&lt;br /&gt;
&lt;br /&gt;
==Meta Data==&lt;br /&gt;
*타입: 장소&lt;br /&gt;
*한글명: 축령산 자연휴양림&lt;br /&gt;
*주소 :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외방리 280&lt;br /&gt;
*위치 : [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7.753478&amp;amp;longi=127.316348&amp;amp;pname=축령산 휴양림 위도 37.753478 / 경도 127.316348]&lt;br /&gt;
*편자 :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410331정주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0038 임경희]]&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외방리에 소재한 축령산자연&lt;br /&gt;
휴양림은 서울에서 약 1시간 거리에 있으며 [[축령산]](886m)과 [[서리산]](832m)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등산로와 함께 울창한 잣나무 숲에는 숲속의 집 등 각종 편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자연과 함께 숨쉬며 스트레스와 지친 심신을 말끔히 씻고 즐거움과 편안함을 더할 수 있는 곳이다 .   &lt;br /&gt;
특히, 연분홍 터널을 형성하는 서리산 정상에 1만여평 철쭉군락지와 4계절 푸른 50~60년생의 아름드리 잣나무림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진한 감동과 긴 여운이 있어 여행의 설레임과 삶의 윤기를 더해 주는 수도권 제일의 자연휴양림이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0%B1%EC%96%91%EC%82%AC_KU</id>
		<title>백양사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0%B1%EC%96%91%EC%82%AC_KU"/>
				<updated>2014-06-14T16:27: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File:Backy.jpg|300px|thumb|&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백양사'''&amp;lt;/div&amp;gt;]]&lt;br /&gt;
==Meta Data==&lt;br /&gt;
*타입: 장소&lt;br /&gt;
*한글명 : 백양사&lt;br /&gt;
*한자명 : 白羊寺&lt;br /&gt;
*주소 :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26&lt;br /&gt;
*위치 : [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5.446478&amp;amp;longi=126.883151&amp;amp;pname=백양사 위도 35.446478 / 경도 126.883151]&lt;br /&gt;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410331정주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0038 임경희]]&lt;br /&gt;
----&lt;br /&gt;
&lt;br /&gt;
== 요약 ==&lt;br /&gt;
[[백양사 KU|백양사]](白羊寺)는 대한민국의 전라남도 장성군에 있는 사찰이다. 호남선 백양사역의 이름이 이 절에서 유래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다. 632년(무왕 33) 여환(如幻)이 창건하여 백양사라고 하였으며, 1034년(덕종 3) 중연(中延)이 중창하면서 정토사(淨土寺)라 개칭하였고, 1350년(충정왕 2) 각진국사(覺眞國師)가 3창하였다. 15세기에 백암사(白巖寺)로 바뀌었다가 16∼19세기 중반에 다시 정토사로 고쳤다.&lt;br /&gt;
&lt;br /&gt;
다시 백양사로 개액(改額)한 것은 1574년(선조 7) 환양(喚羊)이 중건하면서부터이다. 환양이 백양사에 주석하면서 매일 ≪법화경≫을 독송하니 백양이 경을 읽는 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일이 많아 절 이름을 백양사라 개칭하고 승려의 법명도 환양이라 하였다.&lt;br /&gt;
&lt;br /&gt;
그 뒤 1786년(정조 10) 환성(喚惺)이 중건하였고 1864년(고종 1) 도암(道巖)이 중건하였으며, 1917년 송만암(宋曼庵)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lt;br /&gt;
&lt;br /&gt;
만암은 45세 때부터 백양사 주지직을 맡아 30년 가까이 주석하면서 불사(佛事)에 진력하는 한편, 강원(講院)을 개설하고 중앙불교전문학교장을 겸임하면서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lt;br /&gt;
&lt;br /&gt;
백양사는 31본산시대의 본산이었으며, 현재 부속 말사 26개 소를 관장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극락보전(極樂寶殿)·명부전(冥府殿)·칠성각(七星閣)·진영각(眞影閣)·천왕문(天王門)·선실(禪室)·요사채와 범종·법고·목어·운판 등의 사물(四物)을 소장하고 있는 범종각(梵鐘閣)이 있다.&lt;br /&gt;
&lt;br /&gt;
이 가운데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인 대웅전은 1917년 송만암이 백양사를 중건할 때 건립한 것으로 내부에는 석가여래삼존불과 1979년 보각행(普覺行)이 조성하여 새로 모신 10척 높이의 불상, 그 왼편에 용두관음탱화가 봉안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또한 대웅전 내 오른쪽으로 바늘귀를 꿰는 모습, 등을 긁는 모습 등 해학적인 모습을 한 나한상 23체가 봉안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2호인 극락보전은 400여 년 전에 지은 것으로서 백양사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영·정조 대에 지은 건물인데, 건평 50㎡에 세워진 정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lt;br /&gt;
&lt;br /&gt;
1973년 단청하였으며 1976년 보수하였다. 명부전은 1896년에 건립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이며, 각 주두(柱頭)마다 공포가 장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전내에는 흙으로 조성한 시왕(十王)과 목조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이 봉안되어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인 사천왕문(四天王門)은 백양사의 정문으로 1917년 건립되었으며, 현재 문의 오른쪽에는 지국천왕(持國天王)과 증장천왕(增長天王), 왼쪽에는 광목천왕(廣目天王)과 다문천왕(多聞天王)이 봉안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이 밖에도 대웅전 뒤편의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한 팔층탑(八層塔)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 3과가 안치되어 있으며, 부도전에는 백양사에서 배출, 주석하였던 휴정(休靜)·유정(惟政)·모운(慕雲)·태능(太能)·범해(梵海) 등 18승려의 사리와 유골을 모신 석종(石鐘) 모양의 탑과 비(碑)가 있다.&lt;br /&gt;
&lt;br /&gt;
이 중 소요대사 부도(逍遙大師浮屠)는 백양사 재흥에 힘쓴 태능의 유업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탑으로, 그 둘레에는 용이 구름을 감고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조각이 되어 있고, 좌대에는 연잎들이 조각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이 부도는 석종형으로서 상대(上帶)·유곽(乳廓)·하대(下帶) 등에 양각으로 섬세하게 조각되었으며, 기단은 복련(覆蓮)으로 덮은 위에 2단의 몰딩을 두어 종신(鐘身)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이 백양사 소요대사 부도는 1974년 12월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백양사의 산내암자로는 약사암(藥師庵)과 영천굴(靈泉窟), 1351년에 창건한 청류암(淸流庵), 1981년에 지은 수도도량 물외암(物外庵), 천진암(天眞庵) 등이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부터 있어 온 운문암(雲門庵) 등 많은 암자들이 6·25전쟁 때 불타버렸다.&lt;br /&gt;
&lt;br /&gt;
이 중 운문암은 6·25전쟁 전까지만 해도 백양사 8개 암자 중 대표암자였으며, 백양사 뒤 계곡을 끼고 3.5㎞ 위에 있다.&lt;br /&gt;
&lt;br /&gt;
고려 때 각진이 창건했다는 운문암은 백양사 수도도량 중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있으며, 조선시대의 신승 진묵(震默)의 일화가 전해 오고 있다. 진묵이 임진왜란 직전 이 암자에서 차를 달이는 소임을 맡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전체 대중이 차를 달이는 운문암 중을 조사(祖師)로 모시라는 현몽을 한 뒤 진묵을 조실(祖室)로 앉혔다.&lt;br /&gt;
&lt;br /&gt;
어느날 진묵은 “내가 올 때까지는 이 불상을 도금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으므로 지금도 그 불상은 거뭇한 그늘색을 띤 채 진묵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lt;br /&gt;
&lt;br /&gt;
또 백양사 오른쪽 계곡 상부에 있는 국제기(國祭基)는 천신께 제사를 올리던 곳으로서 호남일대에 재난이 있을 때에는 나라의 명을 받아 이곳에서 천제(天祭)를 올렸다.&lt;br /&gt;
&lt;br /&gt;
조선시대 영조 때 호남지방에 대유행병(大流行病)이 나돌아 호남 감사가 영조에게 상소를 올리자 영지를 택하여 크게 기도를 드리라고 하였으므로, 이곳 바위에다 ‘國祭基’를 음각(陰刻)하여 새기고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이 그 유래이다.&lt;br /&gt;
&lt;br /&gt;
또 영천굴은 20평 남짓한 천연석굴로 단칸의 영천암이 있는 곳이다. 굴 속의 바위틈에서 샘이 솟아나오는데 이를 영천이라 한다.&lt;br /&gt;
&lt;br /&gt;
장마 때나 가뭄 때나 항상 일정한 물이 흐르는 이 샘에는 옛날 한 사람이 먹을 만큼의 쌀이 나왔는데, 하루는 어떤 손님이 와서 더 많이 나오라고 작대기로 쑤셨더니 그 뒤로는 쌀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또 백양십이경의 하나인 일광정(日光亭)에서는 해마다 사월초파일에 불가(佛家)의 시련법식(侍輦法食)이 거행되며, 백양사 뒤의 학바위는 고려 때부터 조선 중종 때까지 천제를 지낸 곳이라 한다. 절 일대의 비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고 약 3만 그루가 밀집하고 있어 춘백양(春白羊) 추내장(秋內藏)이란 칭호를 얻고 있다.&lt;br /&gt;
&lt;br /&gt;
이 밖에도 백암산의 학봉·상왕봉·사자봉·가인봉 등의 절경과 설경 등이 어울려 백양사일대는 예로부터 조선팔경의 하나로 유명했던 곳이기도 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 출처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7107&amp;amp;cid=1620&amp;amp;categoryId=1620 한국민족대백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6%8C%EC%87%84%EC%9B%90_48%EC%98%81_KU</id>
		<title>소쇄원 48영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6%8C%EC%87%84%EC%9B%90_48%EC%98%81_KU"/>
				<updated>2014-06-14T16:26: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타입 : 문화유산&lt;br /&gt;
*한글항목명 : 소쇄원 48영&lt;br /&gt;
*한자항목명 : 瀟灑園 48詠&lt;br /&gt;
*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송시열 KU|송시열]]이 그린 그림을 1755년에 판각(板刻)한 〈소쇄원도〉(瀟灑園圖)에는 [[양산보 KU|양산보]]의 사돈인 [[김인후 KU|김인후]]가 1548년 당시 [[소쇄원 KU|소쇄원]]을 보고 쓴 48수의 시제가 새겨져 있으니 이를 〈소쇄원 48영〉이라 한다.&lt;br /&gt;
&lt;br /&gt;
[[김인후 KU|하서]] [[김인후 KU|김인후]]의 〈소쇄원 48영은 [[소쇄원 KU|소쇄원]]의 건축적 구성을 명확히 보여주고 각 공간에서 일어난 행위와 감상까지 생생히 전해준다. 시에 나타난 정원의 모습과 이미지는 그 자체를 건축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정도이다. 이 시는 소쇄원의 계획 개념을 핵심적으로 간파한 것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대숲의 바람과 소쩍새 울음, 엷은 그늘과 밝은 달, 그리고 취중에 나오는 시와 노래다. 청각적인 소리, 시각적인 빛과 그늘의 대조, 그리고 관람자의 문학적인 감수성으로 소쇄원의 진가를 포착한 것이다.&lt;br /&gt;
&lt;br /&gt;
==소쇄원 48영==&lt;br /&gt;
*[http://www.soswaewon.co.kr/subFrame.html?menu_mcat=100005&amp;amp;menu_cat=100005&amp;amp;img_num=sub4 소쇄원]&lt;br /&gt;
&lt;br /&gt;
*제1영 작은 정자의 난간에 의지해	&lt;br /&gt;
소쇄원의 빼어난 경치&lt;br /&gt;
한데 어울려 소쇄정 이루었네&lt;br /&gt;
눈을 쳐들면 시원한 바람 불어오고&lt;br /&gt;
귀 기울이면 구슬 굴리는 물소리 들려라&lt;br /&gt;
&lt;br /&gt;
*제2영 시냇가의 글방에서&lt;br /&gt;
창 밝으니 방안의 첨축들 한결 깨끗하고&lt;br /&gt;
맑은 수석엔 책들이 비춰 보이네&lt;br /&gt;
정신들여 생각하고 마음대로 기거하니&lt;br /&gt;
오묘한 계합 천지 조화의 작용이라네&lt;br /&gt;
&lt;br /&gt;
*제3영 높직한 바위에 펼쳐 흐르는 물&lt;br /&gt;
흐르는 물은 바위를 씻어 내리고&lt;br /&gt;
하나의 돌이 개울에 가득하네.&lt;br /&gt;
가운데는 잘 다듬어졌으니&lt;br /&gt;
경사진 절벽은 하늘의 작품이로다.&lt;br /&gt;
&lt;br /&gt;
*제4영 산을 등지고 있는 거북바위	&lt;br /&gt;
등뒤엔 겹겹의 청산이요,&lt;br /&gt;
머리를 돌리면 푸른 옥류(玉流)라&lt;br /&gt;
긴긴 세월 편히 앉아 움직이지 않고&lt;br /&gt;
대와 각이 영주산 보다 낫구나.&lt;br /&gt;
&lt;br /&gt;
*제5영 위험한 돌길을 더위 잡아 오르며	&lt;br /&gt;
시냇물 돌을 씻어 흘러내리고&lt;br /&gt;
한 줄기 바위 온통 골짜기에 깔렸는데&lt;br /&gt;
한 필의 비단인가, 날리는 폭포 그 가운데 펼쳤어라&lt;br /&gt;
멋있게 기울어진 낭떠러지 하느님이 만든 거라네&lt;br /&gt;
&lt;br /&gt;
*제6영 작은 연못에 고기떼 놀고	&lt;br /&gt;
네모진 연못은 한 이랑도 되지 못되나&lt;br /&gt;
맑은 물받이 하기엔 넉넉하구나&lt;br /&gt;
주인의 그림자에 고기떼 헤엄쳐 노니&lt;br /&gt;
낚싯줄 내던질 마음 전혀 없어라&lt;br /&gt;
&lt;br /&gt;
*제7영 나무 홈통을 뚫고 흐르는 물	&lt;br /&gt;
샘 줄기의 물 홈통을 뚫고 굽이쳐 흘러&lt;br /&gt;
높낮은 대숲 아래 못에 내리네&lt;br /&gt;
세차게 쏟아져 물방아에 흩어지고&lt;br /&gt;
물 속의 인갑들은 잘아서 들쭉날쭉 해&lt;br /&gt;
&lt;br /&gt;
*제8영 물보라 일으키는 물방아	&lt;br /&gt;
온종일 줄줄 흐르는 물의 힘으로&lt;br /&gt;
찧고 찧어서 절로 공을 이루네&lt;br /&gt;
직녀성이 짜놓은 베틀의 비단&lt;br /&gt;
조용히 방아소리를 따르네.	&lt;br /&gt;
&lt;br /&gt;
*제9영 통나무대로 걸쳐 놓은 높직한 다리	&lt;br /&gt;
골짜기에 걸쳐서 죽림으로 뚫렸는데&lt;br /&gt;
높기도 하여 하늘에 둥둥 떠있는 듯&lt;br /&gt;
숲 속의 연못 원래 빼어난 승경이지만&lt;br /&gt;
다리가 놓이니 속세와는 더욱 멀어졌네&lt;br /&gt;
&lt;br /&gt;
*제10영 대숲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	&lt;br /&gt;
하늘 가 저 멀리 이미 사라졌다가&lt;br /&gt;
다시 고요한 곳으로 불어오는 바람&lt;br /&gt;
바람과 대 본래 정이 없다지만&lt;br /&gt;
밤낮으로 울려 대는 대피리 소리&lt;br /&gt;
&lt;br /&gt;
*제11영 못 가 언덕에서 더위를 식히며	&lt;br /&gt;
남쪽 고을은 무더위가 심하다지만&lt;br /&gt;
이 곳만은 유달리 서늘한 가을&lt;br /&gt;
바람은 언덕 가의 대숲에 일고&lt;br /&gt;
연못 물 바위 위에 흩어져 흐르네	&lt;br /&gt;
&lt;br /&gt;
*제12영 매대에서의 달맞이	&lt;br /&gt;
나무숲 쳐내니 매대는 확 트여서&lt;br /&gt;
달 떠오는 때에 더욱 알맞아&lt;br /&gt;
구름도 다 걷혀감이 가장 사랑스러운데&lt;br /&gt;
차가운 밤이라 아름다운 매화 곱게 비추네	&lt;br /&gt;
&lt;br /&gt;
*제13영 넓은 바위에 누워 달을 보며	&lt;br /&gt;
나와 누우니 푸른 하늘에 밝은 달이라&lt;br /&gt;
넓은 바위는 바로 좋은 자리가 됐네&lt;br /&gt;
주위의 숲에는 그림자 운치 있게 흩어져&lt;br /&gt;
깊은 밤인데도 잠 이룰 수 없어라	&lt;br /&gt;
	&lt;br /&gt;
*제14영 담장 밑구멍을 뚫고 흐르는 물	&lt;br /&gt;
한 걸음 한 걸음 물을 보고 지나며&lt;br /&gt;
글을 읊으니 생각은 더욱 그윽해&lt;br /&gt;
사람들은 진원을 찾아 거슬러 가지도 않고&lt;br /&gt;
부질없이 담 구멍에 흐르는 물만을 보네	&lt;br /&gt;
	&lt;br /&gt;
*제15영 살구나무 그늘 아래 굽이도는 물	&lt;br /&gt;
지척에 물줄기 줄줄 내리는 곳&lt;br /&gt;
분명 오곡의 구비 도는 흐름이라&lt;br /&gt;
당년 물가에서 말씀하신 공자의 뜻&lt;br /&gt;
오늘은 살구나무 가에서 찾는구나	&lt;br /&gt;
	&lt;br /&gt;
*제16영 석가산의 풀과 나무들	&lt;br /&gt;
인력을 들이지 않고 만든 산이지만&lt;br /&gt;
조물造物이라 도리어 석가산 됐네&lt;br /&gt;
형세를 좇아 우거진 숲을 일으켰구나&lt;br /&gt;
역시 산야 그대로 이네.	&lt;br /&gt;
&lt;br /&gt;
*제17영 천연의 소나무와 바윗돌&lt;br /&gt;
높은 뫼에서 굴러 내린 조각 바위들&lt;br /&gt;
뿌리 얽혀 서있는 두어 자 소나무&lt;br /&gt;
오랜 세월에 몸엔 꽃을 가득 피우고&lt;br /&gt;
기세 곧아서 하늘 높이 솟아 푸르네	&lt;br /&gt;
&lt;br /&gt;
*제18영 바윗돌에 두루 덮인 푸른 이끼&lt;br /&gt;
바윗돌 오랠수록 구름 안개에 젖어&lt;br /&gt;
푸르고 푸르러 이끼 꽃을 이루네&lt;br /&gt;
흔히 구학을 즐기는 은자들의 본성은&lt;br /&gt;
변화함에는 전연 뜻을 두지 않는다네	&lt;br /&gt;
&lt;br /&gt;
*제19영 평상바위에 조용히 앉아	&lt;br /&gt;
낭떠러지 바위에 오래도록 앉았으면&lt;br /&gt;
깨끗하게 쓸어가는 계곡의 시원한 바람&lt;br /&gt;
무릎이 상한 데도 두렵지 않아&lt;br /&gt;
관물하는 늙은이에겐 가장 알맞네	&lt;br /&gt;
&lt;br /&gt;
*제20영 맑은 물가에서 거문고 비껴 안고	&lt;br /&gt;
소리내는 거문고 타기 쉽지 않는 건&lt;br /&gt;
세상에는 종자기같은 친구 없어서라&lt;br /&gt;
맑고 깊은 물에 한 곡조 울리고 나면&lt;br /&gt;
마음과 귀만은 서로 안다네	&lt;br /&gt;
&lt;br /&gt;
*제21영 빙빙도는 물살에 술잔 띄워보내며	&lt;br /&gt;
물살 치는 돌 웅덩이에 둘러앉으면&lt;br /&gt;
소반의 술안주 뜻한 대로 넉넉해&lt;br /&gt;
빙빙 도는 물결에 절로 오고가니&lt;br /&gt;
띄우는 술잔 한가로이 서로 권하네	&lt;br /&gt;
&lt;br /&gt;
*제22영 평상바위에서 바둑을 두며	&lt;br /&gt;
평상바위 조금은 넓고 평평하여&lt;br /&gt;
죽림에서 지냄이 대부분이라네&lt;br /&gt;
손님이 와서 바둑 한판 두는데&lt;br /&gt;
공중에서우박이 흩어져 내려	&lt;br /&gt;
&lt;br /&gt;
*제23영 긴 섬돌을 거닐며	&lt;br /&gt;
차분히도 속세를 벗어난 마음으로&lt;br /&gt;
소요하며 섬돌 위를 구애 없이 걷네&lt;br /&gt;
노래할 땐 갖가지 생각들 한가해지고&lt;br /&gt;
읊고 나면 또 희로 애락의 속정 잊혀지네	&lt;br /&gt;
&lt;br /&gt;
*제24영 홰나무 가 바위에 기대어 졸며&lt;br /&gt;
몸소 홰나무 가의 바위를 쓸고서&lt;br /&gt;
아무도 없이 홀로 앉아 있을 때에&lt;br /&gt;
졸다가 놀래어 일어서는 건&lt;br /&gt;
의왕에게 알려질까 두려워서라	&lt;br /&gt;
&lt;br /&gt;
*제25영 조담에서 미역을 감고	&lt;br /&gt;
맑은 조담 깊어도 바닥이 보이고&lt;br /&gt;
미역을 감고나도 맑기는 여전해&lt;br /&gt;
미덥지 않은 건 인간 세상이라&lt;br /&gt;
염정을 걷던 발 때도 씻어버리네	&lt;br /&gt;
&lt;br /&gt;
*제26영 다리 너머의 두 그루 소나무	&lt;br /&gt;
콸콸 소리내며 섬돌 따라 흐르는 물&lt;br /&gt;
다리 너머에 두 그루 소나무 서 있네&lt;br /&gt;
옥이 나는 남전은 오히려 일이 분주해&lt;br /&gt;
그 다툼은 조용한 여기에도 미치리라	&lt;br /&gt;
&lt;br /&gt;
*제27영 낭떠러지에 흩어져 자라는 소나무와 국화	&lt;br /&gt;
북쪽의 고개는 층층이 푸르고&lt;br /&gt;
동쪽 울타리엔 점점이 누런 황국이라&lt;br /&gt;
낭떠러지 장식하여 여기저기 심어 있고&lt;br /&gt;
세밑 늦가을 풍상에도 버티고 섰네	&lt;br /&gt;
&lt;br /&gt;
*제28영 받침대 위의 매화	&lt;br /&gt;
매화의 신기함을 바로 말하려거든&lt;br /&gt;
모름지기 돌에 꽂힌 뿌리를 보아야 해&lt;br /&gt;
맑고 얕은 물까지 겸하고 있어&lt;br /&gt;
황혼이면 성긴 그림자들 드리우네	&lt;br /&gt;
&lt;br /&gt;
*제29영 좁은 길가의 밋밋한 대나무들	&lt;br /&gt;
눈에 덮인 대 줄기 곧아서 창창하고&lt;br /&gt;
구름에 싸인 대 끝 솔솔바람에 간드러지네&lt;br /&gt;
지팡이 짚고 나가 묵은 대껍질 벗기고&lt;br /&gt;
띠를 풀어서 새 줄기는 동여준다네	&lt;br /&gt;
&lt;br /&gt;
*제30영 바위틈에 흩어져 뻗은 대 뿌리	&lt;br /&gt;
흰 대 뿌리 티끌에 더럽혀질까 하면서도&lt;br /&gt;
시시로 돌 위에 뻗어 나오네&lt;br /&gt;
어린 대 뿌리 몇 해를 자라났는고&lt;br /&gt;
곧은 마음은 오랠수록 더욱 모질다네	&lt;br /&gt;
&lt;br /&gt;
*제31영 낭떠러지에 집 짓고 사는 새	&lt;br /&gt;
벼랑 가에서 펄펄 나는 새&lt;br /&gt;
때때로 물 속에 내려와 노네&lt;br /&gt;
마시고 쪼는 건 제 심성 그대로요&lt;br /&gt;
본디 잊었다네, 백구와 저항하기를	&lt;br /&gt;
&lt;br /&gt;
*제32영 저물어 대밭에 날아드는 새	&lt;br /&gt;
바위 위 여러 무더기의 대나무 숲&lt;br /&gt;
상비의 눈물 자국 아직도 남았어라&lt;br /&gt;
산새들 그 한을 깨닫지 못하고&lt;br /&gt;
땅거미 지면 제 깃 찾아들 줄 아네	&lt;br /&gt;
&lt;br /&gt;
*제33영 산골 물가에서 졸고 있는 오리	&lt;br /&gt;
하늘이 유인에게 부쳐준 계책은&lt;br /&gt;
맑고 시원한 산골짜기 샘물이라네&lt;br /&gt;
아래로 흐르는 물 모두 자연 그대로라&lt;br /&gt;
나눠 받은 물가에서 오리 한가히 조네	&lt;br /&gt;
&lt;br /&gt;
*제34영 세차게 흐르는 여울물가의 창포	&lt;br /&gt;
듣자니 여울 물가의 창포&lt;br /&gt;
아홉 마디마다 향기를 지녔다네&lt;br /&gt;
날리는 여울 물 날로 뿜어대니&lt;br /&gt;
이 한가지로 염량을 꿰뚫는다오	&lt;br /&gt;
&lt;br /&gt;
*제35영 빗긴 처마 곁에 핀 사계화	&lt;br /&gt;
정작 꽃 중의 으뜸으로 치는 사계화&lt;br /&gt;
사시로 청화함을 갖추어서인가&lt;br /&gt;
초가지붕 비스듬해 더욱 운치 있어라&lt;br /&gt;
매화와 대나무도 곧 알아준다네&lt;br /&gt;
&lt;br /&gt;
*제36영 복숭아 언덕에서 맞는 봄 새벽	&lt;br /&gt;
복숭아 언덕에 봄철이 찾아드니&lt;br /&gt;
만발한 꽃들 새벽 안개에 드리워 있네&lt;br /&gt;
바윗골 동리 안이라 어렴풋하여&lt;br /&gt;
무릉계곡을 건너는 듯하구나	&lt;br /&gt;
&lt;br /&gt;
*제37영 오동나무 언덕에 드리운 여름 그늘&lt;br /&gt;
묵은 오동 줄기 바위 벼랑까지 이어 있어&lt;br /&gt;
우로의 혜택이라 항시 맑게 그늘지네&lt;br /&gt;
순임금의 은혜 길이길이 밝혀져서&lt;br /&gt;
온화한 남풍 지금까지 불어주네	&lt;br /&gt;
&lt;br /&gt;
*제38영 오동나무 녹음 아래 쏟아지는 폭포&lt;br /&gt;
무성한 나뭇가지 녹엽의 그늘인데&lt;br /&gt;
어젯밤 시냇가엔 비가 내렸네&lt;br /&gt;
난무하는 폭포 가지 사이로 쏟아지니&lt;br /&gt;
돌아보건대 봉황새 춤추는 게 아닌가	&lt;br /&gt;
&lt;br /&gt;
*제39영 버드나무 물가에서의 손님 맞이	&lt;br /&gt;
나그네 찾아와서 사립문 두드리매&lt;br /&gt;
몇 마디 소리로 낮잠을 깨었네&lt;br /&gt;
관을 쓰고 미처 인사드리지 못했는데&lt;br /&gt;
말 매놓고 버드나무 물가에 서 있네	&lt;br /&gt;
&lt;br /&gt;
*제40영 골짜기 건너편 연꽃	&lt;br /&gt;
조촐하게 섰는 게 훌륭한 화훼花卉로다&lt;br /&gt;
한가로운 모습 멀리서 볼 만하고&lt;br /&gt;
향긋한 기운 골짝을 건너와 풍기네&lt;br /&gt;
방안에 들이니 지란보다 더 좋구나	&lt;br /&gt;
&lt;br /&gt;
*제41영 연못에 흩어져 있는 순채 싹&lt;br /&gt;
장한이 강동으로 귀향한 후로&lt;br /&gt;
풍류를 아는 이 그 누구던고&lt;br /&gt;
반드시 사랑하는 농어회 같이하지 않더라도&lt;br /&gt;
기다란 순채 싹 맛보고자 하네	&lt;br /&gt;
&lt;br /&gt;
*제42영 산골물 가까운에 핀 백일홍	&lt;br /&gt;
세상엔 무성히 자란 꽃이라도&lt;br /&gt;
도무지 열흘 가는 향기 없다네&lt;br /&gt;
어찌하여 산골 물가의 배롱나무만은&lt;br /&gt;
백일 내내 붉은 꽃을 대하게 하는고	&lt;br /&gt;
&lt;br /&gt;
*제43영 빗방울 떨어지는 파초잎	&lt;br /&gt;
어지러이 떨어지니 은 화살 던지는 듯&lt;br /&gt;
푸른 비단 파초잎 높낮이로 춤을 추네&lt;br /&gt;
같지는 않으나 사향의 소리인가&lt;br /&gt;
되레 사랑스러워라. 적막함 깨뜨려 주니	&lt;br /&gt;
&lt;br /&gt;
*제44영 골짜기에 비치는 단풍	&lt;br /&gt;
가을이 드니 바위 골짜기 서늘하고&lt;br /&gt;
단풍은 이미 서리에 놀래 물들었네&lt;br /&gt;
아름다운 채색 고요하게 흔들리니&lt;br /&gt;
그 그림자 거울에 비친 경치로다	&lt;br /&gt;
&lt;br /&gt;
*제45영 평원에 깔려 있는 눈	&lt;br /&gt;
산에 낀 검은 구름 깨닫지 못하다가&lt;br /&gt;
창문 열고 보니 평원엔 눈이 가득&lt;br /&gt;
섬돌에도 골고루 흰눈 널리 깔리어&lt;br /&gt;
한적한 집안에 부귀 찾아들었네	&lt;br /&gt;
&lt;br /&gt;
*제46영 눈에 덮인 붉은 치자	&lt;br /&gt;
듣건대 치자꽃 여섯 잎으로 핀다더니&lt;br /&gt;
사람들은 그 자욱한 향기 넘친다 하네&lt;br /&gt;
붉은 열매 푸른 잎과 서로 어울려&lt;br /&gt;
눈서리에도 맑고 곱기만 하여라	&lt;br /&gt;
&lt;br /&gt;
*제47영 애양단의 겨울 낮맞이	&lt;br /&gt;
애양단 앞 시냇물 아직 얼어 있지만&lt;br /&gt;
애양단 위의 눈은 모두 녹았네&lt;br /&gt;
팔 베고 따뜻한 볕 맞이하다 보면&lt;br /&gt;
한낮 닭울음소리가 타고 갈 가마에 들려 오네	&lt;br /&gt;
&lt;br /&gt;
*제48영 긴 담에 써 붙인 소쇄원 제영	&lt;br /&gt;
긴 담은 옆으로 백 자나 되어&lt;br /&gt;
하나하나 써 붙여 놓은 새로운 시&lt;br /&gt;
마치 병풍 벌려 놓은 듯하구나&lt;br /&gt;
비바람만은 함부로 업신여기지 마오&lt;br /&gt;
&lt;br /&gt;
==참조항목==&lt;br /&gt;
*[[양산보 KU| 양산보]]&lt;br /&gt;
*[[양자징 KU| 양자징]]&lt;br /&gt;
*[[소쇄원 KU| 소쇄원]]&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AC%B8%EB%AC%98_KU</id>
		<title>문묘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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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4T16:24:3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 내용 */&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타입 : 문화유산&lt;br /&gt;
*한글항목명 : 문묘&lt;br /&gt;
*한자항목명 : 文廟&lt;br /&gt;
*지정 번호 :보물 제141호. &lt;br /&gt;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0038 임경희]]&lt;br /&gt;
----&lt;br /&gt;
[[File:Daes.jpg|300px|thumb|&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성균관 대성전'''&amp;lt;/div&amp;gt;]]&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문묘(文廟)는 유교를 집대성한 [[공자 KU|공자(孔子)]]나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을 말한다.&lt;br /&gt;
문묘는 크게 대성전을 비롯한 동무,서무 등 제사를 위한 공간인 '대성전 구역'과 명륜당, [[동재 KU|동재]]․[[서재 KU|서재]] 등 교육을 위한 공간인 '명륜당 구역'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lt;br /&gt;
대성전(大成殿)은 선조 34～35년(1601～1602)에 지은 건물로, [[공자 KU|공자]]를 비롯해 [[증자 KU|증자]],[[맹자 KU|맹자]],[[안자 KU|안자]],[[자사 KU|자사]] 등 4대 성인과 [[공자 KU|공자]]의 뛰어난 제자들인 [[10철|10철]], 송조 6현, 그리고 [[설총 KU|설총]]과 [[최치원 KU|최치원]] 등 우리나라 명현 18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lt;br /&gt;
&lt;br /&gt;
문묘 18현에는 [[설총 KU|설총]], [[최치원 KU|최치원]], [[안향 KU|안향]], [[정몽주 KU|정몽주]], [[김굉필 KU|김굉필]], [[정여창 KU|정여창]], [[조광조 KU|조광조]], [[이언적 KU|이언적]], [[이황 KU|이황]], [[이이 KU|이이]], [[성혼 KU|성혼]], [[김장생 KU|김장생]], [[조헌 KU|조헌]], [[김집 KU|김집]], [[송시열 KU|송시열]], [[송준길 KU|송준길]], [[박세채 KU|박세채]]와 더불어 전라도 출신 학자로는 유일하게 [[김인후 KU|김인후]] 선생이 포함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0%95%EC%84%B8%EC%B1%84_KU</id>
		<title>박세채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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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4T16:23: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타입 : 인물&lt;br /&gt;
*이름: 박세채(朴世采)&lt;br /&gt;
*생년 : 1631년&lt;br /&gt;
*몰년 : 1695년&lt;br /&gt;
*역할 : 문묘 18현&lt;br /&gt;
*편자 :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영조 KU|영조]]·[[정조 KU|정조]] 때에 이르러 탕평책을 시행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한 황극탕평설(皇極蕩平說)로 구체화한 조선 후기 문신 겸 성리학자. 주요 저서인《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를 통해 조선시대 성리학자의 계보를 파악하였다.&lt;br /&gt;
&lt;br /&gt;
==참조항목==&lt;br /&gt;
[[문묘 KU|문묘]]&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6%A1%EC%A4%80%EA%B8%B8_KU</id>
		<title>송준길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6%A1%EC%A4%80%EA%B8%B8_KU"/>
				<updated>2014-06-14T16:22: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 Meta Data ==&lt;br /&gt;
* 타입: 인물&lt;br /&gt;
* 한글항목명: 송준길&lt;br /&gt;
* 한자항목명: 宋浚吉&lt;br /&gt;
* 영문항목명: Song Joon-Guile&lt;br /&gt;
* 생년: 1606&lt;br /&gt;
* 몰년: 1672&lt;br /&gt;
* 편자: [[돈암서원팀 KU|돈암서원팀]] [[201410308성민영 | 201410308 성민영]],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0038 임경희]]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lt;br /&gt;
== 요약 ==&lt;br /&gt;
1624년(인조 3) 진사로서 세마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20여 년간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김장생 KU|김장생]]의 아들 [[김집 KU|김집]]의 천거로 발탁되었다. 부사, 진선,장령을 거쳐 집의에 올랐고 [[송시열 KU|송시열]] 등과 함께 북벌계획에 참여하였다. 김자점이 북진정책을 청나라에 밀고하는 바람에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였다. 그 뒤 벼슬길에 여러차례 천거되었으나 사퇴하였다가 1658년 대사헌을 지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송시열과 함께 서인에 속하여 분열된 서인 세력을 규합하는 데 힘썼다. 학문적으로는 송시열과 같은 경향의 성리학자로서 특히 [[예학 KU|예학(禮學)]]에 밝고 [[율곡이이 KU|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어려서부터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했고, 20세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진사가 된 뒤 학행으로 천거받아 1630년 세마(洗馬)에 제수되었다.&lt;br /&gt;
&lt;br /&gt;
이후 효종이 즉위할 때까지 내시교관(內侍敎官)·동몽교관(童蒙敎官)·시직(侍直)·대군사부·예안현감·형조좌랑·사헌부지평·한성부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단지 1633년에만 잠깐 동몽교관직에 나갔다가 장인 정경세(鄭經世)의 죽음을 이유로 사퇴하였다.&lt;br /&gt;
&lt;br /&gt;
1649년 김장생의 아들로 산당(山堂)의 우두머리인 김집(金集)이 이조판서로 기용되면서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발탁되어 부사직(副司直)·진선(進善)·사헌부장령 등을 거쳐, 사헌부집의에 올랐고 통정대부로 품계가 올랐다.&lt;br /&gt;
&lt;br /&gt;
이 해에 인조 말부터 권력을 장악한 김자점(金自點)·원두표(元斗杓) 등 반정공신 일파를 탄핵하여 몰락시켰으나, 김자점이 효종의 반청정책을 청나라에 밀고하여 그도 벼슬에서 물러났다.&lt;br /&gt;
&lt;br /&gt;
그 뒤 집의·이조참의 겸 찬선 등으로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계속 사퇴하였으며, 1658년(효종 9) 대사헌·이조참판 겸 좨주를 거쳤다.&lt;br /&gt;
&lt;br /&gt;
1659년 병조판서·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우참찬으로 송시열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던 중,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로 이른바 예송(禮訟)이 일어났는데 송시열이 기년제(朞年祭 : 만 1년)를 주장할 때 그를 지지하였다.&lt;br /&gt;
&lt;br /&gt;
이에 남인(南人)의 윤휴(尹鑴)·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 등의 3년설과 논란을 거듭한 끝에 일단 기년제를 관철시켰다.&lt;br /&gt;
&lt;br /&gt;
이 해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이후 우참찬·대사헌·좌참찬 겸 좨주·찬선 등에 여러 차례 임명되었으나, 기년제의 잘못을 규탄하는 남인들의 거듭되는 상소로 계속 사퇴하였다. 단지, 1665년(현종 6) 원자의 보양(輔養)에 대한 건의를 하여 첫 번째 보양관이 되었으나, 이 역시 곧 사퇴하였다.&lt;br /&gt;
&lt;br /&gt;
1673년 1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1674년 효종의 왕비인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자 또 한 차례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이번에는 남인의 기년제설이 서인의 대공설(大功說 : 9개월)을 누르고 남인의 주장을 관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1675년(숙종 1) 허적(許積)·윤휴·허목 등의 공격을 받아 관작을 삭탈당하였다.&lt;br /&gt;
&lt;br /&gt;
이어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관작이 복구되었다. 송시열과 동종(同宗)이면서 학문 경향을 같이한 성리학자로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일찍이 김장생이 예학의 종장(宗匠)이 될 것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lt;br /&gt;
&lt;br /&gt;
1681년 숭현서원(崇賢書院)에 제향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같은 해 김장생과 함께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이 건의된 이래, 여러 차례 상소가 있은 다음 1756년(영조 32) 문묘에 제향되었다.&lt;br /&gt;
&lt;br /&gt;
충현서원(忠賢書院)·봉암서원(鳳巖書院)·돈암서원(遯巖書院)·용강서원(龍岡書院)·창주서원(滄洲書院)·흥암서원(興巖書院)·성천서원(星川書院) 등에도 제향되었다.&lt;br /&gt;
&lt;br /&gt;
저서로 ≪어록해 語錄解≫·≪동춘당집≫이 있으며, 글씨로는 부산의 충렬사비문(忠烈祠碑文), 남양의 윤계순절비문(尹啓殉節碑文)이 있다.&lt;br /&gt;
&lt;br /&gt;
==참조항목==&lt;br /&gt;
[[문묘 KU|문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6%A1%EC%8B%9C%EC%97%B4_KU</id>
		<title>송시열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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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4T16:22: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 Meta Data ==&lt;br /&gt;
* 타입: 인물&lt;br /&gt;
* 한글항목명: 송시열&lt;br /&gt;
* 한자항목명: 宋時烈&lt;br /&gt;
* 영문항목명: Song Shi-Yeol&lt;br /&gt;
* 생년: 1607&lt;br /&gt;
* 몰년: 1689&lt;br /&gt;
* 편자: [[돈암서원팀 KU|돈암서원팀]] [[201410308성민영 | 201410308 성민영]], [[201410326 전명석 | 201410326 전명석]],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0038 임경희]],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lt;br /&gt;
== 개설 ==&lt;br /&gt;
&lt;br /&gt;
1607(선조 40)∼1689(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 봉사(奉事) 구수(龜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응기(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갑조(甲祚)이다. 어머니는 선산 곽씨(善山郭氏)로 봉사 자방(自防)의 딸이다.&lt;br /&gt;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사헌부장령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lt;br /&gt;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뒤에 회덕(懷德)의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소제(蘇堤)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 擊蒙要訣≫·≪기묘록 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이이(李珥)·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lt;br /&gt;
&lt;br /&gt;
1625년(인조 3)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 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의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金集)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 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 때부터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 후일의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약 1년 간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lt;br /&gt;
&lt;br /&gt;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그가 올린 ＜기축봉사 己丑封事＞는 그의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 :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中華를 명나라로 夷賊을 청나라로 구별하여 밝힘.)와 복수설치(復讐雪恥 :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그러나 다음 해 2월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山黨) 일파가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 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1655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10년 가까이 향리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 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현종 15년 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그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1675년(숙종 1) 정월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長鬐)·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lt;br /&gt;
&lt;br /&gt;
1682년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신삼고변(壬申三告變)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해 시장(諡狀)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 때부터 덕원·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 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중 사액서원만 37개소였다.&lt;br /&gt;
&lt;br /&gt;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했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과 1744년(영조 20)의 문묘배향으로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다.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학문적 입장 ==&lt;br /&gt;
&lt;br /&gt;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했으나,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언필칭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았다. 그러므로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 ≪주자대전 朱子大全≫과 ≪주자어류 朱子語類≫의 연구로서, 일생을 여기에 몰두, ≪주자대전차의 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 朱子語類小分≫ 등의 저술을 남겼다. 따라서, 그의 철학사상도 주자가 구축한 체계와 영역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변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과 사회적 변용에 더 역점을 둔 것이었다. 여기에는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이념, 이이의 변통론(變通論), 김장생의 예학(禮學) 등 기호학파의 학문 전통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러한 정통 성리학의 입장에서 조선 중기의 지배적인 철학·정치·사회사상을 정립하였다. 이후 이것은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를 규제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학문 체계가 되었다. 먼저 철학사상을 살펴보면, 그가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정직［直］의 실천 문제였다. 때문에 형이상학적 학설 논쟁에만 몰두하지는 않아 그의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은 특별히 주목받지 못한 면이 있으나, 실상은 당대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이기·심성론에는 주자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이의 설을 계승, 발전시켰다. 즉, 여러 상이한 이론과 개념들을 수용하여 하나의 통일된 체계를 정립하였다.&lt;br /&gt;
&lt;br /&gt;
이(理)·기(氣)의 선후 문제나 혼합성［不相離］·분리성［不相雜］ 등과 같은 문제는 항상 이율배반적인 쟁점을 가진 것이었으나, 그는 이러한 문제들을 입론처(立論處 : 관점)에 따라 범주화(範疇化)하여 각기 타당성을 논증, 형식 논리의 모순을 극복하였다. 예를 들면 그는 이·기의 관계를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즉, 이는 이·기의 상호 관계를 보다 명확히 하고 논리적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기가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一而二, 二而一)”라는 이이의 대명제를 받아들여, 이것을 이의 관점에서 말하면, 이에도 동(動)과 정(靜)이 있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이가 기를 주재하기 때문이며, 기의 관점에서 말하면, 이에는 동과 정이 없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기가 이를 운용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원두(源頭)의 측면에서 말하면, 이·기에 선후가 있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논리적 이선기후(理先氣後)를 말하는 것이며, 유행(流行)의 측면에서 말하면, 이·기에 선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으니, 그것은 변화의 세계에서는 이·기가 공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입론처에 따라 타당성을 인정하고 범주화하여 통합하는 방법은 상이한 특수 이론들을 수용하여 체계화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lt;br /&gt;
&lt;br /&gt;
이 밖에 형(形)과 기(器)의 혼동을 분별하여 형·기·도(道)의 관계에 삼단설(三段說)을 세운 것도 그의 독창적인 면이다. 심성론에 있어서는 마음을 기［心卽氣］로 보는 정통적 입장에 있었으나, 입론처에 따라서는 마음도 태극이 되는 것(心爲太極)이라 하여 마음 본체의 무궁함을 말하기도 하였다. 또 그는 마음이 발하기 전의 상태를 성품［性］으로, 마음이 이미 발한 상태를 정(情)으로 보았다. 마음이 발한다는 것은 곧 기가 발하여 이가 실리는 현상인데 이것이 칠정(七情)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주리파(主理派)에서는 칠정과 사단(四端)을 엄격하게 분별했으나, 그는 사단도 칠정에 속하는 것이며 불선(不善)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그것이 성품에서 발할 때 절도에 맞으면 도심(道心)이 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인심(人心)이 되는 것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수양론(修養論)이 전개되는데 그 핵심은 ‘정의를 모아［集義］ 기상을 기르는 일［養氣］’이었다. ‘정의를 모으는 일’은 곧 ≪대학≫의 성의·정심(誠意正心)으로서 그는 이것을 ‘정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수양론도 곧 ‘정직으로서 기상을 기르는 일(以直養氣)’로 압축되었다.&lt;br /&gt;
&lt;br /&gt;
그의 지론에 의하면, 모든 인간 활동의 저력은 기상이고 그것은 정직으로서만 길러진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직은 수양의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정직의 실천을 일생의 지표로 삼았고, 제자와 후손들에게도 강조하여 마지않았다. 그런데 정직에 의한 기상의 도야는 불굴의 의지를 함양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독선과 흑백 논리에 빠지기 쉬운 경향이 있었고 화합과 타협에 장애가 되는 것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 정치 사상 ==&lt;br /&gt;
&lt;br /&gt;
그의 정치사상은 조선 중기의 사림정치 이념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정치의 원리를 ≪대학≫에서 구했는데, 그것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표현된다. 즉, 남을 다스리는 일은 자신의 수양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그는 통치자의 도덕성 확립을 강조하였다. 특히, 임금은 만화(萬化 : 만물의 조화나 변화, 특히 인간 사회의 모든 변화)의 근본이므로 군덕의 함양이 정치의 제일 과제라고 믿어, 맹자의 “한번 임금을 바르게 하면 나라가 바르게 된다(一正君而國正).”는 주장을 정치 활동의 지표로 삼았다. 따라서,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왕에게 수신·제가·면학을 강조하고 사심과 사은(私恩)을 억제할 것을 권하였다.&lt;br /&gt;
&lt;br /&gt;
실제 정책면에서는 민생의 안정과 국력 회복에 역점을 두었고, 그것을 위한 여러 가지 대책을 건의하였다. 즉, 국가의 용도를 절약하여 재정을 충실하게 하고, 궁중의 연악과 토목 공사를 억제하며, 공안(貢案)을 바로잡고, 군포를 감해 양민(良民)의 부담을 줄이며, 사노비의 확대를 억제하여 양민을 확보하며, 안흥에 조창(漕倉)을 설치하자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서정쇄신책은 이이의 변통론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민생 안정과 국력 양성 문제는 그 자체가 당면한 급선무였기도 하지만, 그는 북벌(北伐) 실현을 위한 선결 과제로 인식하였다.&lt;br /&gt;
&lt;br /&gt;
그의 정치사상에서 또하나 간과될 수 없는 것은 예치(禮治)의 이념이었다. 이는 공자의 통치 철학이기도 했지만, 특히 김장생의 예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예가 다스려지면 정치도 다스려지고, 예가 문란하게 되면 정치도 문란하게 된다. ”고 강조하였다. 예는 유교 정치에 있어서 교화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정치의 명분을 밝히는 것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그는 복제예송(服制禮訟)에 깊이 개입했고, 만년에는 종묘제도의 이정과 문묘배향 문제, 정릉의 복위와 효종의 세실 문제, 만동묘의 설치 등 국가적 전례 문제에 정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김장생을 계승한 예학의 대가로서 중요한 국가 전례문제에 깊이 관여했는데, 이 때문에 예학적 견해 차이로 인한 예송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1659년 5월 효종이 죽자,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 : 趙大妃)의 상복을 3년(만 2년)으로 할 것인가, 기년(朞年 : 만 1년)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것은 인조의 차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을 적장자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차자로 간주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이 때 윤휴(尹鑴)는 ≪의례 儀禮≫ 상복편의 소설(疏說)인 “제일자(第一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삼는다. ”는 근거에 의하여 대비가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왕의 상에는 모든 친속이 참최(斬衰)를 입는다는 설에 의하여 참최를 입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의례≫의 소설에 “서자(庶子)가 대통을 계승하면 3년복을 입지 않는다. ”는 예외 규정［四種說］을 들어 이에 반대하였다. 서자는 첩자(妾子)의 칭호이기도 하고, 적장자 이외의 여러 아들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 국왕의 상에 친속들이 3년복을 입는 것은 신하로서의 복을 입는 것인데, 어머니인 대비는 아들인 왕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윤휴의 참최설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태화(鄭太和) 등 대신들은 ≪의례≫에 근거한 두 설을 다 취하지 않고, ≪대명률≫과 ≪경국대전≫에 장자·차자 구분없이 기년을 입게 한 규정, 즉 국제기년설(國制朞年說)에 따라 1년복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1660년 3월 허목(許穆)이 또 차장자설을 주장하여 3년복으로 개정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리고 윤선도(尹善道)는 기년설이 “효종의 정통성을 위태롭게 하고 적통과 종통을 두 갈래로 만드는 설”이라고 공격하였다. 그러나 송시열과 송준길은 ‘참최는 두 번 입지 않는다(不貳斬)’는 설과 서자가 첩자를 뜻하지 않는다는 설을 논증하고, 차장자설의 여러 가지 모순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제1자가 죽고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간주하는 경우는 제1자가 미성년에 죽었을 때뿐이라고 단정하였다. 이 문제로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으나 기년설은 번복되지 않았고, 윤선도 등 남인들은 유배되거나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가 제기되어 서인들은 송시열의 설에 따라 대공복(大功服 : 9개월복)을 주장하여 시행되었으나 영남 유생 도신징(都愼徵)의 상소로 다시 기년복으로 번복되었다.&lt;br /&gt;
&lt;br /&gt;
그 결과 송시열은 ‘예를 그르친 죄’를 입고 파직 삭출되었다가 변방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송시열의 예론은 ≪의례≫에 근거를 두고 전개되기는 했으나, 대체로 “제왕가의 예도 사서인(士庶人)과 다르지 않다. ”는 성리학적 보편주의 예학의 정신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왕위에 즉위, 종묘를 주관했던 효종의 제왕적 특수성과는 관계없이 차자라는 출생의 차서만이 중시되었다. 이 때문에 그의 본의와는 달리 왕실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두 갈래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아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그는 효종대 북벌론의 중심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문제로 효종과 비밀 대담［獨對］을 가지기도 했고, 왕과 비밀 서찰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북벌 계획은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효종과의 비밀 대담이나 서신 왕래에서 그가 건의한 것은 극히 이념적이고 원론적인 것이었으며, 실제적 대책은 아니었다. 북벌론은 1659년 봄에 본격적으로 논의되었으나, 당시 형편으로는 즉각적인 북벌의 실현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고 민생의 안정과 국력 회복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양민의 부담이 컸던 급료병(給料兵 : 직업군인)을 줄이고 민병(民兵 : 농민군)을 활용하자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효종의 양병정책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는 북벌의 실제 준비보다 그것이 내포한 이념성을 강조하였다. 명나라를 향한 존주대의와 병자호란의 복수설치 문제는 한시도 잊을 수 없는 국가적 과제이며, 그것이 모든 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이는 물론 춘추대의의 관념에서 나온 유교적 명분론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강력한 이념이 국내 정치에서 부패와 부정을 억제하고 기강의 확립과 행정의 효율을 위한 방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북벌 이념은 송시열 자신과 그 일파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대의명분이 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그의 북벌론은 효종의 죽음과 함께 침묵되었다가 숙종 초기에 다시 제창되었는데, 효종대에 그의 북벌론은 그 이념성과 함께 부국안민의 정책을 내포하고 있었으나, 숙종대에 국가의 전례 문제와 결부되어 다시 제창된 존주론(尊周論)에는 오직 당쟁에서 대의명분을 장악하기 위한 이념성만이 강조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사회 사상 ==&lt;br /&gt;
&lt;br /&gt;
사회사상을 살펴보면, 송시열은 매우 보수적인 정통 성리학자라고 할 수 있으나, 당시의 고질적인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또 실제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먼저 사회신분 문제에 있어서 양반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특권은 제한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이에 우선 양민에게만 지워졌던 군역의 부담을 줄이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戶布制)의 실시를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또,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의 실시를 통해 양반의 노비 증식을 억제하고 되도록 양민이 노비화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그는 또 서북 지방(평안도·함경도) 인재의 등용과 서얼(庶孽)의 허통(許通)을 주장하고 양반부녀자들의 개가를 허용할 것을 말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그가 가장 역점을 두었던 사회 정책은 양민의 생활 안정이었다. 이를 위해 공안(貢案)을 개정하고 대동법(大同法)을 확대, 시행하며, 양민들의 군비 부담을 줄이는 호포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이 빈민의 구제를 위한 사창(社倉)을 설치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그도 노비제를 인정하기는 했으나, 노비도 같은 인간임을 인식시켜 부당한 사역이나 가혹한 행위를 억제하도록 역설하였다. 충절이나 선행이 드러난 경우에는 서얼·농민·천민에 이르기까지 전기나 묘문·제문을 지어 표창하였다.&lt;br /&gt;
&lt;br /&gt;
여성 문제에 있어서는 효행·정절·순종 등 전통적 미덕을 강조했으나, 동시에 가계의 관리와 재산 증식 등 주부권과 관련된 경제적 구실도 중시하였다. 사회 풍속 면에서는 중국적·유교적인 것을 숭상하여 토속적·비유교적인 것들을 개혁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혼례 등의 예속과 복식,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세속과 다른 중국 습속들을 행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치를 배격하고 근면,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여 교화의 모범이 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문장과 서체에서도 뛰어났다. 문장은 한유(韓愈)·구양수(歐陽修)의 문체에 정자(程子)·주자의 의리를 기조로 했기 때문에 웅장하면서도 유려하고 논리적이면서도 완곡한 면이 있었다. 특히 강건하고 힘이 넘치는 문장으로 평판이 높았다.&lt;br /&gt;
&lt;br /&gt;
시·부(賦)·책(策)·서(序)·발(跋)·소차(疏箚)·묘문 등 모든 글에 능했으나, 특히 비(碑)·갈(碣)·지문(誌文) 등 묘문에 명성이 있어 청탁을 받아 지은 것이 수백 편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영릉지문(寧陵誌文: 효종릉의 지문)은 명문으로 손꼽힌다.&lt;br /&gt;
&lt;br /&gt;
서체는 처음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익히다가 뒤에 주자를 모방하게 되어 정체(正體)를 잃었으나 매우 개성적인 경지에 이르러 창고(蒼古)하고 힘에 넘치는 것으로 평판이 있었다. 그 글씨를 받아 간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고 현재도 많이 전하고 있다.&lt;br /&gt;
&lt;br /&gt;
그는 학계와 정계에서 가졌던 위치와 그 명망 때문에 교우 관계가 넓었고 추종한 제자들도 매우 많았다. 교우의 중심은 역시 김장생·김집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송준길·이유태(李惟泰)·유계(兪棨)·김경여(金景餘)·윤선거(尹宣擧)·윤문거(尹文擧)·김익희(金益熙) 등으로 이들과 함께 세칭 산당(山黨)으로 불렸다. 한때는 남인 권시(權諰)·윤휴와도 절친한 적이 있었다.&lt;br /&gt;
&lt;br /&gt;
벼슬에 나아간 뒤에는 김상헌(金尙憲)의 손자들인 수증(壽增)·수흥(壽興)·수항(壽恒) 형제들, 민정중(閔鼎重)·민유중(閔維重) 형제, 이후원(李厚源)·이시백(李時伯) 등 서인 권문세가 인사들과 정치를 같이하였다. 소론계인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이경석(李景奭)과도 친했으나 뒤에 당이 갈려 멀어졌다.&lt;br /&gt;
&lt;br /&gt;
그는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교우관계에서 끝까지 화합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경석·윤휴 및 윤선거·윤증 부자와의 알력은 정치적인 문제를 야기하여 당쟁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만년에는 사돈인 권시와도 틈이 생기고, 이유태와 분쟁을 일으키는가 하면 평생의 동반자였던 송준길마저도 뜻을 달리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제자로는 윤증이 가장 촉망되었으나 그 아버지의 묘문 문제로 마침내 노소분당을 야기하였다. 그리고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권상하(權尙夏) 외에 김창협(金昌協)·이단하(李端夏)·이희조(李喜朝)·정호(鄭澔)·이선(李選)·최신(崔愼)·송상민(宋尙敏) 등이 고제(高弟: 뛰어난 제자)로 일컬어진다.&lt;br /&gt;
&lt;br /&gt;
그 밖에 그의 문하에서 수시로 공부한 문인들은 수백 명에 이르렀다. 권상하의 문하에서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로는 한원진(韓元震)·윤봉구(尹鳳九)·이간(李諫)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들이 대표적이며, 이들의 문인들이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lt;br /&gt;
&lt;br /&gt;
이들을 통하여 송시열의 존주대의 이념이 계승되어 조선 말기의 척사위정론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송시열에 의해 재정비된 정통성리학의 체계와 광범한 문인들의 활약 및 그 정치적인 비중 때문에 그의 학문과 사상은 조선 후기의 가장 강력한 지배 이념으로서 작용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저서 ==&lt;br /&gt;
&lt;br /&gt;
그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그 자신이 찬술하거나 편집하여 간행한 저서들과 사후에 수집되어 간행된 문집으로 대별된다.&lt;br /&gt;
&lt;br /&gt;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주자어류소분≫·≪이정서분류 二程書分類≫·≪논맹문의통고 論孟問義通攷≫·≪경례의의 經禮疑義≫·≪심경석의 心經釋義≫·≪찬정소학언해 纂定小學諺解≫·≪주문초선 朱文抄選≫·≪계녀서≫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문집은 1717년(숙종 43) 왕명에 따라 교서관에서 처음으로 편집, 167권을 철활자로 간행하여 ≪우암집 尤菴集≫이라 하였다. 이후 1787년(정조 11) 다시 빠진 글들을 수집, 보완하여 평양감영에서 목판으로 215권 102책을 출간하고 ≪송자대전 宋子大全≫이라 명명하였다.&lt;br /&gt;
&lt;br /&gt;
그 뒤 9대손 병선(秉璿)·병기(秉夔) 등에 의하여 ≪송서습유 宋書拾遺≫ 9권, ≪속습유 續拾遺≫ 1권이 간행되었다. 이들은 1971년 사문학회(斯文學會)에서 합본으로 영인, ≪송자대전≫ 7책으로 간행했고, 1981년부터 한글 발췌 번역본이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4책으로 출간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관련 ==&lt;br /&gt;
&lt;br /&gt;
* [[서인 KU|서인]]&lt;br /&gt;
* [[김장생 KU|김장생]]&lt;br /&gt;
* [[경신환국 KU|경신환국]]&lt;br /&gt;
* [[기사환국 KU|기사환국]]&lt;br /&gt;
* [[문묘 KU|문묘]]&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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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집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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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 Meta Data ==&lt;br /&gt;
* 타입: 인물&lt;br /&gt;
* 한글항목명: 김집&lt;br /&gt;
* 한자항목명: 金集 &lt;br /&gt;
* 영문항목명: Kim Jip&lt;br /&gt;
* 생년: 1574&lt;br /&gt;
* 몰년: 1656&lt;br /&gt;
* 편자: [[돈암서원팀 KU|돈암서원팀]] [[김범수 KU|김범수]], [[201410308성민영 | 201410308 성민영]],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lt;br /&gt;
== 설명 ==&lt;br /&gt;
[[김장생 KU|김장생]]의 아들. [[예학 KU|예학(禮學)]]을 중시하였다. 광해군과 북인이 주도하는 현실외교정책과 대동법시행 등 정치적 이념을 달리하여 아버지 [[김장생 KU|김장생]]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서인 KU|서인]]이 주도하는 [[인조반정 KU|인조반정]]으로 왕위를 찬탈하자 다시 등용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참조항목==&lt;br /&gt;
[[문묘 KU|문묘]]&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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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장생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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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 Meta Data ==&lt;br /&gt;
* 타입: 인물&lt;br /&gt;
* 한글항목명: 김장생&lt;br /&gt;
* 한자항목명: 金長生 &lt;br /&gt;
* 영문항목명: Kim Jang-Saeng&lt;br /&gt;
* 생년: 1548&lt;br /&gt;
* 몰년: 1631&lt;br /&gt;
* 편자: [[돈암서원팀 KU|돈암서원팀]] [[김범수 KU|김범수]], [[201410308성민영 | 201410308 성민영]], [[201410311신이슬 | 201410311 신이슬]],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lt;br /&gt;
== 설명 ==&lt;br /&gt;
* [[이이 KU|이이]], [[김계휘 KU|김계휘]], [[김집 KU|김집]]&lt;br /&gt;
* [[기호학파 KU|기호학파]], [[예학 KU|예학(禮學)]]&lt;br /&gt;
* [[가례집람 KU|가례집람]], [[상례비요 KU|상례비요]], [[사계전서 KU|사계전서]]&lt;br /&gt;
* [[서인 KU|서인]]&lt;br /&gt;
&lt;br /&gt;
[[File:jang_saeng.jpg|300px]]&lt;br /&gt;
&lt;br /&gt;
김장생(金長生, 1548년 7월 8일 한성 ~ 1631년 8월 3일 충청도 논산)은 [[조선 KU|조선]]의 유학자, 정치인, 문신이다. [[동방 18현 KU|동방 18현]] 중의 한 사람이며, 자(字)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본관은 광산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 [[김계휘 KU|김계휘(金繼輝)]]이다. &lt;br /&gt;
&lt;br /&gt;
처음에 [[송익필 KU|구봉 송익필]]에게 [[예학 KU|예학]]을 배우고 후에 [[이이 KU|율곡 이이]]에게 [[성리학 KU|성리학]]을 배워 예학파 유학의 거두가 되었으며, 그 뒤 [[성혼 KU|우계 성혼]]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다. &lt;br /&gt;
&lt;br /&gt;
1578년(선조 11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관직에 올라 창릉참봉, 돈령부참봉 등을 지낸 뒤 순릉참봉(順陵參奉),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를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송익필의 문하와 성혼의 문하를 출입하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이후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사포서(司圃署)·사옹원(司饔院) 봉사가 내렸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정여립의 옥사 등으로 은퇴하였고 [[임진왜란 KU|임진왜란]] 때는 호조정랑으로 군량미 조달에 노력하였다. 그 뒤 전란이 종결되자 단양군수,남양부사(南陽府使), 양근군수(楊根郡守), 안성군수, 익산군수, 철원부사 등의 지방관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다. [[인조 KU|인조]] 때는 호조참판과 형조참판을 지낸 뒤 가의대부 행용양위부호군에 이르렀으며,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lt;br /&gt;
&lt;br /&gt;
[[인조반정 KU|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 산림파(산당) 영수로 공신 세력에 대항하여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송익필과 [[이이 KU|이이]], [[성혼 KU|성혼]] 등의 제자이자 계승자로 [[기호학파 KU|기호학파]]를 형성, 확장하는데 기여하였고, 예학에 정통하였다. [[김집 KU|김집]], [[송시열 KU|송시열]] 등을 길러냈다. 사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 &lt;br /&gt;
&lt;br /&gt;
1548(명종 3)∼1631(인조 9).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lt;br /&gt;
&lt;br /&gt;
==참조항목==&lt;br /&gt;
[[문묘 KU|문묘]]&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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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혼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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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타입 : 인물&lt;br /&gt;
*이름 : 성혼(成渾)&lt;br /&gt;
*생년 : 1535년 &lt;br /&gt;
*몰년 : 1598년&lt;br /&gt;
*역할 : 문묘 18현&lt;br /&gt;
*편자 :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동서 분당기 때 [[서인 KU|서인]]과 정치노선을 함께 했고 [[이이 KU|이이]]와 함께 [[서인 KU|서인]]의 학문적 원류를 형성했다. 그의 학문은 [[이황 KU|이황]]과 [[이이 KU|이이]]의 학문을 절충했다는 평가가 있으며 [[소론 KU|소론학파]]의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lt;br /&gt;
&lt;br /&gt;
==참조항목==&lt;br /&gt;
[[문묘 KU|문묘]]&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A1%B0%EA%B4%91%EC%A1%B0_KU</id>
		<title>조광조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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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File:Cho.jpg|300px|thumb|&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조광조'''&amp;lt;/div&amp;gt;]]&lt;br /&gt;
== Meta Data ==&lt;br /&gt;
* 타입: 인물&lt;br /&gt;
* 한글이름: 조광조&lt;br /&gt;
* 한자이름: 趙光祖&lt;br /&gt;
* 생년: 1482&lt;br /&gt;
* 몰년: 1520&lt;br /&gt;
* 역할: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사상가이자 교육자, 성리학자, 정치가&lt;br /&gt;
*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410300김은서]],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0038 임경희]] [[심곡서원팀 KU|심곡서원팀]] [[최영희 KU|최영희]]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개설 ==&lt;br /&gt;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사상가이자 교육자, 성리학자, 정치가이다.&lt;br /&gt;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菴), 시호는 문정(文正). 한성 출생. 개국공신 온(溫)의 5대 손이며, 육(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충손(衷孫)이고, 아버지는 감찰 원강(元綱)이다.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의(誼)의 딸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lt;br /&gt;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 KU|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학문은 ≪소학≫·≪근사록 近思錄≫ 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 연구에 응용했으며, 이 때부터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이 때는 사화 직후라 사람들은 그가 공부에 독실함을 보고 ‘광인(狂人)’이라거나 혹은 ‘화태(禍胎)’라 하였다. 친구들과도 자주 교류가 끊겼으나, 그는 전혀 개의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한다. 한편, 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 절제가 있었다.&lt;br /&gt;
&lt;br /&gt;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당시 시대적인 추세는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전반적인 흐름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安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년(중종 10)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다.&lt;br /&gt;
&lt;br /&gt;
그 해 가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감찰·예조좌랑을 역임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이와 함께 정언이 되어 언관으로서 그의 의도를 펴기 시작하였다.&lt;br /&gt;
&lt;br /&gt;
이 해 장경왕후(章敬王后, 중종의 제1계비)가 죽자 조정에서는 계비 책봉문제가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이 때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등은 중종의 정비(正妃, 폐위된 愼氏)를 복위시킬 것과 신씨의 폐위를 주장했던 박원종(朴元宗)을 처벌할 것을 상소했는데, 이 때문에 대사간 이행(李荇)의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에 대해 조광조는 대사간으로서 상소자를 벌함은 언로를 막는 결과가 되므로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일이라 주장, 오히려 이행 등을 파직하게 하여 그에 대한 왕의 신임을 입증받았다. 이것을 계기로 원로파(元老派), 즉 반정공신과 신진사류(新進士類)의 대립으로 발전, 이후 기묘사화의 발생 원인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그 뒤 수찬을 역임하고 곧이어 정랑이 되었다. 1517년에는 교리로 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을 겸임했으며,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해 ≪여씨향약 呂氏鄕約≫을 8도에 실시하도록 하였다. 주자학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 말이었으나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고, 조선 초기에 와서도 사장(詞章)의 학만이 높이 숭상되었기 때문에 과거에 있어서도 이것에만 치중했고 도학(道學)은 일반적으로 경시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조광조의 도학정치에 대한 주창은 대단한 것이었고, 이러한 주창을 계기로 당시의 학풍은 변화되어갔으며, 뒤에 이황(李滉)·이이(李珥) 같은 학자가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그의 도학정치는 조선시대의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어놓는 데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즉, 조선시대에 일반서민들까지도 주자의 ≪가례 家禮≫를 지키게 되어 상례(喪禮)를 다하고 젊은 과부의 재가도 허락되지 않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518년 부제학이 되어서는 유학의 이상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사문(斯文)의 흥기를 자신의 임무로 자부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주(人主)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미신 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히 주청,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이를 혁파하는 데 성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이어 그 해 11월에는 대사헌에 승진되어 부빈객을 겸하게 되었다. 그는 한편으로 천거시취제(薦擧試取制)인 현량과(賢良科)를 처음 실시하게 하여 김식(金湜)·안처겸(安處謙)·박훈(朴薰) 등 28인이 뽑혔으며, 이어 김정(金淨)·박상(朴尙)·이자(李耔)·김구(金絿)·기준(奇遵)·한충(韓忠) 등 소장학자들을 뽑아 요직에 안배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이와 같이 현량과를 통해 신진사류들을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시키는 실마리로 삼았다. 이들 신진사류들과 함께 훈구세력의 타도와 구제(舊制)의 개혁 및 그에 따른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나섰다. 그리하여 이들은 1519년(중종 14)에 이르러 훈구세력인 반정공신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lt;br /&gt;
&lt;br /&gt;
즉, 그들은 우선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너무 많음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리고 성희안(成希顔) 같은 인물은 반정을 하지 않았는데도 뽑혔고, 유자광(柳子光)은 그의 척족들의 권귀(權貴)를 위해 반정했는데, 이러한 유의 반정정신은 소인들이나 꾀하는 것이라며 신랄하게 비난하였다.&lt;br /&gt;
&lt;br /&gt;
또한, 이들은 권좌에 올라 모든 국정을 다스리는 데 이(利)를 먼저 하고 있으므로 이를 개정하지 않으면 국가를 유지하기가 곤란함을 극력 주창하였다. 이의 실천 대안으로 반정공신 2·3등 중 가장 심한 것은 개정해야 하고, 4등 50여 인은 모두 공이 없이 녹을 함부로 먹고 있으므로 삭제함이 좋을 것이라는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히 청하고 나섰다.&lt;br /&gt;
&lt;br /&gt;
이러한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반정 초기에 대사헌 이계맹(李繼孟) 등은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많아 외람되므로 그 진위를 밝힐 것을 주장한 일이 있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신진사류들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반정공신들은 기성 귀족이 되어 있었고, 현실적으로 원로가 된 훈구세력을 소인배로 몰아 배척하려는 급격한 개혁주장은 중종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마침내 2·3등 공신의 일부, 4등 공신 전원, 즉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되는 76인의 훈작이 삭탈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마침내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야기시켰다.&lt;br /&gt;
&lt;br /&gt;
훈구파 중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은 경빈 박씨(敬嬪朴氏) 등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사류를 무고하도록 하였다. 또한, 대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를 따서 왕에게 바쳐 의심을 조장시키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한편, 홍경주와 공조판서 김전(金詮), 예조판서 남곤, 우찬성 이장곤(李長坤), 호조판서 고형산(高荊山), 심정 등은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비밀리에 왕을 만나고는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 조정을 문란하게 하고 있다고 탄핵하였다. 이에 평소부터 신진사류를 비롯한 조광조의 도학정치와 과격한 언행에 염증을 느껴오던 왕은 훈구대신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이를 시행하였다.&lt;br /&gt;
&lt;br /&gt;
그 결과 조광조는 김정·김구·김식·윤자임(尹自任)·박세희(朴世熹)·박훈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처음 김정·김식·김구와 함께 그도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간곡한 비호로 능주에 유배되었다.&lt;br /&gt;
&lt;br /&gt;
그 뒤 정적인 훈구파의 김전·남곤·이유청(李惟淸)이 각각 영의정·좌의정·우의정에 임명되자 이들에 의하여 그 해 12월 바로 사사되었다. 이 때가 기묘년이었으므로 이 사건을 ‘기묘사화’라고 한다.&lt;br /&gt;
&lt;br /&gt;
결국 신진사류들이 기성세력인 훈구파를 축출,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루려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들의 실패 원인은 그들이 대부분 젊고 또 정치적 경륜도 짧은 데다가 개혁을 급진적이고 너무 과격하게 이루려다가 노련한 훈구세력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이이(李珥)는 ≪석담일기 石潭日記≫에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의 실패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진 뒤에나 이론을 실천했는데, 이 이론을 실천하는 요점은 왕의 그릇된 정책을 시정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도학을 실천하고자 왕에게 왕도의 철학을 이행하도록 간청하기는 했지만, 그를 비방하는 입이 너무 많아, 비방의 입이 한 번 열리자 결국 몸이 죽고 나라를 어지럽게 했으니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되었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 상훈과 추모 == &lt;br /&gt;
그 뒤 선조 초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 뒤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해 사당이 세워지고, 서원도 설립되었다. 1570년 능주에 죽수서원(竹樹書院), 1576년 희천에 양현사(兩賢祠)가 세워져 봉안되었으며, 1605년(선조 38)에는 그의 묘소 아래에 있는 심곡서원(深谷書院)에 봉안되는 등 전국에 많은 향사가 세워졌다. &lt;br /&gt;
&lt;br /&gt;
또한, 이이는 김굉필·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 등과 함께 그를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불렀다. 저서로 ≪정암집≫이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소(疏)·책(策)·계(啓) 등의 상소문과 몇 가지의 제문이고, 그 밖에 몇 편의 시도 실려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lt;br /&gt;
&lt;br /&gt;
==참조항목==&lt;br /&gt;
[[문묘 KU|문묘]]&lt;br /&gt;
&lt;br /&gt;
== 출처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8353&amp;amp;cid=1592&amp;amp;categoryId=1592 한국민족대백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A0%95%EB%AA%BD%EC%A3%BC_KU</id>
		<title>정몽주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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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4T16:13: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File:01.jpg]]&lt;br /&gt;
== Meta Data ==&lt;br /&gt;
*타입: 인물 &lt;br /&gt;
*한글명: [[정몽주 KU|정몽주]]&lt;br /&gt;
*한자명: 鄭夢周 &lt;br /&gt;
*생년: 1337&lt;br /&gt;
*몰년: 1392&lt;br /&gt;
*역할: 고려 성리학의 창시자 &lt;br /&gt;
*편자: [[심곡서원팀 KU|심곡서원팀]] [[최영희 KU|최영희]]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 소개 ==&lt;br /&gt;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1337년 경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고려 인종∙의종 때 추밀원지주사를 지낸 정습명의 후손이지만, 이후 조상은 한직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머니 이씨가 임신 중의 어느 날 꿈에 난초 화분을 안았다가 갑자기 떨어뜨리고는 놀라서 잠이 깬 뒤 그를 낳았다 하여 어렸을 적 이름은 몽란(夢蘭)이었다. 그러다 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니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검은 용이 동산 가운데 있는 배나무에 올라간 것을 보고 깨어 나가보니 배나무에 몽란이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몽룡(夢龍)이라고 고쳤다가 성년이 된 후 몽주로 다시 고쳤다&lt;br /&gt;
&lt;br /&gt;
과거의 삼장(초장∙중장∙종장)에서 연이어 장원을 차지하여 이름을 떨치고, 당대 최고의 학자 이색의 문하에서 정도전 등과 수학했다. 1362년 예문관의 검열로 관직에 첫발을 내디뎠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367년 성균관 박사, 1375년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성균관 박사로 유교 경전을 강의하던 당시 고려에 들어온 경서는 [주자집주]밖에 없었는데, 정몽주의 강의를 듣던 사람들 가운데 그의 유창한 해석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들어온 경전이 정몽주의 강의 내용과 일치하자, 사람들이 그의 높은 학식에 탄복했다는 일화가 [고려사]에 전한다.&lt;br /&gt;
&lt;br /&gt;
스승 이색은 정몽주에 대해 “학문에서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가장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칭찬하면서 그를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로 평가했으며, 다섯 살 아래의 후배였던 정도전도 “여러 생도가 각기 학업을 연수하여 사람마다 이견이 있었는데, 선생은 그 물음에 따라 명확히 설명하되 털끝만큼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라며 존경의 마음을 표했다. 정몽주는 이후 정도전에게 많은 영향을 주며 ‘마음을 같이한 벗 (同心友)’의 맹세를 나누었으나, 역사의 선택은 그들을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는 적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lt;br /&gt;
&lt;br /&gt;
&lt;br /&gt;
== 명나라, 왜국과의 외교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한 유능한 외교가 == &lt;br /&gt;
정몽주는 고려에 성리학이 처음 들어올 당시, 이를 탁월하게 이해하고 소화한 뛰어난 학자이기도 하지만, 명나라나 왜국과의 외교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한 외교가이기도 하다. 친명 노선을 걷던 공민왕이 갑자기 시해된 뒤 친원파들이 명나라 사신을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나 명나라와의 외교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정몽주는 정확한 해명을 통해 두 나라의 신뢰를 회복하자는 주장을 펴 전란의 위기를 해소했다.&lt;br /&gt;
&lt;br /&gt;
또한 두 나라 사이에 자꾸 분란이 생기자 명 태조가 성이 나, 장차 고려에 출병하려 할 뿐 아니라 매년 보내는 토산물을 증액시키고, 지난 5년간 토산물을 약속대로 보내지 않았다며 사신의 볼기를 치고 유배 보내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 상태에서 명 태조의 생일이 닥치자 조정에서는 모두 핑계를 대며 사신으로 가기를 꺼렸다. 이때 친원파들이 정몽주를 추천했다. 정몽주를 제거하려는 음모였다. 더구나 명의 수도인 남경까지는 대략 90일이 걸리는데, 생일을 불과 60일 남겨둔 상태였다. 정몽주는 유배 중이던 정도전을 급히 불러 서장관으로 삼고 밤낮을 달려 생일날 무사히 축하문을 명 태조에게 전했다. 이때 밀린 조공도 면제받고 유배되었던 사신들도 귀국시키는 공을 세웠다니 외교적인 능력이 탁월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lt;br /&gt;
&lt;br /&gt;
1377년에는 왜에 사신으로 가기도 했는데, 이 역시 앞서 사신으로 갔던 나흥유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오자 친원파들이 그를 추천했던 것이다. 정몽주가 뛰어난 인품과 학식으로 교화시키자 그들은 정몽주를 매우 후하게 접대하고, 왜인 승려들은 그의 시를 얻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한다. 이때에도 귀국 시 수백 병의 포로들을 데리고 들어왔다.&lt;br /&gt;
&lt;br /&gt;
== 친명파로 이성계와 뜻을 함께했으나, 마지막 순간 서로 다른 선택을 하고 ==&lt;br /&gt;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에 전쟁을 주장하는 최영파와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하자는 이성계파가 나뉘었을 때 정몽주는 이성계파와 의견을 함께했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가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할 때에도 뜻을 같이했다.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승진하고 공신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분명해지자 더는 같은 길을 갈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은 같았고, 왕을 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급진적인 성향도 다를 바 없었지만, 고려왕조는 지켜야 한다는 게 정몽주의 신념이었다. 역성혁명을 꿈꾸는 이성계와 정도전은 이제 그의 정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1392년 3월,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몽주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해야만 고려의 사직을 보존할 수 있다고 판단한 정몽주는 우선 언관들을 시켜 정도전∙조준∙남은 등 이성계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당시 유배 중이던 정도전은 감금시키고, 조준∙남은∙윤소종 등은 귀양을 보냈다.&lt;br /&gt;
&lt;br /&gt;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이성계가 머무는 해주로 급히 달려가 아버지의 귀경을 재촉했다. 이성계는 부상당한 몸을 가마에 싣고 그날로 돌아왔다. 정몽주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병문안을 핑계로 직접 이성계를 방문했다. 이성계는 평소와 다름 없이 정몽주를 맞았지만, 이방원의 생각은 달랐다. 그날 정몽주와 이방원의 만남에 대해서는 [하여가]∙[단심가]라는 시와 함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lt;br /&gt;
&lt;br /&gt;
이방원은 술상을 차려놓고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았다.&lt;br /&gt;
&lt;br /&gt;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lt;br /&gt;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lt;br /&gt;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lt;br /&gt;
&lt;br /&gt;
자신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정몽주는 단호한 자신의 마음을 답가로 들려주었다.&lt;br /&gt;
&lt;br /&gt;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lt;br /&gt;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lt;br /&gt;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lt;br /&gt;
&lt;br /&gt;
== 이방원의 손에 죽었으나, 이방원에 의해 전설이 되다 ==&lt;br /&gt;
정몽주의 마음을 분명하게 알게 된 이상 그를 살려둘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조영규 등을 보내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습격하여 죽였다. 이때 정몽주의 나이 쉰여섯이었다.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는 도당을 만들어 나라를 어지럽혔다.”라며 다시 효수하고, 정몽주와 뜻을 같이했던 문관들은 유배 보내, 정적들을 완전히 제거했다. 이제 더는 그들을 견제할 만한 세력은 없었다. 3개월 뒤 이성계는 공양왕을 내치고 왕위에 올라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lt;br /&gt;
&lt;br /&gt;
정몽주가 죽은 뒤 13년이 지난 1405년, 이방원은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새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조선에도 정몽주 같은 충신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정몽주의 충절은 선죽교에 뿌린 피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전설로 남았고, 그의 학문과 이념은 조선의 사림파에게 이어졌다.&lt;br /&gt;
&lt;br /&gt;
==참조항목==&lt;br /&gt;
[[문묘 KU|문묘]]&lt;br /&gt;
&lt;br /&gt;
== 출처 ==&lt;br /&gt;
네이버캐스트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amp;amp;contents_id=2744&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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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안향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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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 Meta Data ==&lt;br /&gt;
[[File:123124.jpg|200px|thumb|Right|]]&lt;br /&gt;
* 이름 : 안향&lt;br /&gt;
* 생년: 1243년&lt;br /&gt;
* 몰년: 1306년&lt;br /&gt;
* 편자: [[소수서원팀 KU|소수서원팀]] [[201010312신지수]]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 설명 ==&lt;br /&gt;
* 안향(安珦, 1243년 ~ 1306년)은 고려의 명신(名臣)·학자이다. 본관은 순흥, 초명은 유(裕),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조선 [[문종 KU|문종]] 이후에는 [[문종 KU|문종]]의 휘인 향(珦)을 피해(피휘) 향(向)으로 적기도 했으며 초명을 따라 [[안유 KU|안유]](安裕)로 불리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참조항목==&lt;br /&gt;
[[문묘 KU|문묘]]&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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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굉필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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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File:Kkp.JPG|300px|thumb|&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김굉필'''&amp;lt;/div&amp;gt;]]&lt;br /&gt;
&lt;br /&gt;
== Meta Data ==&lt;br /&gt;
* 타입: 인물&lt;br /&gt;
* 한글이름: 김굉필&lt;br /&gt;
* 한자이름: 金宏弼&lt;br /&gt;
* 생년: 1454&lt;br /&gt;
* 몰년: 1504&lt;br /&gt;
* 역할:&lt;br /&gt;
* 편자: [[소수서원팀 KU|소수서원팀]] [[201010312신지수]]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0038 임경희]]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김굉필(金宏弼, 1454년 ~ 1504년)은 조선 전기의 문인, 교육자, 성리학자로 호(號)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 또는 한훤(寒暄)이며 자는 대유(大猷),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점필재 [[김종직 KU|김종직]]의 제자로 [[김일손 KU|김일손]], [[김전 KU|김전]], [[남곤 KU|남곤]], [[정여창 KU|정여창]] 등과 동문이었다. 《[[소학 KU|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자칭하였고, 《[[소학 KU|소학]]》의 가르침대로 생활하였다.&lt;br /&gt;
&lt;br /&gt;
1480년(성종 11) 초시에 합격하고, 1494년(성종 25년) 훈구파 출신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출사하여 주부(主簿),사헌부감찰, 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지방관으로 부임한 조원강의 아들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lt;br /&gt;
&lt;br /&gt;
그 자신도 조광조·이장곤·주계정 이심원·김안국·이연경 등의 제자들을 배출했으며 이들은 서인학파를 이루게 되었다. 《소학》을 행동의 근간으로 삼아 《소학》을 알지 못하고는 사서육경을 알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본관은 서흥(瑞興)이다. 한성부 출신.&lt;br /&gt;
&lt;br /&gt;
&lt;br /&gt;
== 평가 ==&lt;br /&gt;
평소 육경(六經) 연구에 몰두하여 성리학에 통달했으며, 문하에서 조광조·이장곤(李長坤)·김안국(金安國)·이연경 등이 배출되었다. 조광조의 학맥은 조광조-성수침-성혼으로 이어지는 한편 율곡 이이는 조광조의 직계 제자는 아니나 그를 사숙함으로써, 조광조의 후계자들은 서인 학파를 이루게 된다. 김안국의 제자는 김인후이고 김인후의 문인이 정철로, 정철 역시 성혼, 이이와 함께 역시 서인 학파를 형성하였다.&lt;br /&gt;
&lt;br /&gt;
==참조항목==&lt;br /&gt;
[[문묘 KU|문묘]]&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ko.wikipedia.org/wiki/%EA%B9%80%EA%B5%89%ED%95%84 위키백과 김굉필]&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B4%EC%96%B8%EC%A0%81_KU</id>
		<title>이언적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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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4T16:09: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Created page with &amp;quot;==Meta Data== *타입 : 인물 *이름 : 이언적(李彦迪) *생년 : 1491년 *몰년 : 1553년 *역할 : 문묘 18현 *편자 : 필암서원 201313086...&amp;quot;&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타입 : 인물&lt;br /&gt;
*이름 : 이언적(李彦迪)&lt;br /&gt;
*생년 : 1491년&lt;br /&gt;
*몰년 : 1553년&lt;br /&gt;
*역할 : 문묘 18현&lt;br /&gt;
*편자 :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조선 중기 중종 때의 문신. 그의 기보다 이를 중시하는 주리적 성리설은 [[이황 KU|이황]]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되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한 특징을 이루었다.〈일강십목소〉는 그 정치사상을 대표한다. ‘이언적수필고본일괄’은 보물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참조항목==&lt;br /&gt;
[[문묘 KU|문묘]]&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B5%9C%EC%B9%98%EC%9B%90_KU</id>
		<title>최치원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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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타입 : 인물&lt;br /&gt;
*이름 : 최치원(崔致遠)&lt;br /&gt;
*생년 : 857 &lt;br /&gt;
*몰년 : ?&lt;br /&gt;
*역할 : 문묘 18현&lt;br /&gt;
*편자 :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File : 09b2fabd-4b97-4a.jpg|thumb|무성서원&lt;br /&gt;
사적 제166호&lt;br /&gt;
고려시대 지방 유림의 공의로 최치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생사당을 창건하여 태산사(泰山祠)라 하였다.|300px]]&lt;br /&gt;
&lt;br /&gt;
9세기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이다. 중국 당 나라에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신라로 돌아온 뒤에는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려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유교(儒敎)ㆍ불교(佛敎)ㆍ도교(道敎)에 모두 이해가 깊었고, 유ㆍ불ㆍ선 통합 사상을 제시하였다. 수많은 시문(詩文)을 남겨 한문학의 발달에도 기여하였다.&lt;br /&gt;
&lt;br /&gt;
최치원은 개혁이 좌절된 뒤에 신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은둔 생활로 삶을 마쳤다. 하지만 유교(儒敎) 정치이념을 기반으로 골품제도라는 신분제의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려고 했던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최언위(崔彦撝), 최승로(崔承老) 등은 고려에서 유교 정치이념이 확립되는 데 기여했으며, 새로운 국가체제와 사회질서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때문에 최치원은 조선시대에 와서도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永平)의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에 제향(祭享)되는 등 유학자들에게 계속해서 숭앙되었다.&lt;br /&gt;
&lt;br /&gt;
==참조항목==&lt;br /&gt;
[[문묘 KU|문묘]]&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A0%95%EC%97%AC%EC%B0%BD_KU</id>
		<title>정여창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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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4T16:06:0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타입 : 인물&lt;br /&gt;
*이름 : 정여창(鄭汝昌)&lt;br /&gt;
*생년 : 1450년(세종 32)&lt;br /&gt;
*몰년 : 1504년(연산군 10)&lt;br /&gt;
*역할 : 문묘 18현&lt;br /&gt;
*편자 :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File : 2ca3d69c-70ae-42.jpg|thumb&lt;br /&gt;
|함양 [[남계서원 KU|남계서원]]&lt;br /&gt;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1호&lt;br /&gt;
1552년에 정여창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으며 경내의 건물로는 풍영루, 전사청, 명성당, 양정재, 보인재, 애련헌, 영매헌 등이 있다.&lt;br /&gt;
|300px]]&lt;br /&gt;
&lt;br /&gt;
1450(세종 32)∼1504(연산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lt;br /&gt;
----&lt;br /&gt;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쓰다가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논어≫에 밝았고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여 체용(體用)의 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480년(성종 11)에 성종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행실을 닦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하였다.&lt;br /&gt;
&lt;br /&gt;
지관사 서거정(徐居正)이 그를 경연에서 진강하게 하려 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148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8월에는 성균관 상사(上舍)의 동렬(同列)에서 그를 이학(理學)으로 추천하였다. 1486년 어머니가 이질에 걸리자 극진히 간호했으며, 어머니가 죽자 최복(衰服)을 벗지 않고 3년 동안 시묘하였다.&lt;br /&gt;
&lt;br /&gt;
그 뒤 지리산을 찾아가 진양의 악양동(岳陽洞) 부근 섬진(蟾津)나루에 집을 짓고 대와 매화를 심으며 여기에서 평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1490년 참의 윤긍(尹兢)에 의해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자식의 직분을 들어 사양하였다.&lt;br /&gt;
&lt;br /&gt;
성종은 그의 사직상소문의 끝에 “너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행실을 감출 수 없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것이 너의 선행이다.”라고 쓰고 사임을 허가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그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가 되었는데 이 때 정도(正道)로써 동궁(연산군)을 보도했으나 동궁이 좋아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1495년(연산군 1) 안음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어 백성들의 질고(疾痼)가 부렴(賦斂)에 있음을 알고 편의수십조(便宜數十條)를 지어 시행한 지 1년 만에 정치가 맑아지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lt;br /&gt;
&lt;br /&gt;
감사는 해결하기 어려운 옥사가 있으면 그를 만나서 물어본 뒤에 시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판결에 의문나는 것이 있으면 원근에서 그를 찾아와 판결을 받았다.&lt;br /&gt;
&lt;br /&gt;
민사(民事)를 돌보는 여가로 고을의 총명한 자제를 뽑아 친히 교육하였고, 춘추로 양로례(養老禮)를 행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종성(鍾城)으로 유배,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중종대에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승무(陞廡)되었다.&lt;br /&gt;
&lt;br /&gt;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 KU|남계서원(藍溪書院)]],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일두유집 一蠹遺集≫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lt;br /&gt;
&lt;br /&gt;
==참조항목==&lt;br /&gt;
[[문묘 KU|문묘]]&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A4%EC%B4%9D_KU</id>
		<title>설총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A4%EC%B4%9D_KU"/>
				<updated>2014-06-14T15:50: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타입 : 인물&lt;br /&gt;
*이름 : 설총(薛聰)&lt;br /&gt;
*생년 : 655년 &lt;br /&gt;
*몰년 : 미상&lt;br /&gt;
*역할 : 문묘 18현&lt;br /&gt;
*편자 :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655(태종무열왕 2)∼? 신라 중대의 대학자&lt;br /&gt;
----&lt;br /&gt;
자는 총지(聰智). 증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赤大公), 할아버지는 나마(奈麻) 담날(談捺)이고, 아버지는 원효(元曉),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다. 육두품 출신인 듯하며,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증보문헌비고≫에는 경주설씨(慶州薛氏)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출생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원효불기 元曉不羈＞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태종무열왕 때, 즉 654∼660년 사이에 출생한 듯하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했으며, 우리말로 구경(九經)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10현(新羅十賢)의 한 사람이며, 또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더불어 신라3문장(新羅三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lt;br /&gt;
&lt;br /&gt;
≪삼국사기≫에 “우리말(方言)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훈도하였다(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라 했고, ≪삼국유사≫에는 “우리말(方音)로 화이(華夷 : 중국 민족과 그 주변의 오랑캐)의 방속(方俗)과 물건의 이름을 이해하고 육경(六經)과 문학을 훈해(訓解)했으니, 지금도 우리 나라［海東］의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이가 전수(傳受)해 끊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lt;br /&gt;
&lt;br /&gt;
이 두 기록을 근거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설총이두창제설(薛聰吏讀創製說)이 비롯되었으나, 이는 틀린 것이다. 여러 기록에서 ‘吏讀·吏道·吏吐·吏套·吏頭·吏札’ 따위로 불리는 이 방법은 향가 표기법인 향찰(鄕札)을 가리키는 것인데, 우리말로 육경을 읽는 데 능통했다고 해서 이것을 이두 또는 향찰의 고안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lt;br /&gt;
&lt;br /&gt;
향가 표기식 방법, 즉 향찰은 설총 이전부터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568년(진흥왕 29)에 북한산 비봉(碑峯)에 세운 진흥왕순수비의 비문에도 이미 나타나 있고, 또 설총 이전에 향찰로 표기된 향가 작품으로는 진평왕 때의 ＜서동요 薯童謠＞·＜혜성가 彗星歌＞와 선덕여왕 때의 ＜풍요 風謠＞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설총이 향찰(이두)을 창안한 것이 아니라 향찰을 집대성,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설총은 향찰의 권위자로 봄이 타당하다.&lt;br /&gt;
&lt;br /&gt;
설총은 육경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함으로써 한문을 국어화하고, 유학 또는 한학의 연구를 쉽게 그리고 빨리 발전시키는 데 공이 컸다. 또 관직에 나아가 문필에 관계되는 직, 즉 한림과 같은 직에 있었을 것이며, 신문왕 때 국학(國學)을 설립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719년(성덕왕 18)에는 나마의 관등으로서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를 저술하였다.&lt;br /&gt;
&lt;br /&gt;
이 밖에도 많은 작품이 있었을 것이나 ≪삼국사기≫를 엮을 때 이미 “글을 잘 지었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지금도 남쪽 지방에 더러 설총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으나 글자가 떨어져 나가 읽을 수가 없으니 끝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다.”라고 하면서 완전하게 남은 게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lt;br /&gt;
&lt;br /&gt;
한편, 오늘날 설총의 문적(文蹟)으로는 우화적 단편 산문인 ＜화왕계 花王戒＞가 당시 신문왕을 풍간(諷諫)했다는 일화로서 ≪삼국사기≫ 설총열전에 실려 전한다. 이 ＜화왕계＞는 ＜풍왕서 諷王書＞라는 이름으로 ≪동문선≫ 권53에도 수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죽은 뒤에도 계속 숭앙되어 고려시대인 1022년(현종 13) 1월에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문묘 KU|문묘(文廟)]] 동무(東廡)에 신라2현이라 해 [[최치원 KU|최치원(崔致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lt;br /&gt;
&lt;br /&gt;
==참조항목==&lt;br /&gt;
[[문묘 KU|문묘]]&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3%B5%EC%9E%90_KU</id>
		<title>공자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3%B5%EC%9E%90_KU"/>
				<updated>2014-06-14T15:46: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 Meta Data ==&lt;br /&gt;
[[File:12341.jpg|200px|thumb|Right|]]&lt;br /&gt;
* 이름 : 공자&lt;br /&gt;
* 생년: 기원전 551년&lt;br /&gt;
* 몰년: 기원전 479년&lt;br /&gt;
* 편자: [[소수서원팀 KU|소수서원팀]] [[201010312신지수]]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 설명 ==&lt;br /&gt;
* 공자(孔子) 또는 공부자(孔夫子: 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는 [[유교 KU|유교]]의 시조(始祖)인 고대 중국 [[춘추시대 KU|춘추시대]]의 정치가 · 사상가 · 교육자이고, [[주나라 KU|주나라]]의 문신이자 작가이면서 시인이기도 하다. 흔히 [[유교 KU|유교]]의 시조로 알려져 있으나,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유가 KU|유가]]의 성격이나 철학이 일반적인 종교들과 유사히 취급될 수 없다는 점에서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처럼 호칭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유가사상 KU|유가사상]]과 [[법가사상 KU|법가사상]]의 공동 선조였다.&lt;br /&gt;
&lt;br /&gt;
정치적으로는 [[요순우 KU|요순우]] [[삼황오제 KU|삼황오제]]의 이상적 정치와 조카를 왕으로서 성실하게 보필한 [[주나라 KU|주나라]] 주공의 정치 철학을 지향했다. 뜻을 펴려고 전국을 주유를 하였으나 그의 논설에 귀를 기울이는 왕이 없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 생을 마쳤다. [[춘추시대 KU|춘추시대]] 말기에 [[서주 KU|서주]]의 제후국인 [[노나라 KU|노나라]](魯)의 무관인 [[숙량흘 KU|숙량흘]]의 둘째 아들이자 [[서자 KU|서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lt;br /&gt;
&lt;br /&gt;
&amp;quot;공자(孔子)&amp;quot; 또는 &amp;quot;공부자(孔夫子)&amp;quot;로 불린다. &amp;quot;공자(孔子)&amp;quot;의 호칭에서 &amp;quot;자(子)&amp;quot;는 성인(聖人)인 공자를 높여 부르는 존칭이다. 그 뒤 여러 번 추증되어 [[대성지성문선왕 KU|대성지성문선왕]](大聖至聖文宣王)에 추봉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참조항목==&lt;br /&gt;
*동양 5 성&lt;br /&gt;
**[[자사 KU|자사]]&lt;br /&gt;
**[[맹자 KU|맹자]]&lt;br /&gt;
**[[증자 KU|증자]]&lt;br /&gt;
**[[안자 KU|안자]]&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5%88%EC%9E%90_KU</id>
		<title>안자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5%88%EC%9E%90_KU"/>
				<updated>2014-06-14T15:41:0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Created page with &amp;quot;==Meta Data== *타입 : 인물 *이름 : 안자(晏子) *생년 : 미상 *몰년 : BC 500 *역할 : 문묘(대성전)에 배향 *편자 : 필암서원 20...&amp;quot;&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타입 : 인물&lt;br /&gt;
*이름 : 안자(晏子)&lt;br /&gt;
*생년 : 미상&lt;br /&gt;
*몰년 : BC 500&lt;br /&gt;
*역할 : 문묘(대성전)에 배향&lt;br /&gt;
*편자 :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춘추 시대 제(齊)나라 사람. 이름은 영(嬰)이고, 자는 평중(平仲)이다. 평소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다. 영공(靈公)과 장공(莊公), 경공(景公) 세 군주를 섬기면서 재상을 지냈다. 사령(辭令)에 뛰어났고, 백성들의 생활에 관심을 가졌으며, 근검절약을 실천하면서 충간(忠諫)을 올려 제후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았다. 경공에게 세금을 경감할 것과 형벌을 줄일 것, 신하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 등을 충고했다. 근면한 정치가로 백성의 신망이 두터웠고, 관중(管仲)과 비견되는 훌륭한 재상이었다.&lt;br /&gt;
&lt;br /&gt;
일찍이 경공의 명령으로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혼인 외교를 성립시켰는데, 진나라의 대부(大夫) 숙향(叔向)과 토의하면서 제나라의 국정에 대해서도 언급하게 되었다. 예치(禮治)가 쇠퇴하는 현실에 우려를 표명하면서 장차 제나라는 진씨(陳氏, 즉 田氏)에 의해 대치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기억력이 뛰어난 독서가였으며, 합리주의적 경향이 강했다고 한다. 『안자춘추(晏子春秋)』가 그의 저서로 전해지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의 언행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lt;br /&gt;
&lt;br /&gt;
==참조항목==&lt;br /&gt;
*동양 5성&lt;br /&gt;
**[[공자 KU|공자]]&lt;br /&gt;
**[[맹자 KU|맹자]]&lt;br /&gt;
**[[자사 KU|자사]]&lt;br /&gt;
**[[증자 KU|증자]]&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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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맹자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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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Created page with &amp;quot;==Meta Data== *타입 : 인물 *이름 : 맹자(孟子) *생년 : BC 372 추정  *몰년 : BC 289 추정 *역할 : 문묘(대성전)에 배향 *편자 : 필암서원 KU|필...&amp;quot;&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타입 : 인물&lt;br /&gt;
*이름 : 맹자(孟子)&lt;br /&gt;
*생년 : BC 372 추정 &lt;br /&gt;
*몰년 : BC 289 추정&lt;br /&gt;
*역할 : 문묘(대성전)에 배향&lt;br /&gt;
*편자 :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맹자는 공자가 죽고 나서 100년 정도 뒤에 태어났다. 공자나 맹자나 정확하게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가능한 방법은 『논어』나 『맹자』에 실려 있는 그들의 행적을 추적해서, 즉 그들이 만났던 사람들이나, 목격했거나 관련되었던 사건들을 참고해서 연대를 추정하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공자는 대략 기원전 551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479년경에 죽었으며 맹자는 기원전 372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289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가들에 의해 공자와 맹자가 살았던 시대는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로 분류된다. 공자는 춘추시대에 살았으며 맹자는 전국시대에 살았다. 춘추시대는 기원전 770년에서 기원전 403년까지이며 전국시대는 기원전 403년에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인 기원전 222년까지이다. &lt;br /&gt;
&lt;br /&gt;
기원전 770년은 주(周) 왕실이 견융(犬戎)이라는 종족에게 쫓겨 수도를 동쪽인 낙양(洛陽)으로 옮긴 해이다. 그 전까지 중국은 주 왕실을 중심으로 많은 봉건국가들이 위성처럼 분립해 있었으며 이들은 혈연과 제사와 군사에 의해 주 왕실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주 왕실이 동쪽으로 천도할 즈음을 전후해서 이러한 봉건제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lt;br /&gt;
&lt;br /&gt;
춘추시대는 패자(覇者)들의 시대였다. 패자는 주 왕실의 명목만은 존중하면서 실상은 무력으로 다른 제후들을 정복했고 그럼으로써 천하를 다스렸다. 차례로 천하를 제패했던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송(宋)나라의 양공(襄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진(秦)나라의 목공(穆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은 5패로 불린다. 춘추시대만 해도 ― 제후국들은 실제적으로 독립한 나라였지만 ― 패자들은 근왕(勤王)의 기치를 내걸었다. &lt;br /&gt;
&lt;br /&gt;
전국시대에 들어서면 주나라는 거의 존재감을 상실하고 제후들도 더 이상 근왕의 명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춘추시대에 170여개에 달했던 제후국들은 동맹과 연맹의 결성, 외교적․군사적 전쟁을 통해 7개의 제후국으로 정리되었다. 즉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불리는 한(韓)․위(魏)․조(趙)․연(燕)․제(齊)․초(楚)․진(秦)이 이들이다. 이들은 천하를 제패한다는 한 가지 목표를 두고 약육강식의 전쟁을 전개했다. &lt;br /&gt;
&lt;br /&gt;
공자는 주 왕실 중심의 봉건제를 이상적인 제도로 생각했다. 공자를 시조로 하는 유가의 눈에서 보면 이러한 춘추전국시대는 인륜이 무너져가는 윤리․정치적 혼란기였을 뿐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철기와 우경의 보급으로 인한 생산력의 증대와 함께 문화면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특히 전국시대에는 국가차원에서 생산력을 높이려는 정책도 시도되었으며, 한편에서는 상인의 세력이 커져서 상인으로서 부에 의해 진의 재상까지 된 여불위(呂不韋) 같은 사람도 등장했다. &lt;br /&gt;
&lt;br /&gt;
전국시대는 또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였다. 사회의 혼란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어떻게 세상을 구제할 것인가에 관한 각종 사상이 태어났으며, 사상을 통제할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중국사상사에서 가장 자유롭고 다채로운 논쟁이 전개된 시기였다. 법가, 도가, 농가, 종횡가, 명가, 음양가, 잡가 등을 표방하는 수많은 학자들이 왕성한 사상활동을 펼치고 있었으며 맹자는 그들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맹자는 공자의 제자로 자처하면서, 다른 학파들을 비판하고 때로는 그들과 논쟁하면서 유학의 골격을 완성해갔다. &lt;br /&gt;
&lt;br /&gt;
맹자孟子, 즉 맹선생의 성은 맹(孟)이며 이름은 가(軻)이다. 추(鄒)라는 지방 출신인데 추는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에 속한 지방이라는 설도 있고 독립된 나라라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공자의 고향인 곡부(曲阜)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교육에 열심인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아들의 좋은 교육환경을 위해 이사를 세 번 했다거나 중도에 공부를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들에게 명심시키기 위해 자신이 짜던 베를 잘랐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lt;br /&gt;
&lt;br /&gt;
맹자는 인의(仁義)의 덕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가 당시의 정치적 분열상태를 극복할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왕도정치를 시행하라고 제후들에게 유세하고 다녔다. 기원전 320년경에 양(梁)나라(하남성 개봉시)에 가서 혜왕에게 왕도에 대해 유세했으나, 일이 년 뒤에 혜(惠)왕이 죽은 뒤, 아들인 양(襄)에게 실망해서 산동에 있는 제(齊)나라로 옮겼다. 그곳에서 제나라의 선(宣)왕에게 기대를 걸고 칠팔 년을 머물렀으나, 역시 자신의 이론이 채용되지 않자 떠날 수밖에 없었다. &lt;br /&gt;
&lt;br /&gt;
그 뒤 송(宋, 하남성 상구현), 설(薛, 산동성 등현 서남쪽)을 거쳐 일차로 추에 돌아온 뒤, 다시 문공(文公)의 초대를 받아 등(藤, 산동성 등현)으로 갔다. 역시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노魯(산동성 곡부현)를 거쳐 고향인 추로 돌아왔다. 당시의 제후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부국강병의 정치술이었다. 그러한 제후들의 현실적 관심과 맞아떨어질 여지가 없었던 맹자의 이론은 어느 제후에게도 채택되지 못했으며, 맹자는 당대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lt;br /&gt;
&lt;br /&gt;
50세가 넘어서 시작했던 편력을 그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70세 가량 되었을 때라고 추정된다.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과 함께 『시경』과 『서경』, 그리고 공자의 정신에 대해 토론했으며, 그 때 만들어진 책이 오늘날 전해지는 『맹자』7편이다.&lt;br /&gt;
&lt;br /&gt;
==참조항목==&lt;br /&gt;
*동양 5성&lt;br /&gt;
**[[공자 KU|공자]]&lt;br /&gt;
**[[증자 KU|증자]]&lt;br /&gt;
**[[안자 KU|안자]]&lt;br /&gt;
**[[자사 KU|자사]]&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9%80%EC%B6%A9%ED%98%84_KU</id>
		<title>김충현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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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4T15:25:4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타입 : 인물&lt;br /&gt;
*이름 : 김충현(金忠顯)&lt;br /&gt;
*생년 : 1921년&lt;br /&gt;
*몰년 : 2006년&lt;br /&gt;
*역할 : [[장서각 KU|장서각]] 편액 &lt;br /&gt;
*편자 :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File : Nhnsvc.jpg|thumb|김충현|150px]]&lt;br /&gt;
[[대한민국]]의 서예가이다. 호는 ‘일중(一中)’이며, 서울 출신이다. &lt;br /&gt;
&lt;br /&gt;
1943년 중동학교를 졸업. 1949년 문교부 예술위원,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등을 역임했고, 1953년 국전 심사위원이 되었다. 1965년 한국 서예가협회 상임위원이 되었고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를 창립, 이사장으로서 1천5백여 회원들에게 서예를 지도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7세 때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쓰기 시작했고 현재는 후한(後漢) 조전비서풍(曹全碑書風)의 예서(隸書)를 썼다. 궁체(宮體) 한글은 국내 독보적인 존재로 알려지고 있다. 김응현과 중계(仲季)의 형제간으로 그들의 사백(舍伯) 김문현(金文顯) 등 3인 모두 삼절(三絶)로 불릴 만큼 일가(一家)의 서풍(書風)을 이루었다.&lt;br /&gt;
&lt;br /&gt;
주요작품으로 〈4·19의거 희생자 묘비〉, 〈권도원수 행주대첩비명〉, 〈이충무공 한산도제승당비〉, 〈병천 유관순 기념비〉, 〈예산 윤봉길의사 기념비〉, 〈백범 김구선생 묘비〉, 〈사육신묘비〉, 〈의암손병희선생 묘비〉, 〈월남 이상재선생 묘비〉가 있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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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우동사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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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4T15:16:3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 내용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Meta Data==&lt;br /&gt;
*타입 : 문화유산&lt;br /&gt;
*한글항목명 : 우동사&lt;br /&gt;
*한자항목명 : 祐東祠&lt;br /&gt;
*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File:694.jpg|200px]]&lt;br /&gt;
[[File:images.jpg|200px]]&lt;br /&gt;
&lt;br /&gt;
가장 안쪽에 자리잡은 우동사는 [[필암서원 KU|필암서원(筆巖書院)]]의 사우(祠宇)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단층 [[맞배지붕 KU|맞배지붕]] 집이며,&lt;br /&gt;
정면인 북쪽 벽에는 [[김인후 KU|김인후]]의 위패를 모시고 동쪽 벽에는 [[양자징 KU|양자징]]의 위패를 모셨다. &lt;br /&gt;
&lt;br /&gt;
편액(扁額)은 주자(朱字)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였으며, 사당 이름 '우동사(祐東祠)'는 &amp;quot;하늘의 도움[祐]으로 인하여 우리 동방[東]에 태어난 이가 [[김인후 KU|하서]] 김선생이다&amp;quot;라는 뜻에서 취하였다&lt;br /&gt;
&lt;br /&gt;
1년에 두 번, 중춘(음력 2월)과 중추(음력 8월)의 중정일(中丁日)에 많은 유림과 지방 기관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사를 지낸다.&lt;br /&gt;
&lt;br /&gt;
우동사의 동쪽에는 [[인종 KU|인종]]이 하사한 [[묵죽도 KU|묵죽(먹으로 그린 대나무]])과 [[하서집 KU|『하서집』]] 등 1,300여 권의 책, 그리고 보물 제587호로 지정된 [[노비보 KU |『노비보』(奴婢譜)]] 등 69점의 문서를 소장한 [[필암서원 장서각 KU|장서각]]이 붙어 있고, 다시 그 담 밖에는 『하서집』의 목판이 소장된 [[장판각 KU|장판각]], 원지기들이 거주하던 [[고직사 KU|교직사]]가 있다. 한편 입구의 [[확연루 KU|곽연루]] 서쪽 담 너머에도 작은 마당 둘레로 [[고직사 KU|교직사]]와 창고 건물 등이 들어서 있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94%EC%9E%91%EC%A7%80%EB%B6%95_KU</id>
		<title>팔작지붕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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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 내용 */&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타입 : 개념&lt;br /&gt;
*용어 : 팔작지붕(八作─)&lt;br /&gt;
*편자 :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File : db5_65_i2.jpg|thumb|팔작지붕|200px]]&lt;br /&gt;
한식(韓式) 가옥의 지붕 구조의 하나로, 합각(合閣)지붕·팔작집이라고도 한다. 지붕 위까지 박공이 달려 용마루 부분이 삼각형의 벽을 이루고 처마끝은 우진각지붕과 같다. [[맞배지붕 KU|맞배지붕]]과 함께 한식 가옥에 가장 많이 쓰는 지붕의 형태이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8%AD%EC%9D%98%EC%9E%AC_KU</id>
		<title>숭의재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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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4T15:07:4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타입 : 문화유산&lt;br /&gt;
*한글항목명 : 숭의재&lt;br /&gt;
*한자항목명 : 崇義齋&lt;br /&gt;
*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File:images (1).jpg|thumb|200px]]&lt;br /&gt;
[[File:images (2).jpg|thumb|200px]]&lt;br /&gt;
[[서재 KU|서재유생]]이 기거하던 곳으로 [[송준길 KU|동춘]] [[송준길 KU|송준길]]이 편액을 썼다.&lt;br /&gt;
&lt;br /&gt;
==참조항목==&lt;br /&gt;
[[서재 KU|서재]]&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6%80%EC%A1%B0%EB%AC%98_KU</id>
		<title>부조묘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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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4T14:53:2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 Meta Data */&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타입: 장소&lt;br /&gt;
*한글명: 부조묘&lt;br /&gt;
*주소: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중평리 582&lt;br /&gt;
*위치:[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5.411667&amp;amp;longi=126.885479&amp;amp;pname=부조묘 위도 35.411667 / 경도 126.885479]&lt;br /&gt;
*편자: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410322이채연]]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File : 1763278.jpg|200px]]&lt;br /&gt;
&lt;br /&gt;
[[김인후 KU|하서]] [[김인후 KU|김인후]]의 불천지위(不遷之位; 큰 공을 세운 사람을 사당에 영구히 모시도록 나라에서 허가한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lt;br /&gt;
&lt;br /&gt;
1832년(순조 32)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용두리에 세웠다. 이후 곡성군 옥과면,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 등지로 옮겼다가 1957년 현 위치(장성군 북하면 중평리 582번지)로 다시 옮겨 세웠다.&lt;br /&gt;
&lt;br /&gt;
내삼문인 집성문(集成門)과 사우 문정묘(文正廟)로 이루어져 있다. 문정묘는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집으로, 조선 중종 때 그린 ‘연방계회도(蓮榜契會圖)’, ‘동호계회도(東湖契會圖)’ 등의 그림과 다수의 고문서도 보관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5%98%EC%84%9C_%EC%8B%A0%EB%8F%84%EB%B9%84_KU</id>
		<title>하서 신도비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5%98%EC%84%9C_%EC%8B%A0%EB%8F%84%EB%B9%84_KU"/>
				<updated>2014-06-14T14:52:3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 Meta Data */&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타입 : 문화유산&lt;br /&gt;
*명칭 : 장성 김인후 신도비&lt;br /&gt;
*문화재지정번호 : 전라남도 기념물 제219호&lt;br /&gt;
*주소 : 전남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산 25번지&lt;br /&gt;
*위치 : [http://digerati.aks.ac.kr/VR/xsl6/navermap.htm?lati=35.306844&amp;amp;longi=126.729452&amp;amp;pname=하서 신도비 위도 35.306844 / 경도 126.729452]&lt;br /&gt;
*편자 :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410322이채연]] [[필암서원 KU|필암서원]][[201313086 김원주]]&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File : SAM_0755.jpg|200px]]&lt;br /&gt;
&lt;br /&gt;
[[김인후 KU|하서]] [[김인후 KU|김인후]](1510~1560) 선생을 기리기 위해 1742년에 세운 신도비로 비의 글은 1682년에 [[송시열 KU|송시열(宋時烈)]]이 지었으며, &lt;br /&gt;
1742년에 원당산(願堂山) 묘소 아래에 세웠다. 글씨는 이재(李縡)가 썼다.&lt;br /&gt;
&lt;br /&gt;
신도비문에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태어나게 하신 [[김인후 KU|하서]] [[김인후 KU|김선생]]은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은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쓰여 있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W751963</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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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313086 김원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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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4T14:43: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751963: &lt;/p&gt;
&lt;hr /&gt;
&lt;div&gt;[[File:CAM00148 copy.jpg|100px]]&lt;br /&gt;
*이름 : 김원주&lt;br /&gt;
*학번 : 201313086&lt;br /&gt;
*소속 : 자율전공학부&lt;br /&gt;
*전화번호 : 010-4775-1498&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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