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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H 교육용 위키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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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파일:이주환2.jp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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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파일:김기수1.jp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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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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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기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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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파일:김기수.jpg|150px|오른쪽|김기수]]&lt;br /&gt;
=='''개요'''==&lt;br /&gt;
김기수(金琪洙, 죽헌(竹軒), 光山哲三, 1917.11.22~1986.10.21)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김기수(金琪洙)&lt;br /&gt;
* 아호 = 죽헌(竹軒)&lt;br /&gt;
* 전공 = 대금&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7-1986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그의 아들 김용만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버지를 생각할 때, 늘 가장 먼저 떠로르는 것은 언제나 일에 열중히 계시던 모습이다'&amp;lt;ref&amp;gt;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79쪽&amp;lt;/ref&amp;gt;라며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는 먹고 잘때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 열중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국악계에 많은 업적을 남기는데에 기여하였다. 여러가지 업적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amp;lt;b&amp;gt;창작국악&amp;lt;/b&amp;gt;&amp;lt;/font&amp;gt;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은 국악창작곡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amp;lt;ref&amp;gt; 이능화의 한시에 김기수가 곡을 붙인 곡으로 1939년에 작곡하였다. 이 곡은 이왕직에서 일본기원 2600년이 되는 1940년 행사에 사용할 창작곡을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기수의 다른 작품인 '세우영' 혹은 '고향소'를 창작국악곡의 효시로 보자는 의견도 있다. 이수정, 황화만년지곡 연구, 『온지논총』제45집, 2006, 235쪽&amp;lt;/ref&amp;gt; 그리고 그가 작곡한 '정백혼'이라는 작품은 국악관현악곡으로 이 곡을 통해서 국악관현악에 지휘봉이 처음 도입되었고,&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62쪽&amp;lt;/ref&amp;gt; 현재까지도 국악관현악에 지휘를 한다. 그 외에 그가 작곡한 곡수는 약 510곡&amp;lt;ref&amp;gt;서한범, 죽헌 김기수론,『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56쪽&amp;lt;/ref&amp;gt;정도이다. 또 다른 업적으로는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amp;lt;b&amp;gt;악보편찬&amp;lt;/b&amp;gt;&amp;lt;/font&amp;gt;이다. 당시 연주되던 정악, 민속악을 오선보 혹은 정간보로 채보하였다. 그가 편찬한 국악교재들은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해금 등으로 국악사양성소의 정규교재로 사용되었다,&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56쪽&amp;lt;/ref&amp;gt; 그가 작업한 악보에는 시김새 부호 통일 등 실제음악에 더 가까워졌는데, 이전에 구전심수(口傳心授)로 배웠던 국악교육이 악보를 통한 국악교육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amp;lt;b&amp;gt;교육현장에서 단소연주&amp;lt;/b&amp;gt;&amp;lt;/font&amp;gt;가 필수로 음악교과서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렇게 단소가 교육현장에서 많이 불릴 수 있도록 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합성수지재를 이용한 교육용 단소 등을 제작하여 규격과 음악을 통일하였고, 저렴한 생산비로 대량생산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립국악원에 그의 동상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친일파 동상 논란에 휩싸였다. 그가 미쓰야마 테쓰조(光山哲三)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일본 천황 탄신을 기념하는 곡인 '황화만년지곡'을 지었다는 이유때문인데, 결국 국립국악원에서는 김기수의 친일행적을 동상에 기록하는 것&amp;lt;ref&amp;gt;[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372958&amp;amp;section=sc2 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 브레이크뉴스, 2015년 6월 6일&amp;lt;/ref&amp;gt;으로 이 논란의 결론을 지었다. 친일파 논란이 있지만, &amp;quot;새것을 찾으려거든 전통을 더 깊이 파라&amp;quot;는 말처럼 국악을 깊게 팠던 그의 행적은 국악명맥을 이어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현재까지도 그가 만들었던 악보를 통해 국악을 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4기 입학&lt;br /&gt;
* 1936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예술사&lt;br /&gt;
* 1953년 국립국악원 장악과장&lt;br /&gt;
* 1962년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lt;br /&gt;
*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보유자&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보유자&lt;br /&gt;
* 1973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77년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lt;br /&gt;
*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39년 황화만년지곡&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1년 세우영&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4년 고향소&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53년 회서양&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62년 새나라&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83년 초롱&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악전첫걸음》&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민요오십곡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1년 《대금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단소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7년 《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음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1년 《월하정가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2년 《국악입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3년 《국악전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속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1년 《단소율보》&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4년 《가야금정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lt;br /&gt;
*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lt;br /&gt;
* 서한범, 죽헌 김기수론,『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lt;br /&gt;
* 이수정, 황화만년지곡 연구, 『온지논총』제45집, 2006. &lt;br /&gt;
* 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 브레이크뉴스, 2015년 6월 6일&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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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기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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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13:53:3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김기수.jpg|150px|오른쪽|김기수]]&lt;br /&gt;
=='''개요'''==&lt;br /&gt;
김기수(金琪洙, 죽헌(竹軒), 光山哲三, 1917.11.22~1986.10.21)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김기수(金琪洙)&lt;br /&gt;
* 아호 = 죽헌(竹軒)&lt;br /&gt;
* 전공 = 대금&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7-1986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그의 아들 김용만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버지를 생각할 때, 늘 가장 먼저 떠로르는 것은 언제나 일에 열중히 계시던 모습이다'&amp;lt;ref&amp;gt;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79쪽&amp;lt;/ref&amp;gt;라며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는 먹고 잘때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 열중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국악계에 많은 업적을 남기는데에 기여하였다. 여러가지 업적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amp;lt;b&amp;gt;창작국악&amp;lt;/b&amp;gt;&amp;lt;/font&amp;gt;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은 국악창작곡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amp;lt;ref&amp;gt; 이능화의 한시에 김기수가 곡을 붙인 곡으로 1939년에 작곡하였다. 이 곡은 이왕직에서 일본기원 2600년이 되는 1940년 행사에 사용할 창작곡을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기수의 다른 작품인 '세우영' 혹은 '고향소'를 창작국악곡의 효시로 보자는 의견도 있다. 이수정, 황화만년지곡 연구, 『온지논총』제45집, 2006, 235쪽&amp;lt;/ref&amp;gt; 그리고 그가 작곡한 '정백혼'이라는 작품은 국악관현악곡으로 이 곡을 통해서 국악관현악에 지휘봉이 처음 도입되었고,&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62쪽&amp;lt;/ref&amp;gt; 현재까지도 국악관현악에 지휘를 한다. 그 외에 그가 작곡한 곡수는 약 510곡&amp;lt;ref&amp;gt;서한범, 죽헌 김기수론,『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56쪽&amp;lt;/ref&amp;gt;정도이다. 또 다른 업적으로는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amp;lt;b&amp;gt;악보편찬&amp;lt;/b&amp;gt;&amp;lt;/font&amp;gt;이다. 당시 연주되던 정악, 민속악을 오선보 혹은 정간보로 채보하였다. 그가 편찬한 국악교재들은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해금 등으로 국악사양성소의 정규교재로 사용되었다,&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56쪽&amp;lt;/ref&amp;gt; 그가 작업한 악보에는 시김새 부호 통일 등 실제음악에 더 가까워졌는데, 이전에 구전심수(口傳心授)로 배웠던 국악교육이 악보를 통한 국악교육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amp;lt;b&amp;gt;교육현장에서 단소연주&amp;lt;/b&amp;gt;&amp;lt;/font&amp;gt;가 필수로 음악교과서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렇게 단소가 교육현장에서 많이 불릴 수 있도록 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합성수지재를 이용한 교육용 단소 등을 제작하여 규격과 음악을 통일하였고, 저렴한 생산비로 대량생산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립국악원에 그의 동상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친일파 동상 논란에 휩싸였다. 그가 미쓰야마 테쓰조(光山哲三)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일본 천황 탄신을 기념하는 곡인 &amp;lt;황화만년지곡&amp;gt;을 지었다는 이유때문인데, 결국 국립국악원에서는 김기수의 친일행적을 동상에 기록하는 것&amp;lt;ref&amp;gt;[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372958&amp;amp;section=sc2 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 브레이크뉴스, 2015년 6월 6일&amp;lt;/ref&amp;gt;으로 이 논란의 결론을 지었다. 친일파 논란이 있지만, &amp;quot;새것을 찾으려거든 전통을 더 깊이 파라&amp;quot;는 말처럼 국악을 깊게 팠던 그의 행적은 국악명맥을 이어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현재까지도 그가 만들었던 악보를 통해 국악을 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4기 입학&lt;br /&gt;
* 1936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예술사&lt;br /&gt;
* 1953년 국립국악원 장악과장&lt;br /&gt;
* 1962년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lt;br /&gt;
*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보유자&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보유자&lt;br /&gt;
* 1973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77년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lt;br /&gt;
*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39년 황화만년지곡&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1년 세우영&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4년 고향소&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53년 회서양&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62년 새나라&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83년 초롱&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악전첫걸음》&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민요오십곡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1년 《대금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단소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7년 《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음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1년 《월하정가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2년 《국악입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3년 《국악전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속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1년 《단소율보》&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4년 《가야금정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lt;br /&gt;
*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lt;br /&gt;
* 서한범, 죽헌 김기수론,『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lt;br /&gt;
* 이수정, 황화만년지곡 연구, 『온지논총』제45집, 2006. &lt;br /&gt;
* 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 브레이크뉴스, 2015년 6월 6일&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9%80%EA%B8%B0%EC%88%98</id>
		<title>김기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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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13:48:5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김기수.jpg|150px|오른쪽|김기수]]&lt;br /&gt;
=='''개요'''==&lt;br /&gt;
김기수(金琪洙, 죽헌(竹軒), 光山哲三, 1917.11.22~1986.10.21)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김기수(金琪洙)&lt;br /&gt;
* 아호 = 죽헌(竹軒)&lt;br /&gt;
* 전공 = 대금&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7-1986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그의 아들 김용만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버지를 생각할 때, 늘 가장 먼저 떠로르는 것은 언제나 일에 열중히 계시던 모습이다'&amp;lt;ref&amp;gt;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79쪽&amp;lt;/ref&amp;gt;라며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는 먹고 잘때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 열중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국악계에 많은 업적을 남기는데에 기여하였다. 여러가지 업적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amp;lt;b&amp;gt;창작국악&amp;lt;/b&amp;gt;&amp;lt;/font&amp;gt;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은 국악창작곡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amp;lt;ref&amp;gt; 이능화의 한시에 김기수가 곡을 붙인 곡으로 1939년에 작곡하였다. 이 곡은 이왕직에서 일본기원 2600년이 되는 1940년 행사에 사용할 창작곡을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기수의 다른 작품인 '세우영' 혹은 '고향소'를 창작국악곡의 효시로 보자는 의견도 있다. 이수정, 황화만년지곡 연구, 『온지논총』제45집, 2006, 235쪽&amp;lt;/ref&amp;gt; 그리고 그가 작곡한 '정백혼'이라는 작품은 국악관현악곡으로 이 곡을 통해서 국악관현악에 지휘봉이 처음 도입되었고,&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62쪽&amp;lt;/ref&amp;gt; 현재까지도 국악관현악에 지휘를 한다. 그 외에 그가 작곡한 곡수는 약 510곡&amp;lt;ref&amp;gt;서한범, 죽헌 김기수론,『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56쪽&amp;lt;/ref&amp;gt;정도이다. 또 다른 업적으로는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amp;lt;b&amp;gt;악보편찬&amp;lt;/b&amp;gt;&amp;lt;/font&amp;gt;이다. 당시 연주되던 정악, 민속악을 오선보 혹은 정간보로 채보하였다. 그가 편찬한 국악교재들은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해금 등으로 국악사양성소의 정규교재로 사용되었다,&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56쪽&amp;lt;/ref&amp;gt; 그가 작업한 악보에는 시김해 부호 통일 등 실제음악에 더 가까워졌는데, 이전에 구전심수(口傳心授)로 배웠던 국악교육이 악보를 통한 국악교육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amp;lt;b&amp;gt;교육현장에서 단소연주&amp;lt;/b&amp;gt;&amp;lt;/font&amp;gt;가 필수로 음악교과서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렇게 단소가 교육현장에서 많이 불릴 수 있도록 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합성수지재를 이용한 교육용 단소 등을 제작하여 규격과 음악을 통일하였고, 저렴한 생산비로 대량생산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립국악원에 그의 동상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친일파 동상 논란에 휩싸였다. 그가 미쓰야마 테쓰조(光山哲三)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일본 천황 탄신을 기념하는 곡인 &amp;lt;황화만년지곡&amp;gt;을 지었다는 이유때문인데, 결국 국립국악원에서는 김기수의 친일행적을 동상에 기록하는 것&amp;lt;ref&amp;gt;[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372958&amp;amp;section=sc2 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 브레이크뉴스, 2015년 6월 6일&amp;lt;/ref&amp;gt;으로 이 논란의 결론을 지었다. 친일파 논란이 있지만, &amp;quot;새것을 찾으려거든 전통을 더 깊이 파라&amp;quot;는 말처럼 국악을 깊게 팠던 그의 행적은 국악명맥을 이어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현재까지도 그가 만들었던 악보를 통해 국악을 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4기 입학&lt;br /&gt;
* 1936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예술사&lt;br /&gt;
* 1953년 국립국악원 장악과장&lt;br /&gt;
* 1962년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lt;br /&gt;
*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보유자&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보유자&lt;br /&gt;
* 1973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77년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lt;br /&gt;
*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39년 황화만년지곡&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1년 세우영&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4년 고향소&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53년 회서양&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62년 새나라&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83년 초롱&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악전첫걸음》&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민요오십곡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1년 《대금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단소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7년 《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음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1년 《월하정가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2년 《국악입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3년 《국악전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속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1년 《단소율보》&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4년 《가야금정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lt;br /&gt;
*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lt;br /&gt;
* 서한범, 죽헌 김기수론,『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lt;br /&gt;
* 이수정, 황화만년지곡 연구, 『온지논총』제45집, 2006. &lt;br /&gt;
* 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 브레이크뉴스, 2015년 6월 6일&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9%80%EA%B8%B0%EC%88%98</id>
		<title>김기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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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13:46: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김기수.jpg|150px|오른쪽|김기수]]&lt;br /&gt;
=='''개요'''==&lt;br /&gt;
김기수(金琪洙, 죽헌(竹軒), 光山哲三, 1917.11.22~1986.10.21)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김기수(金琪洙)&lt;br /&gt;
* 아호 = 죽헌(竹軒)&lt;br /&gt;
* 전공 = 대금&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7-1986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그의 아들 김용만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버지를 생각할 때, 늘 가장 먼저 떠로르는 것은 언제나 일에 열중히 계시던 모습이다'&amp;lt;ref&amp;gt;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79쪽&amp;lt;/ref&amp;gt;라며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는 먹고 잘때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 열중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국악계에 많은 업적을 남기는데에 기여하였다. 여러가지 업적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amp;lt;b&amp;gt;창작국악&amp;lt;/b&amp;gt;&amp;lt;/font&amp;gt;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은 국악창작곡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amp;lt;ref&amp;gt; 이능화의 한시에 김기수가 곡을 붙인 곡으로 1939년에 작곡하였다. 이 곡은 이왕직에서 일본기원 2600년이 되는 1900년 행사에 사용할 창작곡을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기수의 다른 작품인 '세우영' 혹은 '고향소'를 창작국악곡의 효시로 보자는 의견도 있다. 이수정, 황화만년지곡 연구, 『온지논총』제45집, 2006, 235쪽&amp;lt;/ref&amp;gt; 그리고 그가 작곡한 '정백혼'이라는 작품은 국악관현악곡으로 이 곡을 통해서 국악관현악에 지휘봉이 처음 도입되었고,&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62쪽&amp;lt;/ref&amp;gt; 현재까지도 국악관현악에 지휘를 한다. 그 외에 그가 작곡한 곡수는 약 510곡&amp;lt;ref&amp;gt;서한범, 죽헌 김기수론,『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56쪽&amp;lt;/ref&amp;gt;정도이다. 또 다른 업적으로는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amp;lt;b&amp;gt;악보편찬&amp;lt;/b&amp;gt;&amp;lt;/font&amp;gt;이다. 당시 연주되던 정악, 민속악을 오선보 혹은 정간보로 채보하였다. 그가 편찬한 국악교재들은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해금 등으로 국악사양성소의 정규교재로 사용되었다,&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56쪽&amp;lt;/ref&amp;gt; 그가 작업한 악보에는 시김해 부호 통일 등 실제음악에 더 가까워졌는데, 이전에 구전심수(口傳心授)로 배웠던 국악교육이 악보를 통한 국악교육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amp;lt;b&amp;gt;교육현장에서 단소연주&amp;lt;/b&amp;gt;&amp;lt;/font&amp;gt;가 필수로 음악교과서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렇게 단소가 교육현장에서 많이 불릴 수 있도록 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합성수지재를 이용한 교육용 단소 등을 제작하여 규격과 음악을 통일하였고, 저렴한 생산비로 대량생산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립국악원에 그의 동상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친일파 동상 논란에 휩싸였다. 그가 미쓰야마 테쓰조(光山哲三)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일본 천황 탄신을 기념하는 곡인 &amp;lt;황화만년지곡&amp;gt;을 지었다는 이유때문인데, 결국 국립국악원에서는 김기수의 친일행적을 동상에 기록하는 것&amp;lt;ref&amp;gt;[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372958&amp;amp;section=sc2 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 브레이크뉴스, 2015년 6월 6일&amp;lt;/ref&amp;gt;으로 이 논란의 결론을 지었다. 친일파 논란이 있지만, &amp;quot;새것을 찾으려거든 전통을 더 깊이 파라&amp;quot;는 말처럼 국악을 깊게 팠던 그의 행적은 국악명맥을 이어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현재까지도 그가 만들었던 악보를 통해 국악을 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4기 입학&lt;br /&gt;
* 1936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예술사&lt;br /&gt;
* 1953년 국립국악원 장악과장&lt;br /&gt;
* 1962년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lt;br /&gt;
*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보유자&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보유자&lt;br /&gt;
* 1973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77년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lt;br /&gt;
*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39년 황화만년지곡&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1년 세우영&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4년 고향소&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53년 회서양&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62년 새나라&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83년 초롱&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악전첫걸음》&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민요오십곡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1년 《대금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단소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7년 《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음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1년 《월하정가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2년 《국악입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3년 《국악전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속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1년 《단소율보》&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4년 《가야금정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lt;br /&gt;
*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lt;br /&gt;
* 서한범, 죽헌 김기수론,『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lt;br /&gt;
* 이수정, 황화만년지곡 연구, 『온지논총』제45집, 2006. &lt;br /&gt;
* 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 브레이크뉴스, 2015년 6월 6일&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B1%EA%B2%BD%EB%A6%B0</id>
		<title>성경린</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B1%EA%B2%BD%EB%A6%B0"/>
				<updated>2017-06-26T13:11:4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성경린.jpg|150px|오른쪽|성경린]]&lt;br /&gt;
=='''개요'''==&lt;br /&gt;
성경린(成慶麟, 관제, 1911.9.18~2008.3.5)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성경린(成慶麟)&lt;br /&gt;
* 아호 = 관제&lt;br /&gt;
* 전공 = 거문고&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1-2008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amp;lt;ref&amp;gt;[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080306/8552055/1#csidx1a0490c79a33a9a82e1bcc47f8d50ec 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 동아일보 2008년 3월 6일자&amp;lt;/ref&amp;gt; 그의 자서전의 제목도 '노을에 띄운 가락'으로 그는 평생을 풍류정신으로 무장하여 국악과 함께 살았다. 그의 회고록의 제목인 '다시 태어나도 아악&amp;lt;ref&amp;gt;당시 현재의 국악을 아악이라고 지칭하였다.&amp;lt;/ref&amp;gt;의 길로'라는 제목을 보아 그의 국악에 대한 열정과 업적이 느껴진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어느날 친척한분이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시험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집이 가난하여 상급학교에 갈 수 없었고, 이 학교에서 아는바가 없었지만 공부를 공짜로 시켜주고, 게다가 돈까지 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시험을 치뤘다고 한다.&amp;lt;ref&amp;gt;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50쪽&amp;lt;/ref&amp;gt; 그러한 계기로 아악의 길로 들어온 그는 한 평생 국악을 위해 인생을 바치셨다. 광복 후 국악의 단절 위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국악보급&amp;lt;/b&amp;gt;&amp;lt;/font&amp;gt;를 통해 국악이 전승되도록 힘썼다. 해방직후 이왕직아악부는 구왕궁아악부로 바뀌었고, 당시 당국의 제도의 미비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근근히 명백만 이어져 오고 있었다.&amp;lt;ref&amp;gt;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28쪽&amp;lt;/ref&amp;gt; [[이복길(주환)]]과 함께 해방직후 '雅樂部國營에 關한 請願'을 제출하였고,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또한 동시에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라는 필요성&amp;lt;ref&amp;gt;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20쪽&amp;lt;/ref&amp;gt;으로 1955년 국악사양성소가 설립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문교부 편수국에 들어가 교과서 편찬의 일을 맡았고, 중앙방송국에서 국악감상 프로그램의 해설자로 활동&amp;lt;ref&amp;gt;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70쪽&amp;lt;/ref&amp;gt; 하였다. 그 밖에 시조강습회를 통해 국악을 보급하였고, 이혜구 등과 더불어 한국국악학회를 1949년에 창설&amp;lt;ref&amp;gt;황준연, 성경린 거문고를 가르치며 국악을 지키고 가꾸다, 『한국사 시민강좌』40권, 2012, 362쪽&amp;lt;/ref&amp;gt; 하였다. 그가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시절 선생으로부터 &amp;quot;항상 빈자리는 생기게 마련인거야. 앞이 겹겹이 막혔다고 꿈을 중도에서 꺾거나 괴로와할 필요가 없더군&amp;quot;&amp;lt;ref&amp;gt;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2),『한국음악사학보』제18집, 1997, 64쪽&amp;lt;/ref&amp;gt;라는 말을 듣고, 항상 이 말을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자란 그는 노후에 본인 스스로가 훌륭한 스승이 되어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고, 그가 걸었던 국악의 길을 현재 많은 국악전공자들이 걷고 있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45년 구왕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50년 국립국악원 악사장&lt;br /&gt;
* 1950년 국악사양성소 부소장&lt;br /&gt;
*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 1961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61년 국악사양성소 소장&lt;br /&gt;
* 1972년 국립국악고등학교 초대교장&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의 아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음악독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수상집 雅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조선의 민요》&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설》&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의 무용》&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음악논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국악감상》&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8년 《나의 人生觀: 노을에 띄운 가락》&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9년 《韓國傳統舞踊》&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85년 《世宗時代의 音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2000년 《국악학논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lt;br /&gt;
*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lt;br /&gt;
* 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 『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lt;br /&gt;
*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lt;br /&gt;
*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2),『한국음악사학보』제18집, 1997.&lt;br /&gt;
* 황준연, 성경린 거문고를 가르치며 국악을 지키고 가꾸다, 『한국사 시민강좌』 40권, 2012 &lt;br /&gt;
* 성경린 선생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 동아일보 2008년 3월 6일자&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B4%EB%B3%B5%EA%B8%B8(%EC%A3%BC%ED%99%98)</id>
		<title>이복길(주환)</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B4%EB%B3%B5%EA%B8%B8(%EC%A3%BC%ED%99%98)"/>
				<updated>2017-06-26T11:57: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이주환.jpg|150px|오른쪽|이주환]]&lt;br /&gt;
=='''개요'''==&lt;br /&gt;
이주환(李珠煥, 소남(韶南), 1909~1972)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이주환(李珠煥)&lt;br /&gt;
* 아호 = 소남(韶南)&lt;br /&gt;
* 전공 = 피리&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09-1972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lt;br /&gt;
이주환은 원래 이복길이었으나 이주환으로 개명하였고, 국악계에는 이주환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딸인 이재경의 회고록을 보면 &amp;quot;아버지는 무엇인가 항상 열심히 하고 계셨다. 어린 나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가의 보존과 후진 양성이라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amp;quot;&amp;lt;ref&amp;gt;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66쪽&amp;lt;/ref&amp;gt;라고 적혀있듯이 그는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정가보존&amp;lt;/b&amp;gt;&amp;lt;/font&amp;gt;과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국악교육&amp;lt;/b&amp;gt;&amp;lt;/font&amp;gt;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광복이후 제도의 미비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국악의 근근히 명백만 이어져 오고 있을 때,&amp;lt;ref&amp;gt;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28쪽&amp;lt;/ref&amp;gt; [[성경린]]과 함께 해방직후 '雅樂部國營에 關한 請願'을 제출하였다. 그리고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그의 노력이 없었으면 우리나라의 국립국악기관인 국립국악원의 맥이 끊겼을 것이다. 또한 그는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라는 필요성&amp;lt;ref&amp;gt;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20쪽&amp;lt;/ref&amp;gt;으로 1955년 국악사양성소가 설립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에서 피리를 전공했지만, 피리보다 정가 전승에 공헌을 하였다.&amp;lt;ref&amp;gt;김우진, 소남 가곡의 전승과 의의, 『한국음악연구』 54집, 2013, 32쪽&amp;lt;/ref&amp;gt; [[성경린]], 이병기와 함께 시조연구회를 결성하였으며, 그가 가곡보와 가사보를 편찬하였다. 그가 만든 악보는 교육현장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성악곡 교재로 가장 먼저 편찬된 것이었다.&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52쪽&amp;lt;/ref&amp;gt; 다른 전공에 비해 정가와 관련하여 전승되는 문헌은 그가 남긴 업적이 거의 유일하고, 그가 악보를 편찬하지 않았으면 정가의 맥은 끊겼을 수도 있다. 그를 통해 정가의 맥은 물론 국악의 맥도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37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46년 구왕궁 아악부 아악사장&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초대원장&lt;br /&gt;
* 1951년 국악사양성소 초대소장 &lt;br /&gt;
*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 가곡 보유자 지정&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보유자 지정&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고금시조선(古今時調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9년 《가곡보(歌曲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0년 《가사보(歌詞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2년 《속가곡보(續歌曲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소남가곡선집(韶南歌曲選集)》&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시조창연구(時調唱硏究)》&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71년 《소남가곡선집》&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72년 《한국음악선집 제1집 태평가》&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89년 《이주환 가곡 가사 전집》&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lt;br /&gt;
* 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lt;br /&gt;
* 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lt;br /&gt;
* 김우진, 소남 가곡의 전승과 의의, 『한국음악연구』 54집, 2013.&lt;br /&gt;
* 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B4%EB%B3%B5%EA%B8%B8(%EC%A3%BC%ED%99%98)</id>
		<title>이복길(주환)</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B4%EB%B3%B5%EA%B8%B8(%EC%A3%BC%ED%99%98)"/>
				<updated>2017-06-26T11:57:1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이주환.jpg|150px|오른쪽|이주환]]&lt;br /&gt;
=='''개요'''==&lt;br /&gt;
이주환(李珠煥, 소남(韶南), 1909~1972)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이주환(李珠煥)&lt;br /&gt;
* 아호 = 소남(韶南)&lt;br /&gt;
* 전공 = 피리&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09-1972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lt;br /&gt;
이주환은 원래 이복길이었으나 이주환으로 개명하였고, 국악계에는 이주환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딸인 이재경의 회고록을 보면 &amp;quot;아버지는 무엇인가 항상 열심히 하고 계셨다. 어린 나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가의 보존과 후진 양성이라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amp;quot;&amp;lt;ref&amp;gt;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66쪽&amp;lt;/ref&amp;gt;라고 적혀있듯이 그는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정가보존&amp;lt;/b&amp;gt;&amp;lt;/font&amp;gt;과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국악교육&amp;lt;/b&amp;gt;&amp;lt;/font&amp;gt;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광복이후 제도의 미비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국악의 근근히 명백만 이어져 오고 있을 때,&amp;lt;ref&amp;gt;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28쪽&amp;lt;/ref&amp;gt; [[성경린)]]과 함께 해방직후 '雅樂部國營에 關한 請願'을 제출하였다. 그리고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그의 노력이 없었으면 우리나라의 국립국악기관인 국립국악원의 맥이 끊겼을 것이다. 또한 그는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라는 필요성&amp;lt;ref&amp;gt;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20쪽&amp;lt;/ref&amp;gt;으로 1955년 국악사양성소가 설립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에서 피리를 전공했지만, 피리보다 정가 전승에 공헌을 하였다.&amp;lt;ref&amp;gt;김우진, 소남 가곡의 전승과 의의, 『한국음악연구』 54집, 2013, 32쪽&amp;lt;/ref&amp;gt; [[성경린]], 이병기와 함께 시조연구회를 결성하였으며, 그가 가곡보와 가사보를 편찬하였다. 그가 만든 악보는 교육현장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성악곡 교재로 가장 먼저 편찬된 것이었다.&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52쪽&amp;lt;/ref&amp;gt; 다른 전공에 비해 정가와 관련하여 전승되는 문헌은 그가 남긴 업적이 거의 유일하고, 그가 악보를 편찬하지 않았으면 정가의 맥은 끊겼을 수도 있다. 그를 통해 정가의 맥은 물론 국악의 맥도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37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46년 구왕궁 아악부 아악사장&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초대원장&lt;br /&gt;
* 1951년 국악사양성소 초대소장 &lt;br /&gt;
*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 가곡 보유자 지정&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보유자 지정&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고금시조선(古今時調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9년 《가곡보(歌曲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0년 《가사보(歌詞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2년 《속가곡보(續歌曲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소남가곡선집(韶南歌曲選集)》&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시조창연구(時調唱硏究)》&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71년 《소남가곡선집》&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72년 《한국음악선집 제1집 태평가》&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89년 《이주환 가곡 가사 전집》&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lt;br /&gt;
* 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lt;br /&gt;
* 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lt;br /&gt;
* 김우진, 소남 가곡의 전승과 의의, 『한국음악연구』 54집, 2013.&lt;br /&gt;
* 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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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복길(주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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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이주환.jpg|150px|오른쪽|이주환]]&lt;br /&gt;
=='''개요'''==&lt;br /&gt;
이주환(李珠煥, 소남(韶南), 1909~1972)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이주환(李珠煥)&lt;br /&gt;
* 아호 = 소남(韶南)&lt;br /&gt;
* 전공 = 피리&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09-1972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lt;br /&gt;
이주환은 원래 이복길이었으나 이주환으로 개명하였고, 국악계에는 이주환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딸인 이재경의 회고록을 보면 &amp;quot;아버지는 무엇인가 항상 열심히 하고 계셨다. 어린 나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가의 보존과 후진 양성이라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amp;quot;&amp;lt;ref&amp;gt;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66쪽&amp;lt;/ref&amp;gt;라고 적혀있듯이 그는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정가보존&amp;lt;/b&amp;gt;&amp;lt;/font&amp;gt;과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국악교육&amp;lt;/b&amp;gt;&amp;lt;/font&amp;gt;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광복이후 제도의 미비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국악의 근근히 명백만 이어져 오고 있을 때,&amp;lt;ref&amp;gt;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28쪽&amp;lt;/ref&amp;gt; [[성경린)]]과 함께 해방직후 '雅樂部國營에 關한 請願'을 제출하였다. 그리고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그의 노력이 없었으면 우리나라의 국립국악기관인 국립국악원의 맥이 끊겼을 것이다. 또한 그는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라는 필요성&amp;lt;ref&amp;gt;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20쪽&amp;lt;/ref&amp;gt;으로 1955년 국악사양성소가 설립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에서 피리를 전공했지만, 피리보다 정가 전승에 공헌을 하였다.&amp;lt;ref&amp;gt;김우진, 소남 가곡의 전승과 의의, 『한국음악연구』 54집, 2013, 32쪽&amp;lt;/ref&amp;gt; [[성경린]], 이병기와 함께 시조연구회를 결성하였으며, 그가 가곡보와 가사보를 편찬하였다. 그가 만든 악보는 교육현장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성악곡 교재로 가장 먼저 편찬된 것이었다.&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52쪽&amp;lt;/ref&amp;gt; 다른 전공에 비해 정가와 관련하여 전승되는 문헌은 그가 남긴 업적이 거의 유일하다. 그의 가곡보와 가사보가 없었더라면 정가의 맥은 끊겼을 수도 있다. 그의 활동을 통해 정가의 맥은 물론 국악의 맥도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37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46년 구왕궁 아악부 아악사장&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초대원장&lt;br /&gt;
* 1951년 국악사양성소 초대소장 &lt;br /&gt;
*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 가곡 보유자 지정&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보유자 지정&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고금시조선(古今時調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9년 《가곡보(歌曲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0년 《가사보(歌詞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2년 《속가곡보(續歌曲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소남가곡선집(韶南歌曲選集)》&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시조창연구(時調唱硏究)》&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71년 《소남가곡선집》&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72년 《한국음악선집 제1집 태평가》&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89년 《이주환 가곡 가사 전집》&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lt;br /&gt;
* 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lt;br /&gt;
* 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lt;br /&gt;
* 김우진, 소남 가곡의 전승과 의의, 『한국음악연구』 54집, 2013.&lt;br /&gt;
* 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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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복길(주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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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11:55:2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이주환.jpg|150px|오른쪽|이주환]]&lt;br /&gt;
=='''개요'''==&lt;br /&gt;
이주환(李珠煥, 소남(韶南), 1909~1972)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이주환(李珠煥)&lt;br /&gt;
* 아호 = 소남(韶南)&lt;br /&gt;
* 전공 = 피리&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09-1972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lt;br /&gt;
이주환은 원래 이복길이었으나 이주환으로 개명하였고, 국악계에는 이주환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딸인 이재경의 회고록을 보면 &amp;quot;아버지는 무엇인가 항상 열심히 하고 계셨다. 어린 나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가의 보존과 후진 양성이라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amp;quot;&amp;lt;ref&amp;gt;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66쪽&amp;lt;/ref&amp;gt;라고 적혀있듯이 그는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정가보존&amp;lt;/b&amp;gt;&amp;lt;/font&amp;gt;과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국악교육&amp;lt;/b&amp;gt;&amp;lt;/font&amp;gt;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광복이후 제도의 미비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국악의 근근히 명백만 이어져 오고 있을 때,&amp;lt;ref&amp;gt;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28쪽&amp;lt;/ref&amp;gt; [[성경린)]]과 함께 해방직후 '雅樂部國營에 關한 請願'을 제출하였다. 그리고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그의 노력이 없었으면 우리나라의 국립국악기관인 국립국악원의 맥이 끊겼을 것이다. 또한 그는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라는 필요성&amp;lt;ref&amp;gt;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20쪽&amp;lt;/ref&amp;gt;으로 1955년 국악사양성소가 설립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에서 피리를 전공했지만, 피리보다 정가 전승에 공헌을 하였다.&amp;lt;ref&amp;gt;김우진, 소남 가곡의 전승과 의의, 『한국음악연구』 54집, 2013, 32쪽&amp;lt;/ref&amp;gt; [[성경린]], 이병기와 함께 시조연구회를 결성하였으며, 그가 가곡보와 가사보를 편찬하였다. 그가 만든 악보는 교육현장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성악곡 교재로 가장 먼저 편찬된 것이었다.&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52쪽&amp;lt;/ref&amp;gt; 다른 전공에 비해 정가와 관련하여 전승되는 문헌은 그가 남긴 업적이 거의 유일하다. 그의 가곡보와 가사보가 없었더라면 정가의 맥은 끊겼을 수도 있다. 그의 활동을 통해 정가의 맥은 물론 국악의 맥도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37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46년 구왕궁 아악부 아악사장&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초대원장&lt;br /&gt;
* 1951년 국악사양성소 초대소장 &lt;br /&gt;
*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 가곡 보유자 지정&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보유자 지정&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고금시조선(古今時調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9년 《가곡보(歌曲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0년 《가사보(歌詞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2년 《속가곡보(續歌曲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소남가곡선집(韶南歌曲選集)》&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시조창연구(時調唱硏究)》&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71년 《소남가곡선집》&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72년 《한국음악선집 제1집 태평가》&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89년 《이주환 가곡 가사 전집》&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lt;br /&gt;
* 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lt;br /&gt;
* 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lt;br /&gt;
* 이동 ↑ 김우진, 소남 가곡의 전승과 의의, 『한국음악연구』 54집, 2013.&lt;br /&gt;
* 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B4%EB%B3%B5%EA%B8%B8(%EC%A3%BC%ED%99%98)</id>
		<title>이복길(주환)</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B4%EB%B3%B5%EA%B8%B8(%EC%A3%BC%ED%99%98)"/>
				<updated>2017-06-26T11:54:0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이주환.jpg|150px|오른쪽|이주환]]&lt;br /&gt;
=='''개요'''==&lt;br /&gt;
이주환(李珠煥, 소남(韶南), 1909~1972)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이주환(李珠煥)&lt;br /&gt;
* 아호 = 소남(韶南)&lt;br /&gt;
* 전공 = 피리&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09-1972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lt;br /&gt;
이주환은 원래 이복길이었으나 이주환으로 개명하였고, 국악계에는 이주환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딸인 이재경의 회고록을 보면 &amp;quot;아버지는 무엇인가 항상 열심히 하고 계셨다. 어린 나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가의 보존과 후진 양성이라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amp;quot;&amp;lt;ref&amp;gt;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66쪽&amp;lt;/ref&amp;gt;라고 적혀있듯이 그는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정가보존&amp;lt;/b&amp;gt;&amp;lt;/font&amp;gt;과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국악교육&amp;lt;/b&amp;gt;&amp;lt;/font&amp;gt;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광복이후 제도의 미비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국악의 근근히 명백만 이어져 오고 있을 때,&amp;lt;ref&amp;gt;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28쪽&amp;lt;/ref&amp;gt; [[성경린)]]과 함께 해방직후 '雅樂部國營에 關한 請願'을 제출하였다. 그리고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그의 노력이 없었으면 우리나라의 국립국악기관인 국립국악원의 맥이 끊겼을 것이다. 또한 그는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라는 필요성&amp;lt;ref&amp;gt;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20쪽&amp;lt;/ref&amp;gt;으로 1955년 국악사양성소가 설립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에서 피리를 전공했지만, 피리보다 정가 전승에 공헌을 하였다.&amp;lt;ref&amp;gt;김우진, 소남 가곡의 전승과 의의, 『한국음악연구』 54집, 2013, 32쪽&amp;lt;/ref&amp;gt; [[성경린]], 이병기와 함께 시조연구회를 결성하였으며, 그가 가곡보와 가사보를 편찬하였다. 그가 만든 악보는 교육현장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성악곡 교재로 가장 먼저 편찬된 것이었다.&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52쪽&amp;lt;/ref&amp;gt; 다른 전공에 비해 정가와 관련하여 전승되는 문헌은 그가 남긴 업적이 거의 유일하다. 그의 가곡보와 가사보가 없었더라면 정가의 맥은 끊겼을 수도 있다. 그의 활동을 통해 정가의 맥은 물론 국악의 맥도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37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46년 구왕궁 아악부 아악사장&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초대원장&lt;br /&gt;
* 1951년 국악사양성소 초대소장 &lt;br /&gt;
*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 가곡 보유자 지정&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보유자 지정&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고금시조선(古今時調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9년 《가곡보(歌曲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0년 《가사보(歌詞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2년 《속가곡보(續歌曲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소남가곡선집(韶南歌曲選集)》&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시조창연구(時調唱硏究)》&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71년 《소남가곡선집》&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72년 《한국음악선집 제1집 태평가》&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89년 《이주환 가곡 가사 전집》&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B4%EB%B3%B5%EA%B8%B8(%EC%A3%BC%ED%99%98)</id>
		<title>이복길(주환)</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B4%EB%B3%B5%EA%B8%B8(%EC%A3%BC%ED%99%98)"/>
				<updated>2017-06-26T11:53: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이주환.jpg|150px|오른쪽|이주환]]&lt;br /&gt;
=='''개요'''==&lt;br /&gt;
이주환(李珠煥, 소남(韶南), 1909~1972)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이주환(李珠煥)&lt;br /&gt;
* 아호 = 소남(韶南)&lt;br /&gt;
* 전공 = 피리&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09-1972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lt;br /&gt;
이주환은 원래 이복길이었으나 이주환으로 개명하였고, 국악계에는 이주환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딸인 이재경의 회고록을 보면 &amp;quot;아버지는 무엇인가 항상 열심히 하고 계셨다. 어린 나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가의 보존과 후진 양성이라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amp;quot;&amp;lt;ref&amp;gt;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66쪽&amp;lt;/ref&amp;gt;라고 적혀있듯이 그는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정가보존&amp;lt;/b&amp;gt;&amp;lt;/font&amp;gt;과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국악교육&amp;lt;/b&amp;gt;&amp;lt;/font&amp;gt;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광복이후 제도의 미비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국악의 근근히 명백만 이어져 오고 있을 때,&amp;lt;ref&amp;gt;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28쪽&amp;lt;/ref&amp;gt; [[성경린)]]과 함께 해방직후 '雅樂部國營에 關한 請願'을 제출하였다. 그리고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그의 노력이 없었으면 우리나라의 국립국악기관인 국립국악원의 맥이 끊겼을 것이다. 또한 그는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라는 필요성&amp;lt;ref&amp;gt;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20쪽&amp;lt;/ref&amp;gt;으로 1955년 국악사양성소가 설립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에서 피리를 전공했지만, 피리보다 정가 전승에 공헌을 하였다.&amp;lt;ref&amp;gt;김우진, 소남 가곡의 전승과 의의, 『한국음악연구』 54집, 2013, 32쪽&amp;lt;/ref&amp;gt; [[성경린]], 이병기와 함께 시조연구회를 결성하였으며, 그가 가곡보와 가사보를 편찬하였다. 그가 만든 악보는 교육현장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성악곡 교재로 가장 먼저 편찬된 것이었다.&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52쪽&amp;lt;/ref&amp;gt; 다른 전공에 비해 정가와 관련하여 전승되는 문헌은 그가 남긴 업적이 거의 유일하다. 그의 가곡보와 가사보가 없었더라면 정가의 맥은 끊겼을 수도 있다. 그의 활동을 통해 정가의 맥은 물론 국악의 맥도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37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46년 구왕궁 아악부 아악사장&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초대원장&lt;br /&gt;
* 1951년 국악사양성소 초대소장 &lt;br /&gt;
*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 가곡 보유자 지정&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보유자 지정&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고금시조선(古今時調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9년 《가곡보(歌曲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0년 《가사보(歌詞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2년 《속가곡보(續歌曲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소남가곡선집(韶南歌曲選集)》&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시조창연구(時調唱硏究)》&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71년 《소남가곡선집》&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72년 《한국음악선집 제1집 태평가》&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89년 《이주환 가곡 가사 전집》&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B4%EB%B3%B5%EA%B8%B8(%EC%A3%BC%ED%99%98)</id>
		<title>이복길(주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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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11:52:4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이주환.jpg|150px|오른쪽|이주환]]&lt;br /&gt;
=='''개요'''==&lt;br /&gt;
이주환(李珠煥, 소남(韶南), 1909~1972)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이주환(李珠煥)&lt;br /&gt;
* 아호 = 소남(韶南)&lt;br /&gt;
* 전공 = 피리&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09-1972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lt;br /&gt;
이주환은 원래 이복길이었으나 이주환으로 개명하였고, 국악계에는 이주환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딸인 이재경의 회고록을 보면 &amp;quot;아버지는 무엇인가 항상 열심히 하고 계셨다. 어린 나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가의 보존과 후진 양성이라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amp;quot;&amp;lt;ref&amp;gt;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66쪽&amp;lt;/ref&amp;gt;라고 적혀있듯이 그는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정가보존&amp;lt;/b&amp;gt;&amp;lt;/font&amp;gt;과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국악교육&amp;lt;/b&amp;gt;&amp;lt;/font&amp;gt;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광복이후 제도의 미비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국악의 근근히 명백만 이어져 오고 있을 때,&amp;lt;ref&amp;gt;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28쪽&amp;lt;/ref&amp;gt; [[성경린)]]과 함께 해방직후 '雅樂部國營에 關한 請願'을 제출하였다. 그리고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그의 노력이 없었으면 우리나라의 국립국악기관인 국립국악원의 맥이 끊겼을 것이다. 또한 그는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라는 필요성&amp;lt;ref&amp;gt;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20쪽&amp;lt;/ref&amp;gt;으로 1955년 국악사양성소가 설립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에서 피리를 전공했지만, 피리보다 정가 전승에 공헌을 하였다.&amp;lt;ref&amp;gt;김우진, 소남 가곡의 전승과 의의, 『한국음악연구』 54집, 2013, 32쪽&amp;lt;/ref&amp;gt; [[성경린]], 이병기와 함께 시조연구회를 결성하였으며, 그가 가곡보와 가사보를 편찬하였다. 그가 만든 악보는 교육현장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성악곡 교재로 가장 먼저 편찬된 것이었다.&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52쪽&amp;lt;/ref&amp;gt; 다른 전공에 비해 정가와 관련하여 전승되는 문헌은 그가 남긴 업적이 거의 유일하다. 그의 가곡보와 가사보가 없었더라면 정가의 맥은 끊겼을 수도 있다. 그의 활동을 통해 정가의 맥은 물론 국악의 맥도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국립국악원 초대 원장으로 있으면서 국악사양성소를 부설, 국악교육을 실시하고 초대 소장을 겸하면서 시조창의 보급을 위하여 아악부에 월례시조강습회를 개설하고 이어 성경린(成慶麟), 이병기(李秉岐)등과 함께 시조연구회를 창설하였다.&lt;br /&gt;
원래 전공은 피리였으나, 하규일(河圭一)에게 가곡·가사·시조를 배워 일가를 이루어 1969년과 1971년 가곡·가사의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lt;br /&gt;
1954년 예술원 회원이 되고, 1962년 국립국악원 고문,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인 가곡기능보유자, 1971년 동 제41호인 가사보유자로 지정되고, 1956년 국악상, 1958년 서울시문화상, 1968년 대통령표창장 등을 받았다. &lt;br /&gt;
그는 매달 정례 시조 강습을 가져 국악인구의 저변확대에 노력하는 등 정가의 전수와 보급을 위해 혁혁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37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46년 구왕궁 아악부 아악사장&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초대원장&lt;br /&gt;
* 1951년 국악사양성소 초대소장 &lt;br /&gt;
*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 가곡 보유자 지정&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보유자 지정&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고금시조선(古今時調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9년 《가곡보(歌曲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0년 《가사보(歌詞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2년 《속가곡보(續歌曲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소남가곡선집(韶南歌曲選集)》&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시조창연구(時調唱硏究)》&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71년 《소남가곡선집》&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72년 《한국음악선집 제1집 태평가》&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89년 《이주환 가곡 가사 전집》&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B1%EA%B2%BD%EB%A6%B0</id>
		<title>성경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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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11:20: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성경린.jpg|150px|오른쪽|성경린]]&lt;br /&gt;
=='''개요'''==&lt;br /&gt;
성경린(成慶麟, 관제, 1911.9.18~2008.3.5)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성경린(成慶麟)&lt;br /&gt;
* 아호 = 관제&lt;br /&gt;
* 전공 = 거문고&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1-2008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amp;lt;ref&amp;gt;[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080306/8552055/1#csidx1a0490c79a33a9a82e1bcc47f8d50ec 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 동아일보 2008년 3월 6일자&amp;lt;/ref&amp;gt; 그의 자서전의 제목도 '노을에 띄운 가락'으로 그는 평생을 풍류정신으로 무장하여 국악과 함께 살았다. 그의 회고록의 제목인 '다시 태어나도 아악&amp;lt;ref&amp;gt;당시 현재의 국악을 아악이라고 지칭하였다.&amp;lt;/ref&amp;gt;의 길로'라는 제목을 보아 그의 국악에 대한 열정과 업적이 느껴진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어느날 친척한분이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시험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집이 가난하여 상급학교에 갈 수 없었고, 이 학교에서 아는바가 없었지만 공부를 공짜로 시켜주고, 게다가 돈까지 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시험을 치뤘다고 한다.&amp;lt;ref&amp;gt;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50쪽&amp;lt;/ref&amp;gt; 그러한 계기로 아악의 길로 들어온 그는 한 평생 국악을 위해 인생을 바치셨다. 광복 후 국악의 단절 위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국악보급&amp;lt;/b&amp;gt;&amp;lt;/font&amp;gt;를 통해 국악이 전승되도록 힘썼다. 해방직후 이왕직아악부는 구왕궁아악부로 바뀌었고, 당시 당국의 제도의 미비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근근히 명백만 이어져 오고 있었다.&amp;lt;ref&amp;gt;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28쪽&amp;lt;/ref&amp;gt; [[이복길(주환)]]과 함께 해방직후 '雅樂部國營에 關한 請願'을 제출하였고,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또한 동시에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라는 필요성&amp;lt;ref&amp;gt;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20쪽&amp;lt;/ref&amp;gt;으로 1955년 국악사양성소가 설립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문교부 편수국에 들어가 교과서 편찬의 일을 맡았고, 중앙방송국에서 국악감상 프로그램의 해설자로 활동&amp;lt;ref&amp;gt;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70쪽&amp;lt;/ref&amp;gt; 하였다. 그 밖에 시조강습회를 통해 국악을 보급하였고, 이혜구 등과 더불어 한국국악학회를 1949년에 창설&amp;lt;ref&amp;gt;황준연, 성경린 거문고를 가르치며 국악을 지키고 가꾸다, 『한국사 시민강좌』40권, 2012, 362쪽&amp;lt;/ref&amp;gt; 하였다. 그가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시절 선생으로부터 &amp;quot;항상 빈자리는 생기게 마련인거야. 앞이 겹겹이 막혔다고 꿈을 중도에서 꺾거나 괴로와할 필요가 없더군&amp;quot;&amp;lt;ref&amp;gt;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2), 64쪽&amp;lt;/ref&amp;gt;라는 말을 듣고, 항상 이 말을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자란 그는 노후에 본인 스스로가 훌륭한 스승이 되어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고, 그가 걸었던 국악의 길을 현재 많은 국악전공자들이 걷고 있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45년 구왕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50년 국립국악원 악사장&lt;br /&gt;
* 1950년 국악사양성소 부소장&lt;br /&gt;
*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 1961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61년 국악사양성소 소장&lt;br /&gt;
* 1972년 국립국악고등학교 초대교장&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의 아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음악독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수상집 雅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조선의 민요》&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설》&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의 무용》&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음악논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국악감상》&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8년 《나의 人生觀: 노을에 띄운 가락》&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9년 《韓國傳統舞踊》&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85년 《世宗時代의 音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2000년 《국악학논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lt;br /&gt;
*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lt;br /&gt;
* 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 『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lt;br /&gt;
*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lt;br /&gt;
*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2),『한국음악사학보』제18집, 1997.&lt;br /&gt;
* 황준연, 성경린 거문고를 가르치며 국악을 지키고 가꾸다, 『한국사 시민강좌』 40권, 2012 &lt;br /&gt;
* 성경린 선생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 동아일보 2008년 3월 6일자&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B1%EA%B2%BD%EB%A6%B0</id>
		<title>성경린</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B1%EA%B2%BD%EB%A6%B0"/>
				<updated>2017-06-26T11:20: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성경린.jpg|150px|오른쪽|성경린]]&lt;br /&gt;
=='''개요'''==&lt;br /&gt;
성경린(成慶麟, 관제, 1911.9.18~2008.3.5)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성경린(成慶麟)&lt;br /&gt;
* 아호 = 관제&lt;br /&gt;
* 전공 = 거문고&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1-2008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amp;lt;ref&amp;gt;[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080306/8552055/1#csidx1a0490c79a33a9a82e1bcc47f8d50ec 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 동아일보 2008년 3월 6일자&amp;lt;/ref&amp;gt; 그의 자서전의 제목도 '노을에 띄운 가락'으로 그는 평생을 풍류정신으로 무장하여 국악과 함께 살았다. 그의 회고록의 제목인 '다시 태어나도 아악&amp;lt;ref&amp;gt;당시 현재의 국악을 아악이라고 지칭하였다.&amp;lt;/ref&amp;gt;의 길로'라는 제목을 보아 그의 국악에 대한 열정과 업적이 느껴진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어느날 친척한분이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시험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집이 가난하여 상급학교에 갈 수 없었고, 이 학교에서 아는바가 없었지만 공부를 공짜로 시켜주고, 게다가 돈까지 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시험을 치뤘다고 한다.&amp;lt;ref&amp;gt;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50쪽&amp;lt;/ref&amp;gt; 그러한 계기로 아악의 길로 들어온 그는 한 평생 국악을 위해 인생을 바치셨다. 광복 후 국악의 단절 위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국악보급&amp;lt;/b&amp;gt;&amp;lt;/font&amp;gt;를 통해 국악이 전승되도록 힘썼다. 해방직후 이왕직아악부는 구왕궁아악부로 바뀌었고, 당시 당국의 제도의 미비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근근히 명백만 이어져 오고 있었다.&amp;lt;ref&amp;gt;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28쪽&amp;lt;/ref&amp;gt; [[이복길(주환)]]과 함께 해방직후 '雅樂部國營에 關한 請願'을 제출하였고,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또한 동시에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라는 필요성&amp;lt;ref&amp;gt;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20쪽&amp;lt;/ref&amp;gt;으로 1955년 국악사양성소가 설립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문교부 편수국에 들어가 교과서 편찬의 일을 맡았고, 중앙방송국에서 국악감상 프로그램의 해설자로 활동&amp;lt;ref&amp;gt;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70쪽&amp;lt;/ref&amp;gt; 하였다. 그 밖에 시조강습회를 통해 국악을 보급하였고, 이혜구 등과 더불어 한국국악학회를 1949년에 창설&amp;lt;ref&amp;gt;황준연, 성경린 거문고를 가르치며 국악을 지키고 가꾸다, 『한국사 시민강좌』40권, 2012, 362쪽&amp;lt;/ref&amp;gt; 하였다. 그가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시절 선생으로부터 &amp;quot;항상 빈자리는 생기게 마련인거야. 앞이 겹겹이 막혔다고 꿈을 중도에서 꺾거나 괴로와할 필요가 없더군&amp;quot;&amp;lt;ref&amp;gt;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2), 64쪽&amp;lt;/ref&amp;gt;라는 말을 듣고, 항상 이 말을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자란 그는 노후에 본인 스스로가 훌륭한 스승이 되어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고, 그가 걸었던 국악의 길을 현재 많은 국악전공자들이 걷고 있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45년 구왕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50년 국립국악원 악사장&lt;br /&gt;
* 1950년 국악사양성소 부소장&lt;br /&gt;
*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 1961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61년 국악사양성소 소장&lt;br /&gt;
* 1972년 국립국악고등학교 초대교장&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의 아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음악독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수상집 雅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조선의 민요》&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설》&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의 무용》&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음악논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국악감상》&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8년 《나의 人生觀: 노을에 띄운 가락》&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9년 《韓國傳統舞踊》&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85년 《世宗時代의 音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2000년 《국악학논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lt;br /&gt;
* 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 『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lt;br /&gt;
*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lt;br /&gt;
*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2),『한국음악사학보』제18집, 1997.&lt;br /&gt;
* 황준연, 성경린 거문고를 가르치며 국악을 지키고 가꾸다, 『한국사 시민강좌』 40권, 2012 &lt;br /&gt;
* 성경린 선생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 동아일보 2008년 3월 6일자&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B1%EA%B2%BD%EB%A6%B0</id>
		<title>성경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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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11:19:2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성경린.jpg|150px|오른쪽|성경린]]&lt;br /&gt;
=='''개요'''==&lt;br /&gt;
성경린(成慶麟, 관제, 1911.9.18~2008.3.5)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성경린(成慶麟)&lt;br /&gt;
* 아호 = 관제&lt;br /&gt;
* 전공 = 거문고&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1-2008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amp;lt;ref&amp;gt;[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080306/8552055/1#csidx1a0490c79a33a9a82e1bcc47f8d50ec 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 동아일보 2008년 3월 6일자&amp;lt;/ref&amp;gt; 그의 자서전의 제목도 '노을에 띄운 가락'으로 그는 평생을 풍류정신으로 무장하여 국악과 함께 살았다. 그의 회고록의 제목인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라는 제목을 보아 그의 국악에 대한 열정과 업적이 느껴진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어느날 친척한분이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시험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집이 가난하여 상급학교에 갈 수 없었고, 이 학교에서 아는바가 없었지만 공부를 공짜로 시켜주고, 게다가 돈까지 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시험을 치뤘다고 한다.&amp;lt;ref&amp;gt;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50쪽&amp;lt;/ref&amp;gt; 그러한 계기로 아악의 길로 들어온 그는 한 평생 국악을 위해 인생을 바치셨다. 광복 후 국악의 단절 위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국악보급&amp;lt;/b&amp;gt;&amp;lt;/font&amp;gt;를 통해 국악이 전승되도록 힘썼다. 해방직후 이왕직아악부는 구왕궁아악부로 바뀌었고, 당시 당국의 제도의 미비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근근히 명백만 이어져 오고 있었다.&amp;lt;ref&amp;gt;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28쪽&amp;lt;/ref&amp;gt; [[이복길(주환)]]과 함께 해방직후 '雅樂部國營에 關한 請願'을 제출하였고,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또한 동시에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라는 필요성&amp;lt;ref&amp;gt;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20쪽&amp;lt;/ref&amp;gt;으로 1955년 국악사양성소가 설립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문교부 편수국에 들어가 교과서 편찬의 일을 맡았고, 중앙방송국에서 국악감상 프로그램의 해설자로 활동&amp;lt;ref&amp;gt;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70쪽&amp;lt;/ref&amp;gt; 하였다. 그 밖에 시조강습회를 통해 국악을 보급하였고, 이혜구 등과 더불어 한국국악학회를 1949년에 창설&amp;lt;ref&amp;gt;황준연, 성경린 거문고를 가르치며 국악을 지키고 가꾸다, 『한국사 시민강좌』40권, 2012, 362쪽&amp;lt;/ref&amp;gt; 하였다. 그가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시절 선생으로부터 &amp;quot;항상 빈자리는 생기게 마련인거야. 앞이 겹겹이 막혔다고 꿈을 중도에서 꺾거나 괴로와할 필요가 없더군&amp;quot;&amp;lt;ref&amp;gt;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2), 64쪽&amp;lt;/ref&amp;gt;라는 말을 듣고, 항상 이 말을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자란 그는 노후에 본인 스스로가 훌륭한 스승이 되어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고, 그가 걸었던 아악의 길을 현재 많은 국악전공자들이 걷고 있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45년 구왕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50년 국립국악원 악사장&lt;br /&gt;
* 1950년 국악사양성소 부소장&lt;br /&gt;
*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 1961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61년 국악사양성소 소장&lt;br /&gt;
* 1972년 국립국악고등학교 초대교장&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의 아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음악독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수상집 雅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조선의 민요》&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설》&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의 무용》&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음악논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국악감상》&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8년 《나의 人生觀: 노을에 띄운 가락》&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9년 《韓國傳統舞踊》&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85년 《世宗時代의 音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2000년 《국악학논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lt;br /&gt;
* 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 『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lt;br /&gt;
*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lt;br /&gt;
*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2),『한국음악사학보』제18집, 1997.&lt;br /&gt;
* 황준연, 성경린 거문고를 가르치며 국악을 지키고 가꾸다, 『한국사 시민강좌』 40권, 2012 &lt;br /&gt;
* 성경린 선생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 동아일보 2008년 3월 6일자&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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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경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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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11:15: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성경린.jpg|150px|오른쪽|성경린]]&lt;br /&gt;
=='''개요'''==&lt;br /&gt;
성경린(成慶麟, 관제, 1911.9.18~2008.3.5)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성경린(成慶麟)&lt;br /&gt;
* 아호 = 관제&lt;br /&gt;
* 전공 = 거문고&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1-2008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amp;lt;ref&amp;gt;[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080306/8552055/1#csidx1a0490c79a33a9a82e1bcc47f8d50ec 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 동아일보 2008년 3월 6일자&amp;lt;/ref&amp;gt; 그의 자서전의 제목도 '노을에 띄운 가락'으로 그는 평생을 풍류정신으로 무장하여 국악과 함께 살았다. 그의 회고록의 제목인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라는 제목을 보아 그의 국악에 대한 열정과 업적이 느껴진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어느날 친척한분이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시험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집이 가난하여 상급학교에 갈 수 없었고, 이 학교에서 아는바가 없었지만 공부를 공짜로 시켜주고, 게다가 돈까지 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시험을 치뤘다고 한다.&amp;lt;ref&amp;gt;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50쪽&amp;lt;/ref&amp;gt; 그러한 계기로 아악의 길로 들어온 그는 한 평생 국악을 위해 인생을 바치셨다. 광복 후 국악의 단절 위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국악보급&amp;lt;/b&amp;gt;&amp;lt;/font&amp;gt;를 통해 국악이 전승되도록 힘썼다. 해방직후 이왕직아악부는 구왕궁아악부로 바뀌었고, 당시 당국의 제도의 미비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근근히 명백만 이어져 오고 있었다.&amp;lt;ref&amp;gt;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28쪽&amp;lt;/ref&amp;gt; [[이복길(주환)]]과 함께 해방직후 '雅樂部國營에 關한 請願'을 제출하였고,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또한 동시에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라는 필요성&amp;lt;ref&amp;gt;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20쪽&amp;lt;/ref&amp;gt;으로 1955년 국악사양성소가 설립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밖에 시조강습회를 통해 국악을 보급하였고, 이혜구 등과 더불어 한국국악학회를 1949년에 창설&amp;lt;ref&amp;gt;황준연, 성경린 거문고를 가르치며 국악을 지키고 가꾸다, 『한국사 시민강좌』40권, 2012, 362쪽&amp;lt;/ref&amp;gt; 하였다. 그가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시절 선생으로부터 &amp;quot;항상 빈자리는 생기게 마련인거야. 앞이 겹겹이 막혔다고 꿈을 중도에서 꺾거나 괴로와할 필요가 없더군&amp;quot;&amp;lt;ref&amp;gt;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2), 64쪽&amp;lt;/ref&amp;gt;라는 말을 듣고, 항상 이 말을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자란 그는 노후에 본인 스스로가 훌륭한 스승이 되어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고, 그가 걸었던 아악의 길을 현재 많은 국악전공자들이 걷고 있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45년 구왕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50년 국립국악원 악사장&lt;br /&gt;
* 1950년 국악사양성소 부소장&lt;br /&gt;
*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 1961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61년 국악사양성소 소장&lt;br /&gt;
* 1972년 국립국악고등학교 초대교장&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의 아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음악독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수상집 雅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조선의 민요》&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설》&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의 무용》&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음악논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국악감상》&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8년 《나의 人生觀: 노을에 띄운 가락》&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9년 《韓國傳統舞踊》&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85년 《世宗時代의 音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2000년 《국악학논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lt;br /&gt;
* 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 『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lt;br /&gt;
*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lt;br /&gt;
*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2),『한국음악사학보』제18집, 1997.&lt;br /&gt;
* 황준연, 성경린 거문고를 가르치며 국악을 지키고 가꾸다, 『한국사 시민강좌』 40권, 2012 &lt;br /&gt;
* 성경린 선생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 동아일보 2008년 3월 6일자&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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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경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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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11:14:4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성경린.jpg|150px|오른쪽|성경린]]&lt;br /&gt;
=='''개요'''==&lt;br /&gt;
성경린(成慶麟, 관제, 1911.9.18~2008.3.5)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성경린(成慶麟)&lt;br /&gt;
* 아호 = 관제&lt;br /&gt;
* 전공 = 거문고&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1-2008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amp;lt;ref&amp;gt;[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080306/8552055/1#csidx1a0490c79a33a9a82e1bcc47f8d50ec 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 동아일보 2008년 3월 6일자&amp;lt;/ref&amp;gt; 그의 자서전의 제목도 '노을에 띄운 가락'으로 그는 평생을 풍류정신으로 무장하여 국악과 함께 살았다. 그의 회고록의 제목인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라는 제목을 보아 그의 국악에 대한 열정과 업적이 느껴진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어느날 친척한분이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시험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집이 가난하여 상급학교에 갈 수 없었고, 이 학교에서 아는바가 없었지만 공부를 공짜로 시켜주고, 게다가 돈까지 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시험을 치뤘다고 한다.&amp;lt;ref&amp;gt;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50쪽&amp;lt;/ref&amp;gt; 그러한 계기로 아악의 길로 들어온 그는 한 평생 국악을 위해 인생을 바치셨다. 광복 후 국악의 단절 위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국악보급&amp;lt;/b&amp;gt;&amp;lt;/font&amp;gt;를 통해 국악이 전승되도록 힘썼다. 해방직후 이왕직아악부는 구왕궁아악부로 바뀌었고, 당시 당국의 제도의 미비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근근히 명백만 이어져 오고 있었다.&amp;lt;ref&amp;gt;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amp;lt;/ref&amp;gt; [[이복길(주환)]]과 함께 해방직후 '雅樂部國營에 關한 請願'을 제출하였고,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또한 동시에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라는 필요성&amp;lt;ref&amp;gt;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20쪽&amp;lt;/ref&amp;gt;으로 1955년 국악사양성소가 설립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밖에 시조강습회를 통해 국악을 보급하였고, 이혜구 등과 더불어 한국국악학회를 1949년에 창설&amp;lt;ref&amp;gt;황준연, 성경린 거문고를 가르치며 국악을 지키고 가꾸다, 『한국사 시민강좌』40권, 2012, 362쪽&amp;lt;/ref&amp;gt; 하였다. 그가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시절 선생으로부터 &amp;quot;항상 빈자리는 생기게 마련인거야. 앞이 겹겹이 막혔다고 꿈을 중도에서 꺾거나 괴로와할 필요가 없더군&amp;quot;&amp;lt;ref&amp;gt;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2), 64쪽&amp;lt;/ref&amp;gt;라는 말을 듣고, 항상 이 말을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자란 그는 노후에 본인 스스로가 훌륭한 스승이 되어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고, 그가 걸었던 아악의 길을 현재 많은 국악전공자들이 걷고 있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45년 구왕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50년 국립국악원 악사장&lt;br /&gt;
* 1950년 국악사양성소 부소장&lt;br /&gt;
*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 1961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61년 국악사양성소 소장&lt;br /&gt;
* 1972년 국립국악고등학교 초대교장&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의 아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음악독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수상집 雅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조선의 민요》&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설》&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의 무용》&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음악논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국악감상》&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8년 《나의 人生觀: 노을에 띄운 가락》&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9년 《韓國傳統舞踊》&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85년 《世宗時代의 音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2000년 《국악학논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lt;br /&gt;
* 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 『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lt;br /&gt;
*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lt;br /&gt;
*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2),『한국음악사학보』제18집, 1997.&lt;br /&gt;
* 황준연, 성경린 거문고를 가르치며 국악을 지키고 가꾸다, 『한국사 시민강좌』 40권, 2012 &lt;br /&gt;
* 성경린 선생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 동아일보 2008년 3월 6일자&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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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경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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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11:12: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성경린.jpg|150px|오른쪽|성경린]]&lt;br /&gt;
=='''개요'''==&lt;br /&gt;
성경린(成慶麟, 관제, 1911.9.18~2008.3.5)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성경린(成慶麟)&lt;br /&gt;
* 아호 = 관제&lt;br /&gt;
* 전공 = 거문고&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1-2008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amp;lt;ref&amp;gt;[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080306/8552055/1#csidx1a0490c79a33a9a82e1bcc47f8d50ec 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 동아일보 2008년 3월 6일자&amp;lt;/ref&amp;gt; 그의 자서전의 제목도 '노을에 띄운 가락'으로 그는 평생을 풍류정신으로 무장하여 국악과 함께 살았다. 그의 회고록의 제목인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라는 제목을 보아 그의 국악에 대한 열정과 업적이 느껴진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어느날 친척한분이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시험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집이 가난하여 상급학교에 갈 수 없었고, 이 학교에서 아는바가 없었지만 공부를 공짜로 시켜주고, 게다가 돈까지 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시험을 치뤘다고 한다.&amp;lt;ref&amp;gt;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50쪽&amp;lt;/ref&amp;gt; 그러한 계기로 아악의 길로 들어온 그는 한 평생 국악을 위해 인생을 바치셨다. 광복 후 국악의 단절 위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국악보급&amp;lt;/b&amp;gt;&amp;lt;/font&amp;gt;를 통해 국악이 전승되도록 힘썼다. 해방직후 이왕직아악부는 구왕궁아악부로 바뀌었고, 당시 당국의 제도의 미비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근근히 명백만 이어져 오고 있었다.&amp;lt;ref&amp;gt;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 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amp;lt;/ref&amp;gt; [[이복길(주환)]]과 함께 해방직후 '雅樂部國營에 關한 請願'을 제출하였고,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또한 동시에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라는 필요성&amp;lt;ref&amp;gt;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20쪽&amp;lt;/ref&amp;gt;으로 1955년 국악사양성소가 설립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밖에 시조강습회를 통해 국악을 보급하였고, 이혜구 등과 더불어 한국국악학회를 1949년에 창설&amp;lt;ref&amp;gt;황준연, 성경린 거문고를 가르치며 국악을 지키고 가꾸다, 한국사 시민강좌 40권, 2012&amp;lt;/ref&amp;gt; 하였다. 그가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시절 선생으로부터 &amp;quot;항상 빈자리는 생기게 마련인거야. 앞이 겹겹이 막혔다고 꿈을 중도에서 꺾거나 괴로와할 필요가 없더군&amp;quot;&amp;lt;ref&amp;gt;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2), 64쪽&amp;lt;/ref&amp;gt;라는 말을 듣고, 항상 이 말을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자란 그는 노후에 본인 스스로가 훌륭한 스승이 되어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고, 그가 걸었던 아악의 길을 현재 많은 국악전공자들이 걷고 있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45년 구왕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50년 국립국악원 악사장&lt;br /&gt;
* 1950년 국악사양성소 부소장&lt;br /&gt;
*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 1961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61년 국악사양성소 소장&lt;br /&gt;
* 1972년 국립국악고등학교 초대교장&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의 아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음악독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수상집 雅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조선의 민요》&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설》&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의 무용》&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음악논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국악감상》&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8년 《나의 人生觀: 노을에 띄운 가락》&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9년 《韓國傳統舞踊》&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85년 《世宗時代의 音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2000년 《국악학논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lt;br /&gt;
* 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 『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lt;br /&gt;
*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lt;br /&gt;
*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2),『한국음악사학보』제18집, 1997.&lt;br /&gt;
* 황준연, 성경린 거문고를 가르치며 국악을 지키고 가꾸다, 『한국사 시민강좌』 40권, 2012 &lt;br /&gt;
* 성경린 선생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 동아일보 2008년 3월 6일자&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B1%EA%B2%BD%EB%A6%B0</id>
		<title>성경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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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11:08: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성경린.jpg|150px|오른쪽|성경린]]&lt;br /&gt;
=='''개요'''==&lt;br /&gt;
성경린(成慶麟, 관제, 1911.9.18~2008.3.5)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성경린(成慶麟)&lt;br /&gt;
* 아호 = 관제&lt;br /&gt;
* 전공 = 거문고&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1-2008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amp;lt;ref&amp;gt;[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080306/8552055/1#csidx1a0490c79a33a9a82e1bcc47f8d50ec 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 동아일보 2008년 3월 6일자&amp;lt;/ref&amp;gt; 그의 자서전의 제목도 '노을에 띄운 가락'으로 그는 평생을 풍류정신으로 무장하여 국악과 함께 살았다. 그의 회고록의 제목인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라는 제목을 보아 그의 국악에 대한 열정과 업적이 느껴진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어느날 친척한분이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시험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집이 가난하여 상급학교에 갈 수 없었고, 이 학교에서 아는바가 없었지만 공부를 공짜로 시켜주고, 게다가 돈까지 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시험을 치뤘다고 한다.&amp;lt;ref&amp;gt;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50쪽&amp;lt;/ref&amp;gt; 그러한 계기로 아악의 길로 들어온 그는 한 평생 국악을 위해 인생을 바치셨다. 광복 후 국악의 단절 위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국악보급&amp;lt;/b&amp;gt;&amp;lt;/font&amp;gt;를 통해 국악이 전승되도록 힘썼다. 해방직후 이왕직아악부는 구왕궁아악부로 바뀌었고, 당시 당국의 제도의 미비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근근히 명백만 이어져 오고 있었다.&amp;lt;ref&amp;gt;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 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amp;lt;/ref&amp;gt; [[이복길(주환)]]과 함께 해방직후 '雅樂部國營에 關한 請願'을 제출하였고,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또한 동시에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라는 필요성&amp;lt;ref&amp;gt;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20쪽&amp;lt;/ref&amp;gt;으로 1955년 국악사양성소가 설립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밖에 시조강습회를 통해 국악을 보급하였고, 이혜구 등과 더불어 한국국악학회를 1949년에 창설&amp;lt;ref&amp;gt;황준연, 성경린 거문고를 가르치며 국악을 지키고 가꾸다, 한국사 시민강좌 40권, 2012&amp;lt;/ref&amp;gt; 하였다. 그가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시절 선생으로부터 &amp;quot;항상 빈자리는 생기게 마련인거야. 앞이 겹겹이 막혔다고 꿈을 중도에서 꺾거나 괴로와할 필요가 없더군&amp;quot;&amp;lt;ref&amp;gt;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2), 64쪽&amp;lt;/ref&amp;gt;라는 말을 듣고, 항상 이 말을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자란 그는 노후에 본인 스스로가 훌륭한 스승이 되어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고, 그가 걸었던 아악의 길을 현재 많은 국악전공자들이 걷고 있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45년 구왕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50년 국립국악원 악사장&lt;br /&gt;
* 1950년 국악사양성소 부소장&lt;br /&gt;
*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 1961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61년 국악사양성소 소장&lt;br /&gt;
* 1972년 국립국악고등학교 초대교장&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의 아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음악독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수상집 雅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조선의 민요》&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설》&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의 무용》&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음악논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국악감상》&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8년 《나의 人生觀: 노을에 띄운 가락》&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9년 《韓國傳統舞踊》&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85년 《世宗時代의 音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2000년 《국악학논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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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경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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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11:08: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성경린.jpg|150px|오른쪽|성경린]]&lt;br /&gt;
=='''개요'''==&lt;br /&gt;
성경린(成慶麟, 관제, 1911.9.18~2008.3.5)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성경린(成慶麟)&lt;br /&gt;
* 아호 = 관제&lt;br /&gt;
* 전공 = 거문고&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1-2008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amp;lt;ref&amp;gt;[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080306/8552055/1#csidx1a0490c79a33a9a82e1bcc47f8d50ec 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 동아일보 2008년 3월 6일자&amp;lt;/ref&amp;gt; 그의 자서전의 제목도 '노을에 띄운 가락'으로 그는 평생을 풍류정신으로 무장하여 국악과 함께 살았다. 그의 회고록의 제목인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라는 제목을 보아 그의 국악에 대한 열정과 업적이 느껴진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어느날 친척한분이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시험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집이 가난하여 상급학교에 갈 수 없었고, 이 학교에서 아는바가 없었지만 공부를 공짜로 시켜주고, 게다가 돈까지 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시험을 치뤘다고 한다.&amp;lt;ref&amp;gt;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50쪽&amp;lt;/ref&amp;gt; 그러한 계기로 아악의 길로 들어온 그는 한 평생 국악을 위해 인생을 바치셨다. 광복 후 국악의 단절 위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국악보급&amp;lt;/b&amp;gt;&amp;lt;/font&amp;gt;를 통해 국악이 전승되도록 힘썼다. 해방직후 이왕직아악부는 구왕궁아악부로 바뀌었고, 당시 당국의 제도의 미비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근근히 명백만 이어져 오고 있었다.&amp;lt;ref&amp;gt;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 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amp;lt;/ref&amp;gt; [[이복길(주환)]]과 함께 해방직후 '雅樂部國營에 關한 請願'을 제출하였고,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또한 동시에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라는 필요성&amp;lt;ref&amp;gt;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20쪽&amp;lt;/ref&amp;gt;으로 1955년 국악사양성소가 설립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밖에 시조강습회를 통해 국악을 보급하였고, 이혜구 등과 더불어 한국국악학회를 1949년에 창설&amp;lt;ref&amp;gt;황준연, 성경린 거문고를 가르치며 국악을 지키고 가꾸다, 한국사 시민강좌 40권, 2012&amp;lt;/ref&amp;gt; 하였다. 그가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시절 선생으로부터 &amp;quot;항상 빈자리는 생기게 마련인거야. 앞이 겹겹이 막혔다고 꿈을 중도에서 꺾거나 괴로와할 필요가 없더군&amp;quot;&amp;lt;ref&amp;gt;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2), 64쪽&amp;lt;/ref&amp;gt;라는 말을 듣고, 항상 이 말을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자란 그는 노후에 본인 스스로가 훌륭한 스승이 되어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고, 그가 걸었던 아악의 길을 현재 많은 국악전공자들이 걷고 있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45년 구왕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50년 국립국악원 악사장&lt;br /&gt;
* 1950년 국악사양성소 부소장&lt;br /&gt;
*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 1961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61년 국악사양성소 소장&lt;br /&gt;
* 1972년 국립국악고등학교 초대교장&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의 아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음악독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수상집 雅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조선의 민요》&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설》&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의 무용》&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음악논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국악감상》&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8년 《나의 人生觀: 노을에 띄운 가락》&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9년 《韓國傳統舞踊》&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85년 《世宗時代의 音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2000년 《국악학논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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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경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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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11:07: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성경린.jpg|150px|오른쪽|성경린]]&lt;br /&gt;
=='''개요'''==&lt;br /&gt;
성경린(成慶麟, 관제, 1911.9.18~2008.3.5)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성경린(成慶麟)&lt;br /&gt;
* 아호 = 관제&lt;br /&gt;
* 전공 = 거문고&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1-2008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amp;lt;ref&amp;gt;[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080306/8552055/1#csidx1a0490c79a33a9a82e1bcc47f8d50ec 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 동아일보 2008년 3월 6일자&amp;lt;/ref&amp;gt; 그의 자서전의 제목도 '노을에 띄운 가락'으로 그는 평생을 풍류정신으로 무장하여 국악과 함께 살았다. 그의 회고록의 제목인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라는 제목을 보아 그의 국악에 대한 열정과 업적이 느껴진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어느날 친척한분이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시험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집이 가난하여 상급학교에 갈 수 없었고, 이 학교에서 아는바가 없었지만 공부를 공짜로 시켜주고, 게다가 돈까지 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시험을 치뤘다고 한다.&amp;lt;ref&amp;gt;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50쪽&amp;lt;/ref&amp;gt; 그러한 계기로 아악의 길로 들어온 그는 한 평생 국악을 위해 인생을 바치셨다. 광복 후 국악의 단절 위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국악보급&amp;lt;/b&amp;gt;&amp;lt;/font&amp;gt;를 통해 국악이 전승되도록 힘썼다. 해방직후 이왕직아악부는 구왕궁아악부로 바뀌었고, 당시 당국의 제도의 미비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근근히 명백만 이어져 오고 있었다.&amp;lt;ref&amp;gt;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 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amp;lt;/ref&amp;gt; [[이복길(주환)]]과 함께 해방직후 '雅樂部國營에 關한 請願'을 제출하였고,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또한 동시에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라는 필요성&amp;lt;ref&amp;gt;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20쪽&amp;lt;/ref&amp;gt;으로 1955년 국악사양성소가 설립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밖에 시조강습회를 통해 국악을 보급하였고, 이혜구 등과 더불어 한국국악학회를 1949년에 창설&amp;lt;ref&amp;gt;황준연, 성경린 거문고를 가르치며 국악을 지키고 가꾸다, 한국사 시민강좌 40권, 2012&amp;lt;/ref&amp;gt; 하였다. 그가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시절 선생으로부터 &amp;quot;항상 빈자리는 생기게 마련인거야. 앞이 겹겹이 막혔다고 꿈을 중도에서 꺾거나 괴로와할 필요가 없더군&amp;quot;&amp;lt;ref&amp;gt;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2), 64쪽&amp;lt;/ref&amp;gt;라는 말을 듣고, 항상 이 말을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자란 그는 노후에 본인 스스로가 훌륭한 스승이 되어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고, 그가 걸었던 아악의 길을 현재 많은 국악전공자들이 걷고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45년 구왕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50년 국립국악원 악사장&lt;br /&gt;
* 1950년 국악사양성소 부소장&lt;br /&gt;
*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 1961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61년 국악사양성소 소장&lt;br /&gt;
* 1972년 국립국악고등학교 초대교장&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의 아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음악독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수상집 雅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조선의 민요》&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설》&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의 무용》&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음악논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국악감상》&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8년 《나의 人生觀: 노을에 띄운 가락》&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9년 《韓國傳統舞踊》&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85년 《世宗時代의 音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2000년 《국악학논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B1%EA%B2%BD%EB%A6%B0</id>
		<title>성경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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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11:05: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성경린.jpg|150px|오른쪽|성경린]]&lt;br /&gt;
=='''개요'''==&lt;br /&gt;
성경린(成慶麟, 관제, 1911.9.18~2008.3.5)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성경린(成慶麟)&lt;br /&gt;
* 아호 = 관제&lt;br /&gt;
* 전공 = 거문고&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1-2008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amp;lt;ref&amp;gt;[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080306/8552055/1#csidx1a0490c79a33a9a82e1bcc47f8d50ec 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 동아일보 2008년 3월 6일자&amp;lt;/ref&amp;gt; 그의 자서전의 제목도 '노을에 띄운 가락'으로 그는 평생을 풍류정신으로 무장하여 국악과 함께 살았다. 그의 회고록의 제목인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라는 제목을 보아 그의 국악에 대한 열정과 업적이 느껴진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어느날 친척한분이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시험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집이 가난하여 상급학교에 갈 수 없었고, 이 학교에서 아는바가 없었지만 공부를 공짜로 시켜주고, 게다가 돈까지 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시험을 치뤘다고 한다.&amp;lt;ref&amp;gt;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50쪽&amp;lt;/ref&amp;gt; 그러한 계기로 아악의 길로 들어온 그는 한 평생 국악을 위해 인생을 바치셨다. 광복 후 국악의 단절 위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amp;lt;font color='green'&amp;gt;&amp;lt;b&amp;gt;국악보급&amp;lt;/b&amp;gt;&amp;lt;/font&amp;gt;를 통해 국악이 전승되도록 힘썼다. 해방직후 이왕직아악부는 구왕궁아악부로 바뀌었고, 당시 당국의 제도의 미비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근근히 명백만 이어져 오고 있었다.&amp;lt;ref&amp;gt;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 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amp;lt;/ref&amp;gt; [[이주환]]과 함께 해방직후 '雅樂部國營에 關한 請願'을 제출하였고,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또한 동시에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라는 필요성&amp;lt;ref&amp;gt;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20쪽&amp;lt;/ref&amp;gt;으로 1955년 국악사양성소가 설립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밖에 시조강습회를 통해 국악을 보급하였고, 이혜구 등과 더불어 한국국악학회를 1949년에 창설&amp;lt;ref&amp;gt;황준연, 성경린 거문고를 가르치며 국악을 지키고 가꾸다, 한국사 시민강좌 40권, 2012&amp;lt;/ref&amp;gt; 하였다. 그가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시절 선생으로부터 &amp;quot;항상 빈자리는 생기게 마련인거야. 앞이 겹겹이 막혔다고 꿈을 중도에서 꺾거나 괴로와할 필요가 없더군&amp;quot;&amp;lt;ref&amp;gt;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2), 64쪽&amp;lt;/ref&amp;gt;라는 말을 듣고, 항상 이 말을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자란 그는 노후에 본인 스스로가 훌륭한 스승이 되어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고, 그가 걸었던 아악의 길을 현재 많은 국악전공자들이 걷고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45년 구왕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50년 국립국악원 악사장&lt;br /&gt;
* 1950년 국악사양성소 부소장&lt;br /&gt;
*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 1961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61년 국악사양성소 소장&lt;br /&gt;
* 1972년 국립국악고등학교 초대교장&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의 아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음악독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수상집 雅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조선의 민요》&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설》&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의 무용》&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음악논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국악감상》&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8년 《나의 人生觀: 노을에 띄운 가락》&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9년 《韓國傳統舞踊》&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85년 《世宗時代의 音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2000년 《국악학논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9%80%EA%B8%B0%EC%88%98</id>
		<title>김기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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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10:07:4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김기수.jpg|150px|오른쪽|김기수]]&lt;br /&gt;
=='''개요'''==&lt;br /&gt;
김기수(金琪洙, 죽헌(竹軒), 光山哲三, 1917.11.22~1986.10.21)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김기수(金琪洙)&lt;br /&gt;
* 아호 = 죽헌(竹軒)&lt;br /&gt;
* 전공 = 대금&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7-1986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그의 아들 김용만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버지를 생각할 때, 늘 가장 먼저 떠로르는 것은 언제나 일에 열중히 계시던 모습이다'&amp;lt;ref&amp;gt;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79쪽&amp;lt;/ref&amp;gt;라며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는 먹고 잘때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 열중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국악계에 많은 업적을 남기는데에 기여하였다. 여러가지 업적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amp;lt;b&amp;gt;창작국악&amp;lt;/b&amp;gt;&amp;lt;/font&amp;gt;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amp;lt;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amp;gt;은 국악창작곡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amp;lt;ref&amp;gt; 이능화의 한시에 김기수가 곡을 붙인 곡으로 1939년에 작곡하였다. 이 곡은 이왕직에서 일본기원 2600년이 되는 1900년 행사에 사용할 창작곡을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기수의 다른 작품인 &amp;lt;세우영&amp;gt; 혹은 &amp;lt;고향소&amp;gt;를 창작국악곡의 효시로 보자는 의견도 있다. 이수정, 황화만년지곡 연구, 『온지논총』제45집, 2006, 235쪽&amp;lt;/ref&amp;gt; 그리고 그가 작곡한 &amp;lt;정백혼&amp;gt;이라는 작품은 국악관현악곡으로 이 곡을 통해서 국악관현악에 지휘봉이 처음 도입되었고,&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62쪽&amp;lt;/ref&amp;gt; 현재까지도 국악관현악에 지휘를 한다. 그 외에 그가 작곡한 곡수는 약 510곡&amp;lt;ref&amp;gt;서한범, 죽헌 김기수론,『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56쪽&amp;lt;/ref&amp;gt;정도이다. 또 다른 업적으로는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amp;lt;b&amp;gt;악보편찬&amp;lt;/b&amp;gt;&amp;lt;/font&amp;gt;이다. 당시 연주되던 정악, 민속악을 오선보 혹은 정간보로 채보하였다. 그가 편찬한 국악교재들은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해금 등으로 국악사양성소의 정규교재로 사용되었다,&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56쪽&amp;lt;/ref&amp;gt; 그가 작업한 악보에는 시김해 부호 통일 등 실제음악에 더 가까워졌는데, 이전에 구전심수(口傳心授)로 배웠던 국악교육이 악보를 통한 국악교육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amp;lt;b&amp;gt;교육현장에서 단소연주&amp;lt;/b&amp;gt;&amp;lt;/font&amp;gt;가 필수로 음악교과서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렇게 단소가 교육현장에서 많이 불릴 수 있도록 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합성수지재를 이용한 교육용 단소 등을 제작하여 규격과 음악을 통일하였고, 저렴한 생산비로 대량생산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립국악원에 그의 동상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친일파 동상 논란에 휩싸였다. 그가 미쓰야마 테쓰조(光山哲三)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일본 천황 탄신을 기념하는 곡인 &amp;lt;황화만년지곡&amp;gt;을 지었다는 이유때문인데, 결국 국립국악원에서는 김기수의 친일행적을 동상에 기록하는 것&amp;lt;ref&amp;gt;[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372958&amp;amp;section=sc2 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 브레이크뉴스, 2015년 6월 6일&amp;lt;/ref&amp;gt;으로 이 논란의 결론을 지었다. 친일파 논란이 있지만, &amp;quot;새것을 찾으려거든 전통을 더 깊이 파라&amp;quot;는 말처럼 국악을 깊게 팠던 그의 행적은 국악명맥을 이어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현재까지도 그가 만들었던 악보를 통해 국악을 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4기 입학&lt;br /&gt;
* 1936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예술사&lt;br /&gt;
* 1953년 국립국악원 장악과장&lt;br /&gt;
* 1962년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lt;br /&gt;
*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보유자&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보유자&lt;br /&gt;
* 1973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77년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lt;br /&gt;
*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39년 황화만년지곡&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1년 세우영&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4년 고향소&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53년 회서양&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62년 새나라&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83년 초롱&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악전첫걸음》&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민요오십곡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1년 《대금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단소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7년 《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음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1년 《월하정가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2년 《국악입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3년 《국악전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속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1년 《단소율보》&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4년 《가야금정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lt;br /&gt;
*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lt;br /&gt;
* 서한범, 죽헌 김기수론,『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lt;br /&gt;
* 이수정, 황화만년지곡 연구, 『온지논총』제45집, 2006. &lt;br /&gt;
* 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 브레이크뉴스, 2015년 6월 6일&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9%80%EA%B8%B0%EC%88%98</id>
		<title>김기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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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10:06: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김기수.jpg|150px|오른쪽|김기수]]&lt;br /&gt;
=='''개요'''==&lt;br /&gt;
김기수(金琪洙, 죽헌(竹軒), 光山哲三, 1917.11.22~1986.10.21)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김기수(金琪洙)&lt;br /&gt;
* 아호 = 죽헌(竹軒)&lt;br /&gt;
* 전공 = 대금&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7-1986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그의 아들 김용만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버지를 생각할 때, 늘 가장 먼저 떠로르는 것은 언제나 일에 열중히 계시던 모습이다'&amp;lt;ref&amp;gt;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79쪽&amp;lt;/ref&amp;gt;라며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는 먹고 잘때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 열중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국악계에 많은 업적을 남기는데에 기여하였다. 여러가지 업적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amp;lt;b&amp;gt;창작국악&amp;lt;/b&amp;gt;&amp;lt;/font&amp;gt;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amp;lt;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amp;gt;은 국악창작곡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amp;lt;ref&amp;gt; 이능화의 한시에 김기수가 곡을 붙인 곡으로 1939년에 작곡하였다. 이 곡은 이왕직에서 일본기원 2600년이 되는 1900년 행사에 사용할 창작곡을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기수의 다른 작품인 &amp;lt;세우영&amp;gt; 혹은 &amp;lt;고향소&amp;gt;를 창작국악곡의 효시로 보자는 의견도 있다. 이수정, 황화만년지곡 연구, 『온지논총』제45집, 2006, 235쪽&amp;lt;/ref&amp;gt; 그리고 그가 작곡한 &amp;lt;정백혼&amp;gt;이라는 작품은 국악관현악곡으로 이 곡을 통해서 국악관현악에 지휘봉이 처음 도입되었고,&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62쪽&amp;lt;/ref&amp;gt; 현재까지도 국악관현악에 지휘를 한다. 그 외에 그가 작곡한 곡수는 약 510곡&amp;lt;ref&amp;gt;서한범, 죽헌 김기수론,『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56쪽&amp;lt;/ref&amp;gt;정도이다. 또 다른 업적으로는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amp;lt;b&amp;gt;악보편찬&amp;lt;/b&amp;gt;&amp;lt;/font&amp;gt;이다. 당시 연주되던 정악, 민속악을 오선보 혹은 정간보로 채보하였다. 그가 편찬한 국악교재들은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해금 등으로 국악사양성소의 정규교재로 사용되었다,&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56쪽&amp;lt;/ref&amp;gt; 그가 작업한 악보에는 시김해 부호 통일 등 실제음악에 더 가까워졌는데, 이전에 구전심수(口傳心授)로 배웠던 국악교육이 악보를 통한 국악교육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amp;lt;b&amp;gt;교육현장에서 단소연주&amp;lt;/b&amp;gt;&amp;lt;/font&amp;gt;가 필수로 음악교과서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렇게 단소가 교육현장에서 많이 불릴 수 있도록 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합성수지재를 이용한 교육용 단소 등을 제작하여 규격과 음악을 통일하였고, 저렴한 생산비로 대량생산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립국악원에 그의 동상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친일파 동상 논란에 휩싸였다. 그가 미쓰야마 테쓰조(光山哲三)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일본 천황 탄신을 기념하는 곡인 &amp;lt;황화만년지곡&amp;gt;을 지었다는 이유때문인데, 결국 국립국악원에서는 김기수의 친일행적을 동상에 기록하는 것&amp;lt;ref&amp;gt;[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372958&amp;amp;section=sc2 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 브레이크뉴스, 2015년 6월 6일&amp;lt;/ref&amp;gt;으로 이 논란의 결론을 지었다. 친일파 논란이 있지만, &amp;quot;새것을 찾으려거든 전통을 더 깊이 파라&amp;quot;는 말처럼 국악을 깊게 팠던 그의 행적은 국악명맥을 이어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현재까지도 그가 만들었던 악보를 통해 국악을 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4기 입학&lt;br /&gt;
* 1936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예술사&lt;br /&gt;
* 1953년 국립국악원 장악과장&lt;br /&gt;
* 1962년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lt;br /&gt;
*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보유자&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보유자&lt;br /&gt;
* 1973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77년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lt;br /&gt;
*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39년 황화만년지곡&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1년 세우영&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4년 고향소&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53년 회서양&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62년 새나라&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83년 초롱&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악전첫걸음》&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민요오십곡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1년 《대금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단소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7년 《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음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1년 《월하정가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2년 《국악입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3년 《국악전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속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1년 《단소율보》&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4년 《가야금정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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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기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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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10:02: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김기수.jpg|150px|오른쪽|김기수]]&lt;br /&gt;
=='''개요'''==&lt;br /&gt;
김기수(金琪洙, 죽헌(竹軒), 光山哲三, 1917.11.22~1986.10.21)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김기수(金琪洙)&lt;br /&gt;
* 아호 = 죽헌(竹軒)&lt;br /&gt;
* 전공 = 대금&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7-1986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그의 아들 김용만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버지를 생각할 때, 늘 가장 먼저 떠로르는 것은 언제나 일에 열중히 계시던 모습이다'&amp;lt;ref&amp;gt;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79쪽&amp;lt;/ref&amp;gt;라며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는 먹고 잘때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 열중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국악계에 많은 업적을 남기는데에 기여하였다. 여러가지 업적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amp;lt;b&amp;gt;&amp;lt;font color=green 창작국악&amp;lt;/font&amp;gt;&amp;lt;/b&amp;gt;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amp;lt;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amp;gt;은 국악창작곡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amp;lt;ref&amp;gt; 이능화의 한시에 김기수가 곡을 붙인 곡으로 1939년에 작곡하였다. 이 곡은 이왕직에서 일본기원 2600년이 되는 1900년 행사에 사용할 창작곡을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기수의 다른 작품인 &amp;lt;세우영&amp;gt; 혹은 &amp;lt;고향소&amp;gt;를 창작국악곡의 효시로 보자는 의견도 있다. 이수정, 황화만년지곡 연구, 『온지논총』제45집, 2006, 235쪽&amp;lt;/ref&amp;gt; 그리고 그가 작곡한 &amp;lt;정백혼&amp;gt;이라는 작품은 국악관현악곡으로 이 곡을 통해서 국악관현악에 지휘봉이 처음 도입되었고,&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62쪽&amp;lt;/ref&amp;gt; 현재까지도 국악관현악에 지휘를 한다. 그 외에 그가 작곡한 곡수는 약 510곡&amp;lt;ref&amp;gt;서한범, 죽헌 김기수론,『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56쪽&amp;lt;/ref&amp;gt;정도이다. 또 다른 업적으로는 &amp;lt;b&amp;gt;악보편찬&amp;lt;/b&amp;gt;이다. 당시 연주되던 정악, 민속악을 오선보 혹은 정간보로 채보하였다. 그가 편찬한 국악교재들은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해금 등으로 국악사양성소의 정규교재로 사용되었다,&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56쪽&amp;lt;/ref&amp;gt; 그가 작업한 악보에는 시김해 부호 통일 등 실제음악에 더 가까워졌는데, 이전에 구전심수(口傳心授)로 배웠던 국악교육이 악보를 통한 국악교육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amp;lt;b&amp;gt;교육현장에서 단소연주&amp;lt;/b&amp;gt;가 필수로 음악교과서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렇게 단소가 교육현장에서 많이 불릴 수 있도록 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합성수지재를 이용한 교육용 단소 등을 제작하여 규격과 음악을 통일하였고, 저렴한 생산비로 대량생산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립국악원에 그의 동상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친일파 동상 논란에 휩싸였다. 그가 미쓰야마 테쓰조(光山哲三)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일본 천황 탄신을 기념하는 곡인 &amp;lt;황화만년지곡&amp;gt;을 지었다는 이유때문인데, 결국 국립국악원에서는 김기수의 친일행적을 동상에 기록하는 것&amp;lt;ref&amp;gt;[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372958&amp;amp;section=sc2 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 브레이크뉴스, 2015년 6월 6일&amp;lt;/ref&amp;gt;으로 이 논란의 결론을 지었다. 친일파 논란이 있지만, &amp;quot;새것을 찾으려거든 전통을 더 깊이 파라&amp;quot;는 말처럼 국악을 깊게 팠던 그의 행적은 국악명맥을 이어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현재까지도 그가 만들었던 악보를 통해 국악을 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4기 입학&lt;br /&gt;
* 1936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예술사&lt;br /&gt;
* 1953년 국립국악원 장악과장&lt;br /&gt;
* 1962년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lt;br /&gt;
*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보유자&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보유자&lt;br /&gt;
* 1973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77년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lt;br /&gt;
*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39년 황화만년지곡&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1년 세우영&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4년 고향소&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53년 회서양&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62년 새나라&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83년 초롱&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악전첫걸음》&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민요오십곡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1년 《대금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단소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7년 《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음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1년 《월하정가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2년 《국악입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3년 《국악전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속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1년 《단소율보》&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4년 《가야금정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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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기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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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10:01:0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김기수.jpg|150px|오른쪽|김기수]]&lt;br /&gt;
=='''개요'''==&lt;br /&gt;
김기수(金琪洙, 죽헌(竹軒), 光山哲三, 1917.11.22~1986.10.21)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김기수(金琪洙)&lt;br /&gt;
* 아호 = 죽헌(竹軒)&lt;br /&gt;
* 전공 = 대금&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7-1986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그의 아들 김용만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버지를 생각할 때, 늘 가장 먼저 떠로르는 것은 언제나 일에 열중히 계시던 모습이다'&amp;lt;ref&amp;gt;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79쪽&amp;lt;/ref&amp;gt;라며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는 먹고 잘때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 열중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국악계에 많은 업적을 남기는데에 기여하였다. 여러가지 업적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amp;lt;b&amp;gt;창작국악&amp;lt;/b&amp;gt;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amp;lt;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amp;gt;은 국악창작곡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amp;lt;ref&amp;gt; 이능화의 한시에 김기수가 곡을 붙인 곡으로 1939년에 작곡하였다. 이 곡은 이왕직에서 일본기원 2600년이 되는 1900년 행사에 사용할 창작곡을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기수의 다른 작품인 &amp;lt;세우영&amp;gt; 혹은 &amp;lt;고향소&amp;gt;를 창작국악곡의 효시로 보자는 의견도 있다. 이수정, 황화만년지곡 연구, 『온지논총』제45집, 2006, 235쪽&amp;lt;/ref&amp;gt; 그리고 그가 작곡한 &amp;lt;정백혼&amp;gt;이라는 작품은 국악관현악곡으로 이 곡을 통해서 국악관현악에 지휘봉이 처음 도입되었고,&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62쪽&amp;lt;/ref&amp;gt; 현재까지도 국악관현악에 지휘를 한다. 그 외에 그가 작곡한 곡수는 약 510곡&amp;lt;ref&amp;gt;서한범, 죽헌 김기수론,『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56쪽&amp;lt;/ref&amp;gt;정도이다. 또 다른 업적으로는 &amp;lt;b&amp;gt;악보편찬&amp;lt;/b&amp;gt;이다. 당시 연주되던 정악, 민속악을 오선보 혹은 정간보로 채보하였다. 그가 편찬한 국악교재들은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해금 등으로 국악사양성소의 정규교재로 사용되었다,&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56쪽&amp;lt;/ref&amp;gt; 그가 작업한 악보에는 시김해 부호 통일 등 실제음악에 더 가까워졌는데, 이전에 구전심수(口傳心授)로 배웠던 국악교육이 악보를 통한 국악교육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amp;lt;b&amp;gt;교육현장에서 단소연주&amp;lt;/b&amp;gt;가 필수로 음악교과서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렇게 단소가 교육현장에서 많이 불릴 수 있도록 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합성수지재를 이용한 교육용 단소 등을 제작하여 규격과 음악을 통일하였고, 저렴한 생산비로 대량생산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립국악원에 그의 동상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친일파 동상 논란에 휩싸였다. 그가 미쓰야마 테쓰조(光山哲三)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일본 천황 탄신을 기념하는 곡인 &amp;lt;황화만년지곡&amp;gt;을 지었다는 이유때문인데, 결국 국립국악원에서는 김기수의 친일행적을 동상에 기록하는 것&amp;lt;ref&amp;gt;[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372958&amp;amp;section=sc2 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 브레이크뉴스, 2015년 6월 6일&amp;lt;/ref&amp;gt;으로 이 논란의 결론을 지었다. 친일파 논란이 있지만, &amp;quot;새것을 찾으려거든 전통을 더 깊이 파라&amp;quot;는 말처럼 국악을 깊게 팠던 그의 행적은 국악명맥을 이어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현재까지도 그가 만들었던 악보를 통해 국악을 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4기 입학&lt;br /&gt;
* 1936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예술사&lt;br /&gt;
* 1953년 국립국악원 장악과장&lt;br /&gt;
* 1962년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lt;br /&gt;
*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보유자&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보유자&lt;br /&gt;
* 1973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77년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lt;br /&gt;
*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39년 황화만년지곡&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1년 세우영&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4년 고향소&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53년 회서양&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62년 새나라&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83년 초롱&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악전첫걸음》&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민요오십곡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1년 《대금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단소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7년 《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음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1년 《월하정가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2년 《국악입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3년 《국악전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속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1년 《단소율보》&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4년 《가야금정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9%80%EA%B8%B0%EC%88%98</id>
		<title>김기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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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10:00: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김기수.jpg|150px|오른쪽|김기수]]&lt;br /&gt;
=='''개요'''==&lt;br /&gt;
김기수(金琪洙, 죽헌(竹軒), 光山哲三, 1917.11.22~1986.10.21)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김기수(金琪洙)&lt;br /&gt;
* 아호 = 죽헌(竹軒)&lt;br /&gt;
* 전공 = 대금&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7-1986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그의 아들 김용만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버지를 생각할 때, 늘 가장 먼저 떠로르는 것은 언제나 일에 열중히 계시던 모습이다'&amp;lt;ref&amp;gt;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79쪽&amp;lt;/ref&amp;gt;라며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는 먹고 잘때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 열중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국악계에 많은 업적을 남기는데에 기여하였다. 여러가지 업적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창작국악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amp;lt;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amp;gt;은 국악창작곡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amp;lt;ref&amp;gt; 이능화의 한시에 김기수가 곡을 붙인 곡으로 1939년에 작곡하였다. 이 곡은 이왕직에서 일본기원 2600년이 되는 1900년 행사에 사용할 창작곡을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기수의 다른 작품인 &amp;lt;세우영&amp;gt; 혹은 &amp;lt;고향소&amp;gt;를 창작국악곡의 효시로 보자는 의견도 있다. 이수정, 황화만년지곡 연구, 『온지논총』제45집, 2006, 235쪽&amp;lt;/ref&amp;gt; 그리고 그가 작곡한 &amp;lt;정백혼&amp;gt;이라는 작품은 국악관현악곡으로 이 곡을 통해서 국악관현악에 지휘봉이 처음 도입되었고,&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62쪽&amp;lt;/ref&amp;gt; 현재까지도 국악관현악에 지휘를 한다. 그 외에 그가 작곡한 곡수는 약 510곡&amp;lt;ref&amp;gt;서한범, 죽헌 김기수론,『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56쪽&amp;lt;/ref&amp;gt;정도이다. 또 다른 업적으로는 악보편찬이다. 당시 연주되던 정악, 민속악을 오선보 혹은 정간보로 채보하였다. 그가 편찬한 국악교재들은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해금 등으로 국악사양성소의 정규교재로 사용되었다,&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56쪽&amp;lt;/ref&amp;gt; 그가 작업한 악보에는 시김해 부호 통일 등 실제음악에 더 가까워졌는데, 이전에 구전심수(口傳心授)로 배웠던 국악교육이 악보를 통한 국악교육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교육현장에서 단소연주가 필수로 음악교과서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렇게 단소가 교육현장에서 많이 불릴 수 있도록 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합성수지재를 이용한 교육용 단소 등을 제작하여 규격과 음악을 통일하였고, 저렴한 생산비로 대량생산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립국악원에 그의 동상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친일파 동상 논란에 휩싸였다. 그가 미쓰야마 테쓰조(光山哲三)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일본 천황 탄신을 기념하는 곡인 &amp;lt;황화만년지곡&amp;gt;을 지었다는 이유때문인데, 결국 국립국악원에서는 김기수의 친일행적을 동상에 기록하는 것&amp;lt;ref&amp;gt;[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372958&amp;amp;section=sc2 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 브레이크뉴스, 2015년 6월 6일&amp;lt;/ref&amp;gt;으로 이 논란의 결론을 지었다. 친일파 논란이 있지만, &amp;quot;새것을 찾으려거든 전통을 더 깊이 파라&amp;quot;는 말처럼 국악을 깊게 팠던 그의 행적은 국악명맥을 이어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현재까지도 그가 만들었던 악보를 통해 국악을 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4기 입학&lt;br /&gt;
* 1936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예술사&lt;br /&gt;
* 1953년 국립국악원 장악과장&lt;br /&gt;
* 1962년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lt;br /&gt;
*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보유자&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보유자&lt;br /&gt;
* 1973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77년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lt;br /&gt;
*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39년 황화만년지곡&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1년 세우영&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4년 고향소&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53년 회서양&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62년 새나라&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83년 초롱&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악전첫걸음》&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민요오십곡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1년 《대금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단소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7년 《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음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1년 《월하정가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2년 《국악입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3년 《국악전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속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1년 《단소율보》&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4년 《가야금정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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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기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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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09:59:4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김기수.jpg|150px|오른쪽|김기수]]&lt;br /&gt;
=='''개요'''==&lt;br /&gt;
김기수(金琪洙, 죽헌(竹軒), 光山哲三, 1917.11.22~1986.10.21)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김기수(金琪洙)&lt;br /&gt;
* 아호 = 죽헌(竹軒)&lt;br /&gt;
* 전공 = 대금&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7-1986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그의 아들 김용만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버지를 생각할 때, 늘 가장 먼저 떠로르는 것은 언제나 일에 열중히 계시던 모습이다'&amp;lt;ref&amp;gt;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79쪽&amp;lt;/ref&amp;gt;라며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는 먹고 잘때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 열중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국악계에 많은 업적을 남기는데에 기여하였다. 여러가지 업적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창작국악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amp;lt;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amp;gt;은 국악창작곡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amp;lt;ref&amp;gt; 이능화의 한시에 김기수가 곡을 붙인 곡으로 1939년에 작곡하였다. 이 곡은 이왕직에서 일본기원 2600년이 되는 1900년 행사에 사용할 창작곡을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기수의 다른 작품인 &amp;lt;세우영&amp;gt; 혹은 &amp;lt;고향소&amp;gt;를 창작국악곡의 효시로 보자는 의견도 있다. 이수정, 황화만년지곡 연구, 『온지논총』제45집, 2006, 235쪽&amp;lt;/ref&amp;gt; 그리고 그가 작곡한 &amp;lt;정백혼&amp;gt;이라는 작품은 국악관현악곡으로 이 곡을 통해서 국악관현악에 지휘봉이 처음 도입되었고,&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62쪽&amp;lt;/ref&amp;gt; 현재까지도 국악관현악에 지휘를 한다. 그 외에 그가 작곡한 곡수는 약 510곡,&amp;lt;ref&amp;gt;서한범, 죽헌 김기수론,『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56쪽&amp;lt;/ref&amp;gt;정도이다. 또 다른 업적으로는 악보편찬이다. 당시 연주되던 정악, 민속악을 오선보 혹은 정간보로 채보하였다. 그가 편찬한 국악교재들은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해금 등으로 국악사양성소의 정규교재로 사용되었다,&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56쪽&amp;lt;/ref&amp;gt; 그가 작업한 악보에는 시김해 부호 통일 등 실제음악에 더 가까워졌는데, 이전에 구전심수(口傳心授)로 배웠던 국악교육이 악보를 통한 국악교육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교육현장에서 단소연주가 필수로 음악교과서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렇게 단소가 교육현장에서 많이 불릴 수 있도록 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합성수지재를 이용한 교육용 단소 등을 제작하여 규격과 음악을 통일하였고, 저렴한 생산비로 대량생산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립국악원에 그의 동상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친일파 동상 논란에 휩싸였다. 그가 미쓰야마 테쓰조(光山哲三)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일본 천황 탄신을 기념하는 곡인 &amp;lt;황화만년지곡&amp;gt;을 지었다는 이유때문인데, 결국 국립국악원에서는 김기수의 친일행적을 동상에 기록하는 것&amp;lt;ref&amp;gt;[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372958&amp;amp;section=sc2 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 브레이크뉴스, 2015년 6월 6일&amp;lt;/ref&amp;gt;으로 이 논란의 결론을 지었다. 친일파 논란이 있지만, &amp;quot;새것을 찾으려거든 전통을 더 깊이 파라&amp;quot;는 말처럼 국악을 깊게 팠던 그의 행적은 국악명맥을 이어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현재까지도 그가 만들었던 악보를 통해 국악을 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4기 입학&lt;br /&gt;
* 1936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예술사&lt;br /&gt;
* 1953년 국립국악원 장악과장&lt;br /&gt;
* 1962년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lt;br /&gt;
*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보유자&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보유자&lt;br /&gt;
* 1973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77년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lt;br /&gt;
*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39년 황화만년지곡&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1년 세우영&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4년 고향소&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53년 회서양&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62년 새나라&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83년 초롱&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악전첫걸음》&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민요오십곡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1년 《대금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단소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7년 《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음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1년 《월하정가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2년 《국악입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3년 《국악전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속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1년 《단소율보》&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4년 《가야금정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9%80%EA%B8%B0%EC%88%98</id>
		<title>김기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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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09:58: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김기수.jpg|150px|오른쪽|김기수]]&lt;br /&gt;
=='''개요'''==&lt;br /&gt;
김기수(金琪洙, 죽헌(竹軒), 光山哲三, 1917.11.22~1986.10.21)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김기수(金琪洙)&lt;br /&gt;
* 아호 = 죽헌(竹軒)&lt;br /&gt;
* 전공 = 대금&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7-1986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그의 아들 김용만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버지를 생각할 때, 늘 가장 먼저 떠로르는 것은 언제나 일에 열중히 계시던 모습이다'&amp;lt;ref&amp;gt;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79쪽&amp;lt;/ref&amp;gt;라며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는 먹고 잘때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 열중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국악계에 많은 업적을 남기는데에 기여하였다. 여러가지 업적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창작국악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amp;lt;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amp;gt;은 국악창작곡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amp;lt;ref&amp;gt; 이능화의 한시에 김기수가 곡을 붙인 곡으로 1939년에 작곡하였다. 이 곡은 이왕직에서 일본기원 2600년이 되는 1900년 행사에 사용할 창작곡을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기수의 다른 작품인 &amp;lt;세우영&amp;gt; 혹은 &amp;lt;고향소&amp;gt;를 창작국악곡의 효시로 보자는 의견도 있다. 이수정, 황화만년지곡 연구, 『온지논총』제45집, 2006, 235쪽&amp;lt;/ref&amp;gt; 그리고 그가 작곡한 &amp;lt;정백혼&amp;gt;이라는 작품은 국악관현악곡으로 이 곡을 통해서 국악관현악에 지휘봉이 처음 도입되었고,&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62쪽&amp;lt;/ref&amp;gt; 현재까지도 국악관현악에 지휘를 한다. 그 외에 그가 작곡한 곡수는 약 510곡,&amp;lt;ref&amp;gt;서한범, 죽헌 김기수론,『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56쪽&amp;lt;/ref&amp;gt;정도이다. 또 다른 업적으로는 악보편찬이다. 당시 연주되던 정악, 민속악을 오선보 혹은 정간보로 채보하였다. 그가 편찬한 국악교재들은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해금 등으로 국악사양성소의 정규교재로 사용되었다,&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56쪽&amp;lt;/ref&amp;gt; 그가 작업한 악보에는 시김해 부호 통일 등 실제음악에 더 가까워졌는데, 이전에 구전심수로 배웠던 국악교육이 악보를 통한 국악교육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교육현장에서 단소연주가 필수로 음악교과서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렇게 단소가 교육현장에서 많이 불릴 수 있도록 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합성수지재를 이용한 교육용 단소 등을 제작하여 규격과 음악을 통일하였고, 저렴한 생산비로 대량생산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립국악원에 그의 동상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친일파 동상 논란에 휩싸였다. 그가 미쓰야마 테쓰조(光山哲三)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일본 천황 탄신을 기념하는 곡인 &amp;lt;황화만년지곡&amp;gt;을 지었다는 이유때문인데, 결국 국립국악원에서는 김기수의 친일행적을 동상에 기록하는 것&amp;lt;ref&amp;gt;[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372958&amp;amp;section=sc2 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 브레이크뉴스, 2015년 6월 6일&amp;lt;/ref&amp;gt;으로 이 논란의 결론을 지었다. 친일파 논란이 있지만, &amp;quot;새것을 찾으려거든 전통을 더 깊이 파라&amp;quot;는 말처럼 국악을 깊게 팠던 그의 행적은 국악명맥을 이어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현재까지도 그가 만들었던 악보를 통해 국악을 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4기 입학&lt;br /&gt;
* 1936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예술사&lt;br /&gt;
* 1953년 국립국악원 장악과장&lt;br /&gt;
* 1962년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lt;br /&gt;
*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보유자&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보유자&lt;br /&gt;
* 1973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77년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lt;br /&gt;
*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39년 황화만년지곡&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1년 세우영&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4년 고향소&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53년 회서양&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62년 새나라&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83년 초롱&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악전첫걸음》&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민요오십곡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1년 《대금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단소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7년 《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음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1년 《월하정가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2년 《국악입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3년 《국악전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속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1년 《단소율보》&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4년 《가야금정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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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기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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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09:55: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김기수.jpg|150px|오른쪽|김기수]]&lt;br /&gt;
=='''개요'''==&lt;br /&gt;
김기수(金琪洙, 죽헌(竹軒), 光山哲三, 1917.11.22~1986.10.21)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김기수(金琪洙)&lt;br /&gt;
* 아호 = 죽헌(竹軒)&lt;br /&gt;
* 전공 = 대금&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7-1986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그의 아들 김용만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버지를 생각할 때, 늘 가장 먼저 떠로르는 것은 언제나 일에 열중히 계시던 모습이다'&amp;lt;ref&amp;gt;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79쪽&amp;lt;/ref&amp;gt;라며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는 먹고 잘때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 열중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국악계에 많은 업적을 남기는데에 기여하였다. 여러가지 업적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창작국악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amp;lt;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amp;gt;은 국악창작곡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amp;lt;ref&amp;gt; 이능화의 한시에 김기수가 곡을 붙인 곡으로 1939년에 작곡하였다. 이 곡은 이왕직에서 일본기원 2600년이 되는 1900년 행사에 사용할 창작곡을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기수의 다른 작품인 &amp;lt;세우영&amp;gt; 혹은 &amp;lt;고향소&amp;gt;를 창작국악곡의 효시로 보자는 의견도 있다. 이수정, 황화만년지곡 연구, 『온지논총』제45집, 2006, 235쪽&amp;lt;/ref&amp;gt; 그리고 그가 작곡한 &amp;lt;정백혼&amp;gt;이라는 작품은 국악관현악곡으로 이 곡을 통해서 국악관현악에 지휘봉이 처음 도입되었고,&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62쪽&amp;lt;/ref&amp;gt; 현재까지도 국악관현악에 지휘를 한다. 그 외에 그가 작곡한 곡수는 약 510곡,&amp;lt;ref&amp;gt;서한범, 죽헌 김기수론,『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56쪽&amp;lt;/ref&amp;gt;정도이다. 또 다른 업적으로는 악보편찬이다. 당시 연주되던 정악, 민속악을 오선보 혹은 정간보로 채보하였다. 그가 편찬한 국악교재들은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해금 등으로 국악사양성소의 정규교재로 사용되었다,&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56쪽&amp;lt;/ref&amp;gt; 그가 작업한 악보에는 시김해 부호 통일 등 실제음악에 더 가까워졌는데, 이전에 구전심수로 배웠던 국악교육이 악보를 통한 국악교육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교육현장에서 단소연주가 필수로 음악교과서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렇게 단소가 교육현장에서 많이 불릴 수 있도록 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합성수지재를 이용한 교육용 단소 등을 제작하여 규격과 음악을 통일하였고, 저렴한 생산비로 대량생산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립국악원에 그의 동상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친일파 동상 논란에 휩싸였다. 그가 미쓰야마 테쓰조(光山哲三)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일본 천황 탄신을 기념하는 곡인 &amp;lt;황화만년지곡&amp;gt;을 지었다는 이유때문인데, 결국 국립국악원에서는 김기수의 친일행적을 동상에 기록하는 것&amp;lt;ref&amp;gt;[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372958&amp;amp;section=sc2 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 브레이크뉴스, 2015년 6월 6일&amp;lt;/ref&amp;gt;으로 이 논란의 결론을 지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새것을 찾으려거든 전통을 더 깊이 파라(대학예술원 프로필_&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4기 입학&lt;br /&gt;
* 1936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예술사&lt;br /&gt;
* 1953년 국립국악원 장악과장&lt;br /&gt;
* 1962년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lt;br /&gt;
*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보유자&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보유자&lt;br /&gt;
* 1973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77년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lt;br /&gt;
*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39년 황화만년지곡&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1년 세우영&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4년 고향소&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53년 회서양&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62년 새나라&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83년 초롱&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악전첫걸음》&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민요오십곡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1년 《대금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단소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7년 《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음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1년 《월하정가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2년 《국악입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3년 《국악전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속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1년 《단소율보》&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4년 《가야금정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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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기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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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09:52: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김기수.jpg|150px|오른쪽|김기수]]&lt;br /&gt;
=='''개요'''==&lt;br /&gt;
김기수(金琪洙, 죽헌(竹軒), 光山哲三, 1917.11.22~1986.10.21)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김기수(金琪洙)&lt;br /&gt;
* 아호 = 죽헌(竹軒)&lt;br /&gt;
* 전공 = 대금&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7-1986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그의 아들 김용만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버지를 생각할 때, 늘 가장 먼저 떠로르는 것은 언제나 일에 열중히 계시던 모습이다'&amp;lt;ref&amp;gt;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79쪽&amp;lt;/ref&amp;gt;라며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는 먹고 잘때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 열중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국악계에 많은 업적을 남기는데에 기여하였다. 여러가지 업적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창작국악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amp;lt;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amp;gt;은 국악창작곡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amp;lt;ref&amp;gt; 이능화의 한시에 김기수가 곡을 붙인 곡으로 1939년에 작곡하였다. 이 곡은 이왕직에서 일본기원 2600년이 되는 1900년 행사에 사용할 창작곡을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기수의 다른 작품인 &amp;lt;세우영&amp;gt; 혹은 &amp;lt;고향소&amp;gt;를 창작국악곡의 효시로 보자는 의견도 있다. 이수정, 황화만년지곡 연구, 『온지논총』제45집, 2006, 235쪽&amp;lt;/ref&amp;gt; 그리고 그가 작곡한 &amp;lt;정백혼&amp;gt;이라는 작품은 국악관현악곡으로 이 곡을 통해서 국악관현악에 지휘봉이 처음 도입되었고,&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62쪽&amp;lt;/ref&amp;gt; 현재까지도 국악관현악에 지휘를 한다. 그 외에 그가 작곡한 곡수는 약 510곡,&amp;lt;ref&amp;gt;서한범, 죽헌 김기수론,『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56쪽&amp;lt;/ref&amp;gt;정도이다. 또 다른 업적으로는 악보편찬이다. 당시 연주되던 정악, 민속악을 오선보 혹은 정간보로 채보하였다. 그가 편찬한 국악교재들은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해금 등으로 국악사양성소의 정규교재로 사용되었다,&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56쪽&amp;lt;/ref&amp;gt; 그가 작업한 악보에는 시김해 부호 통일 등 실제음악에 더 가까워졌는데, 이전에 구전심수로 배웠던 국악교육이 악보를 통한 국악교육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교육현장에서 단소연주가 필수로 음악교과서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렇게 단소가 교육현장에서 많이 불릴 수 있도록 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합성수지재를 이용한 교육용 단소 등을 제작하여 규격과 음악을 통일하였고, 저렴한 생산비로 대량생산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립국악원에 그의 동상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친일파 동상 논란에 휩싸였다. 그가 미쓰야마 테쓰조(光山哲三)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일본 천황 탄신을 기념하는 곡인 &amp;lt;황화만년지곡&amp;gt;을 지었다는 이유때문인데, 결국 국립국악원에서는 김기수의 친일행적을 동상에 기록하는 것&amp;lt;ref&amp;gt;[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372958&amp;amp;section=sc2]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 논란에 &amp;quot;재검토 중&amp;quot;&amp;lt;/ref&amp;gt;으로 이 논란의 결론을 지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새것을 찾으려거든 전통을 더 깊이 파라(대학예술원 프로필_&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4기 입학&lt;br /&gt;
* 1936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예술사&lt;br /&gt;
* 1953년 국립국악원 장악과장&lt;br /&gt;
* 1962년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lt;br /&gt;
*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보유자&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보유자&lt;br /&gt;
* 1973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77년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lt;br /&gt;
*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39년 황화만년지곡&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1년 세우영&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4년 고향소&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53년 회서양&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62년 새나라&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83년 초롱&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악전첫걸음》&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민요오십곡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1년 《대금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단소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7년 《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음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1년 《월하정가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2년 《국악입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3년 《국악전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속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1년 《단소율보》&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4년 《가야금정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9%80%EA%B8%B0%EC%88%98</id>
		<title>김기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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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09:52: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김기수.jpg|150px|오른쪽|김기수]]&lt;br /&gt;
=='''개요'''==&lt;br /&gt;
김기수(金琪洙, 죽헌(竹軒), 光山哲三, 1917.11.22~1986.10.21)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김기수(金琪洙)&lt;br /&gt;
* 아호 = 죽헌(竹軒)&lt;br /&gt;
* 전공 = 대금&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7-1986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그의 아들 김용만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버지를 생각할 때, 늘 가장 먼저 떠로르는 것은 언제나 일에 열중히 계시던 모습이다'&amp;lt;ref&amp;gt;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79쪽&amp;lt;/ref&amp;gt;라며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는 먹고 잘때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 열중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국악계에 많은 업적을 남기는데에 기여하였다. 여러가지 업적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창작국악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amp;lt;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amp;gt;은 국악창작곡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amp;lt;ref&amp;gt; 이능화의 한시에 김기수가 곡을 붙인 곡으로 1939년에 작곡하였다. 이 곡은 이왕직에서 일본기원 2600년이 되는 1900년 행사에 사용할 창작곡을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기수의 다른 작품인 &amp;lt;세우영&amp;gt; 혹은 &amp;lt;고향소&amp;gt;를 창작국악곡의 효시로 보자는 의견도 있다. 이수정, 황화만년지곡 연구, 『온지논총』제45집, 2006, 235쪽&amp;lt;/ref&amp;gt; 그리고 그가 작곡한 &amp;lt;정백혼&amp;gt;이라는 작품은 국악관현악곡으로 이 곡을 통해서 국악관현악에 지휘봉이 처음 도입되었고,&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62쪽&amp;lt;/ref&amp;gt; 현재까지도 국악관현악에 지휘를 한다. 그 외에 그가 작곡한 곡수는 약 510곡,&amp;lt;ref&amp;gt;서한범, 죽헌 김기수론,『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56쪽&amp;lt;/ref&amp;gt;정도이다. 또 다른 업적으로는 악보편찬이다. 당시 연주되던 정악, 민속악을 오선보 혹은 정간보로 채보하였다. 그가 편찬한 국악교재들은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해금 등으로 국악사양성소의 정규교재로 사용되었다,&amp;lt;ref&amp;gt;김우진, 근현대 한국음악가의 음악사적 업적 조명,『한국음악사학보』제47집, 2011, 56쪽&amp;lt;/ref&amp;gt; 그가 작업한 악보에는 시김해 부호 통일 등 실제음악에 더 가까워졌는데, 이전에 구전심수로 배웠던 국악교육이 악보를 통한 국악교육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교육현장에서 단소연주가 필수로 음악교과서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렇게 단소가 교육현장에서 많이 불릴 수 있도록 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합성수지재를 이용한 교육용 단소 등을 제작하여 규격과 음악을 통일하였고, 저렴한 생산비로 대량생산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립국악원에 그의 동상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친일파 동상 논란에 휩싸였다. 그가 미쓰야마 테쓰조(光山哲三)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일본 천황 탄신을 기념하는 곡인 &amp;lt;황화만년지곡&amp;gt;을 지었다는 이유때문인데, 결국 국립국악원에서는 김기수의 친일행적을 동상에 기록하는 것&amp;lt;ref&amp;gt;[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372958&amp;amp;section=sc2]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 논란에 &amp;quot;재검토 중&amp;quot;&amp;lt;/ref&amp;gt;으로 이 논란의 결론을 지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새것을 찾으려거든 전통을 더 깊이 파라(대학예술원 프로필_&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4기 입학&lt;br /&gt;
* 1936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예술사&lt;br /&gt;
* 1953년 국립국악원 장악과장&lt;br /&gt;
* 1962년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lt;br /&gt;
*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보유자&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보유자&lt;br /&gt;
* 1973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77년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lt;br /&gt;
*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39년 황화만년지곡&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1년 세우영&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4년 고향소&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53년 회서양&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62년 새나라&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83년 초롱&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악전첫걸음》&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민요오십곡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1년 《대금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단소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7년 《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음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1년 《월하정가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2년 《국악입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3년 《국악전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속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1년 《단소율보》&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4년 《가야금정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F%89%EC%B0%BD_%EC%9D%B4%ED%9A%A8%EC%84%9D%EB%AC%B8%ED%95%99%EA%B4%80</id>
		<title>평창 이효석문학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F%89%EC%B0%BD_%EC%9D%B4%ED%9A%A8%EC%84%9D%EB%AC%B8%ED%95%99%EA%B4%80"/>
				<updated>2017-06-26T09:40:0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문학관-뒷동산.jpg|500px|오른쪽|문학관]]&lt;br /&gt;
&lt;br /&gt;
===Lee Hyo-seok Memorial Hall===&lt;br /&gt;
&lt;br /&gt;
Lee Hyo-seok Memorial Hall opened in 2002 in commemoration of [https://en.wikipedia.org/wiki/Lee_Hyo-seok Lee Hyo-seok] (pen-name Gasan), the author of ''When Buckwheat Flowers Bloom''. This memorial hall or house museum has displays of objects used by the writers and his manuscripts. &lt;br /&gt;
&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한국 현대 단편소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6028&amp;amp;cid=46645&amp;amp;categoryId=46645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기리기 위해 세운 문학관&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대표명칭 = 이효석문학관&lt;br /&gt;
* 영문명칭 = Lee Hyo-seok Literary House&lt;br /&gt;
* 주소 =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효석문학길 73-25&lt;br /&gt;
* 설립시기 = 2002년&lt;br /&gt;
* 운영시간 = 성수기(5~9월) 09:00 - 18:30/비수기(10~4월) 09:00 - 17:30 &lt;br /&gt;
* 입장료 = 성인 2,000원/중고생 1,500원/초등생 1,000원  &lt;br /&gt;
* 웹사이트 = [http://www.hyoseok.org 이효석문학관 홈페이지]&lt;br /&gt;
* 전화 = 033)330-2700&lt;br /&gt;
&lt;br /&gt;
=='''위치'''==&lt;br /&gt;
&amp;lt;center&amp;gt;&lt;br /&gt;
&amp;lt;googlemap width=&amp;quot;1000&amp;quot; height=&amp;quot;400&amp;quot; lat=&amp;quot;37.207302&amp;quot; lon=&amp;quot;128.501760&amp;quot; type=&amp;quot;normal&amp;quot; zoom=&amp;quot;9&amp;quot; icon=&amp;quot;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amp;quot;&amp;gt;&lt;br /&gt;
37.613184, 128.370098, [[평창 이효석문학관]]&lt;br /&gt;
&amp;lt;/googlemap&amp;gt;&lt;br /&gt;
&amp;lt;/center&amp;gt;&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이효석(1907-1942)===&lt;br /&gt;
이효석의 호는 가산(可算)으로 1907년 2월 23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서 태어났다. 경성제국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경성농업학교 교사. 숭실전문학교 교수 등 활동하였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3654&amp;amp;cid=46645&amp;amp;categoryId=46645 「도시와 유령」] 작품부터 본격적으로 정식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고, 대표작으로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21299&amp;amp;cid=46645&amp;amp;categoryId=46645 「산」],[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59235&amp;amp;cid=46645&amp;amp;categoryId=46645 「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59232&amp;amp;cid=46645&amp;amp;categoryId=46645 「돈(豚」)], 「메밀꽃 필 무렵」,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59355&amp;amp;cid=46645&amp;amp;categoryId=46645 「화분」] 등이 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외국 문학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형성하였다. 이효석의 작품세계는 흔히 '향수(鄕愁)의 문학'이라고 불리는데, 안으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밖으로는 이국(異國), 특히 유럽에 대한 동경으로 나타내고 있다.&amp;lt;ref&amp;gt;[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6663&amp;amp;cid=46645&amp;amp;categoryId=46645 이효석], 『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이효석문학관===&lt;br /&gt;
이효석문학관은 가산 이효석의 고향이자 그의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지인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는 연보, 사진, 잡지, 신문, 초간본 책자 등을 통해 이효석의 삶과 작품 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이효석 문학전시실, 다양한 영상물 시청과 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 문학교실, 그와 관련돈 다양한 자료가 준비된 학예연구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amp;lt;ref&amp;gt;이영준, 「이효석문학관과 생가 복원의 추진 방향과 과제」, 『글로벌문화콘텐츠학회 학술대회』, 글로벌문화콘텐츠학회, 2014, 120쪽&amp;lt;/ref&amp;gt; 전시실은 이효석연보, 자연인 이효석의 삶, 봉평장터 재현, 창작실 안내, 가산의 문학세계, 이효석 문학지도, 이효석과 평창,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추모사업 및 효석문화제, 동반자 작가와 구인회의 10개 주제로 구분되고 있다. 작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1930년대의 봉평 장터를 재현해 놓은 것을 비롯하여, 사진과 문헌을 근거로 하여 재현한 창작실을 엿볼 수 있으며, 이효석 작가뿐 아니라 동반자 작가들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amp;lt;ref&amp;gt;[http://www.hyoseok.org 이효석문학관 홈페이지]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평창과 이효석===&lt;br /&gt;
이효석의 소설에는 어린 시절 고향에서 경험한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자신이 살던 마을과 읍내의 기억, 산과(山果)와 청밀(淸蜜)과 곡식과 농산물 품평회에 대한 기억, 첫사랑에 대한 기억 등이 나타나 있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다양한 글 속에서 나타내고 있다. 이효석 작품 중 고향을 작품의 배경이나 소재로 한 것은 「메밀꽃 필 무렵」, 「산협(山峽)」, 「개살구」, 「고사리」, 「들」, 「산」등이 있다. 이 중 「메밀꽃 필 무렵」, 「산협」, 「개살구」에는 봉평 및 부근의 지명이 실명으로 명시되어 있다. 「개살구」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말년을 보낸 진부를 배경으로 하여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당시 풍속 등이 나타나 있다. 또한 「산협(山峽)」에서는 이효석 자신이 태어난 봉평을 배경으로 '핏줄, 땅, 제사, 집' 등 농경 사회 주민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한국 현대 소설 중 강원도 지방의 풍속을 제대로 재현한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amp;lt;ref&amp;gt;박경애, 「강원도 일대 문학현장 기행」, 『나랏말쌈』제20호, 대구대학교 국어교육과, 2005, 222~223쪽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문학관 전경===&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파일:이효석1.jpg&lt;br /&gt;
파일:이효석2.jpg&lt;br /&gt;
파일:이효석3.jpg&lt;br /&gt;
파일:이효석4.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관련키워드'''==&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00119&amp;amp;cid=42856&amp;amp;categoryId=42856 이효석문화마을]: 문화관광부로부터 '전국 제1호 문화마을'로 지정된 이효석 문화마을에는 이효석생가터, 물레방앗간, 충주집, 가산공원, 이효석기념관, 메밀 향토자료관 등이 마련되어 있다.&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42767&amp;amp;cid=42856&amp;amp;categoryId=42856 이효석생가]: 지역 원로들의 고증을 토태로 이효석 마을 안에 있는 생가터로부터 약 600m 아래쪽에 이효석 초가집 생가를 복원하였다.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2810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2180 효석문화제]: 이효석의 문학정신을 계승 및 발전시키기 위해 매해 9월에 열리는 문화예술축제이다.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28085&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797 이효석문학상]: 이효석의 문화적 업적을 기리고, 해마다 탁월한 작품을 발표한 작가들을 시상하는 문학상이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김경수, 「이효석문학관 운영에서 배워야 할 몇 가지」, 『황해문화』제45호, 새얼문화재단, 2004, 330~334쪽  &lt;br /&gt;
* 김종우·윤학로, 「김유정문학관과 이효석문학관의 운영현황과 전망」, 『비교문학』제41호, 한국비교문학회, 2007, 375~407쪽 &lt;br /&gt;
* 박경애, 「강원도 일대 문학현장 기행」, 『나랏말쌈』제20호, 대구대학교 국어교육과, 2005, 216~227쪽&lt;br /&gt;
* 이영준, 「이효석문학관과 생가 복원의 추진 방향과 과제」, 『글로벌문화콘텐츠학회 학술대회』, 글로벌문화콘텐츠학회, 2014, 118~123쪽&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B1%EA%B2%BD%EB%A6%B0</id>
		<title>성경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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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09:31:3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성경린.jpg|150px|오른쪽|성경린]]&lt;br /&gt;
=='''개요'''==&lt;br /&gt;
성경린(成慶麟, 관제, 1911.9.18~2008.3.5)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성경린(成慶麟)&lt;br /&gt;
* 아호 = 관제&lt;br /&gt;
* 전공 = 거문고&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1-2008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그의 아들 김용만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버지를 생각할 때, 늘 가장 먼저 떠로르는 것은 언제나 일에 열중히 계시던 모습이다'(이왕직, 79)라며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는 먹고 잘때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 열중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국악계에 많은 업적을 남기는데에 기여하였다. 여러가지 업적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창작국악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amp;lt;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amp;gt;은 국악창작곡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이능화의 한시에 김기수가 곡을 붙인 곡으로 1939년에 작곡하였다. 이 곡은 이왕직에서 일본기원 2600년이 되는 1900년 행사에 사용할 창작곡을 공모(이수정, 236)전에서 당선된 작품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기수의 다른 작품인 &amp;lt;세우영&amp;gt; 혹은 &amp;lt;고향소&amp;gt;를 창작국악곡의 효시로 보자는 의견도 있다. 이수정, 235) 그리고 그가 작곡한 &amp;lt;정백혼&amp;gt;이라는 작품은 국악관현악곡으로 이 곡을 통해서 국악관현악에 지휘봉이 처음 도입되었고,(김우진, 62)현재까지도 국악관현악에 지휘를 한다. 그 외에 그가 작곡한 곡수는 약 510곡(서한범, 69)정도이다. 또 다른 업적으로는 악보편찬이다. 당시 연주되던 정악, 민속악을 오선보 혹은 정간보로 채보하였다. 그가 편찬한 국악교재들은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해금 등으로 국악사양성소의 정규교재로 사용되었다.(김우진,56) 그가 작업한 악보에는 시김해 부호 통일 등 실제음악에 더 가까워졌는데, 이전에 구전심수로 배웠던 국악교육이 악보를 통한 국악교육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교육현장에서 단소연주가 필수로 음악교과서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렇게 단소가 교육현장에서 많이 불릴 수 있도록 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합성수지재를 이용한 교육용 단소 등을 제작하여 규격과 음악을 통일하였고, 저렴한 생산비로 대량생산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립국악원에 그의 동상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친일파 동상 논란에 휩싸였다. 그가 미쓰야마 테쓰조(光山哲三)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일본 천황 탄신을 기념하는 곡인 &amp;lt;황화만년지곡&amp;gt;을 지었다는 이유때문인데, 결국 국립국악원에서는 김기수의 친일행적을 동상에 기록하는 것으로 이 논란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372958&amp;amp;section=sc2을 결론지었다. &lt;br /&gt;
 &lt;br /&gt;
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lt;br /&gt;
&lt;br /&gt;
원문보기: &lt;br /&gt;
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080306/8552055/1#csidx1a0490c79a33a9a82e1bcc47f8d50ec&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45년 구왕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50년 국립국악원 악사장&lt;br /&gt;
* 1950년 국악사양성소 부소장&lt;br /&gt;
*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 1961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61년 국악사양성소 소장&lt;br /&gt;
* 1972년 국립국악고등학교 초대교장&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의 아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음악독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수상집 雅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조선의 민요》&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설》&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의 무용》&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음악논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국악감상》&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8년 《나의 人生觀: 노을에 띄운 가락》&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9년 《韓國傳統舞踊》&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85년 《世宗時代의 音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2000년 《국악학논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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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기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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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08:24:4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김기수.jpg|150px|오른쪽|김기수]]&lt;br /&gt;
=='''개요'''==&lt;br /&gt;
김기수(金琪洙, 죽헌(竹軒), 光山哲三, 1917.11.22~1986.10.21)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김기수(金琪洙)&lt;br /&gt;
* 아호 = 죽헌(竹軒)&lt;br /&gt;
* 전공 = 대금&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7-1986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새것을 찾으려거든 전통을 더 깊이 파라(대학예술원 프로필_&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4기 입학&lt;br /&gt;
* 1936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예술사&lt;br /&gt;
* 1953년 국립국악원 장악과장&lt;br /&gt;
* 1962년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lt;br /&gt;
*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보유자&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보유자&lt;br /&gt;
* 1973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77년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lt;br /&gt;
*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39년 황화만년지곡&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1년 세우영&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44년 고향소&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53년 회서양&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62년 새나라&lt;br /&gt;
* &amp;lt;b&amp;gt;작품&amp;lt;/b&amp;gt; 1983년 초롱&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악전첫걸음》&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민요오십곡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1년 《대금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단소교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7년 《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한국음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1년 《월하정가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2년 《국악입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3년 《국악전집》&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속고가신조》&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1년 《단소율보》&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4년 《가야금정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9%80%EA%B8%B0%EC%88%98</id>
		<title>김기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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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김기수.jpg|150px|오른쪽|김기수]]&lt;br /&gt;
=='''개요'''==&lt;br /&gt;
김기수(金琪洙, 죽헌(竹軒), 光山哲三, 1917.11.22~1986.10.21)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김기수(金琪洙)&lt;br /&gt;
* 아호 = 죽헌(竹軒)&lt;br /&gt;
* 전공 = 대금&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7-1986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새것을 찾으려거든 전통을 더 깊이 파라(대학예술원 프로필_&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4기 입학&lt;br /&gt;
* 1936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예술사&lt;br /&gt;
* 1953년 국립국악원 장악과장&lt;br /&gt;
* 1962년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lt;br /&gt;
*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보유자&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보유자&lt;br /&gt;
* 1973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77년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lt;br /&gt;
*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1939 황화만년지곡 작곡&lt;br /&gt;
* 1941 세우영 작곡&lt;br /&gt;
* &amp;lt;&amp;lt;국악입문&amp;gt;&amp;gt;&lt;br /&gt;
* &amp;lt;&amp;lt;대금교본&amp;gt;&amp;gt;&lt;br /&gt;
* &amp;lt;&amp;lt;한국음악&amp;gt;&amp;gt;(전22권)&lt;br /&gt;
* &amp;lt;&amp;lt;국악전집&amp;gt;&amp;gt;(전14권)&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B1%EA%B2%BD%EB%A6%B0</id>
		<title>성경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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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08:17: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성경린.jpg|150px|오른쪽|성경린]]&lt;br /&gt;
=='''개요'''==&lt;br /&gt;
성경린(成慶麟, 관제, 1911.9.18~2008.3.5)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성경린(成慶麟)&lt;br /&gt;
* 아호 = 관제&lt;br /&gt;
* 전공 = 거문고&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1-2008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lt;br /&gt;
&lt;br /&gt;
원문보기: &lt;br /&gt;
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080306/8552055/1#csidx1a0490c79a33a9a82e1bcc47f8d50ec&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45년 구왕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50년 국립국악원 악사장&lt;br /&gt;
* 1950년 국악사양성소 부소장&lt;br /&gt;
*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 1961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61년 국악사양성소 소장&lt;br /&gt;
* 1972년 국립국악고등학교 초대교장&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의 아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음악독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수상집 雅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조선의 민요》&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설》&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의 무용》&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음악논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국악감상》&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8년 《나의 人生觀: 노을에 띄운 가락》&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9년 《韓國傳統舞踊》&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85년 《世宗時代의 音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2000년 《국악학논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B1%EA%B2%BD%EB%A6%B0</id>
		<title>성경린</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B1%EA%B2%BD%EB%A6%B0"/>
				<updated>2017-06-26T08:15: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성경린.jpg|150px|오른쪽|성경린]]&lt;br /&gt;
=='''개요'''==&lt;br /&gt;
성경린(成慶麟, 관제, 1911.9.18~2008.3.5)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성경린(成慶麟)&lt;br /&gt;
* 아호 = 관제&lt;br /&gt;
* 전공 = 거문고&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1-2008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lt;br /&gt;
&lt;br /&gt;
원문보기: &lt;br /&gt;
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080306/8552055/1#csidx1a0490c79a33a9a82e1bcc47f8d50ec&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50년 국립국악원 악사장&lt;br /&gt;
*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 1961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72년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의 아악》&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음악독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수상집 雅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조선의 민요》&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2년 《국악개설》&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의 무용》&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음악논고》&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국악감상》&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8년 《나의 人生觀: 노을에 띄운 가락》&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9년 《韓國傳統舞踊》&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85년 《世宗時代의 音樂》&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2000년 《국악학논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B1%EA%B2%BD%EB%A6%B0</id>
		<title>성경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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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08:08:4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성경린.jpg|150px|오른쪽|성경린]]&lt;br /&gt;
=='''개요'''==&lt;br /&gt;
성경린(成慶麟, 관제, 1911.9.18~2008.3.5)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성경린(成慶麟)&lt;br /&gt;
* 아호 = 관제&lt;br /&gt;
* 전공 = 거문고&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1-2008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lt;br /&gt;
&lt;br /&gt;
원문보기: &lt;br /&gt;
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080306/8552055/1#csidx1a0490c79a33a9a82e1bcc47f8d50ec&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50년 국립국악원 악사장&lt;br /&gt;
*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 1961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72년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92년 《국악학논총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8년 《나의 인생론, 노을에 띄운 가락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한국의 무용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5년 《아악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9년 《조선의 민요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음악독본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76년 《국악감상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47년 《조선의 아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B4%EB%B3%B5%EA%B8%B8(%EC%A3%BC%ED%99%98)</id>
		<title>이복길(주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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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6-26T08:07: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jy85: 새 문서: 이주환 =='''개요'''== 이주환(李珠煥, 소남(韶南), 1909~1972)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lt;/p&gt;
&lt;hr /&gt;
&lt;div&gt;[[파일:이주환.jpg|150px|오른쪽|이주환]]&lt;br /&gt;
=='''개요'''==&lt;br /&gt;
이주환(李珠煥, 소남(韶南), 1909~1972)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이주환(李珠煥)&lt;br /&gt;
* 아호 = 소남(韶南)&lt;br /&gt;
* 전공 = 피리&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09-1972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lt;br /&gt;
소남 이주환은 1909년 서울출생으로 이왕직아악부 3기생으로 입소하여 우리음악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lt;br /&gt;
국립국악원 초대 원장으로 있으면서 국악사양성소를 부설, 국악교육을 실시하고 초대 소장을 겸하면서 시조창의 보급을 위하여 아악부에 월례시조강습회를 개설하고 이어 성경린(成慶麟), 이병기(李秉岐)등과 함께 시조연구회를 창설하였다.&lt;br /&gt;
원래 전공은 피리였으나, 하규일(河圭一)에게 가곡·가사·시조를 배워 일가를 이루어 1969년과 1971년 가곡·가사의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lt;br /&gt;
1954년 예술원 회원이 되고, 1962년 국립국악원 고문,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인 가곡기능보유자, 1971년 동 제41호인 가사보유자로 지정되고, 1956년 국악상, 1958년 서울시문화상, 1968년 대통령표창장 등을 받았다. &lt;br /&gt;
그는 매달 정례 시조 강습을 가져 국악인구의 저변확대에 노력하는 등 정가의 전수와 보급을 위해 혁혁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37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장&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46년 구왕궁 아악부 아악사장&lt;br /&gt;
* 1951년 국립국악원 초대원장&lt;br /&gt;
* 1951년 국악사양성소 초대소장 &lt;br /&gt;
*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 가곡 보유자 지정&lt;br /&gt;
*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보유자 지정&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8년 《고금시조선(古今時調選)》&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59년 《가곡보(歌曲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0년 《가사보(歌詞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2년 《속가곡보(續歌曲譜)》&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소남가곡선집(韶南歌曲選集)》&lt;br /&gt;
* &amp;lt;b&amp;gt;저서&amp;lt;/b&amp;gt; 1963년 《시조창연구(時調唱硏究)》&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71년 《소남가곡선집》&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72년 《한국음악선집 제1집 태평가》&lt;br /&gt;
* &amp;lt;b&amp;gt;음반&amp;lt;/b&amp;gt; 1989년 《이주환 가곡 가사 전집》&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B1%EA%B2%BD%EB%A6%B0</id>
		<title>성경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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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성경린.jpg|150px|오른쪽|성경린]]&lt;br /&gt;
=='''개요'''==&lt;br /&gt;
성경린(成慶麟, 관제, 1911.9.18~2008.3.5)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성경린(成慶麟)&lt;br /&gt;
* 아호 = 관제&lt;br /&gt;
* 전공 = 거문고&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1-2008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lt;br /&gt;
&lt;br /&gt;
원문보기: &lt;br /&gt;
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080306/8552055/1#csidx1a0490c79a33a9a82e1bcc47f8d50ec&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50년 국립국악원 악사장&lt;br /&gt;
*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 1961년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72년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1992년 《국악학논총저서》&lt;br /&gt;
* 1978년 《나의 인생론, 노을에 띄운 가락저서》&lt;br /&gt;
* 1976년 《한국의 무용저서》&lt;br /&gt;
* 1975년 《아악저서》&lt;br /&gt;
* 1949년 《조선의 민요저서》&lt;br /&gt;
* 1947년 《조선음악독본저서》&lt;br /&gt;
* 1976년 《국악감상저서》&lt;br /&gt;
* 1947년 《조선의 아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B1%EA%B2%BD%EB%A6%B0</id>
		<title>성경린</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B1%EA%B2%BD%EB%A6%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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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성경린.jpg|150px|오른쪽|성경린]]&lt;br /&gt;
=='''개요'''==&lt;br /&gt;
성경린(成慶麟, 관제, 1911.9.18~2008.3.5)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성경린(成慶麟)&lt;br /&gt;
* 아호 = 관제&lt;br /&gt;
* 전공 = 거문고&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1-2008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lt;br /&gt;
&lt;br /&gt;
원문보기: &lt;br /&gt;
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080306/8552055/1#csidx1a0490c79a33a9a82e1bcc47f8d50ec&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41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50 국립국악원 악사장&lt;br /&gt;
* 1954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 1961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72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1992년 《국악학논총저서》&lt;br /&gt;
* 1978년 《나의 인생론, 노을에 띄운 가락저서》&lt;br /&gt;
* 1976년 《한국의 무용저서》&lt;br /&gt;
* 1975년 《아악저서》&lt;br /&gt;
* 1949년 《조선의 민요저서》&lt;br /&gt;
* 1947년 《조선음악독본저서》&lt;br /&gt;
* 1976년 《국악감상저서》&lt;br /&gt;
* 1947년 《조선의 아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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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경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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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Ljy85: &lt;/p&gt;
&lt;hr /&gt;
&lt;div&gt;[[파일:성경린.jpg|150px|오른쪽|성경린]]&lt;br /&gt;
=='''개요'''==&lt;br /&gt;
성경린(成慶麟, 관제, 1911.9.18~2008.3.5)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이름 = 성경린(成慶麟)&lt;br /&gt;
* 아호 = 관제&lt;br /&gt;
* 전공 = 거문고&lt;br /&gt;
* 출생지 = 서울시&lt;br /&gt;
* 출생-사망 = 1911-2008  &lt;br /&gt;
&lt;br /&gt;
=='''음악활동'''==&lt;br /&gt;
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lt;br /&gt;
&lt;br /&gt;
원문보기: &lt;br /&gt;
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080306/8552055/1#csidx1a0490c79a33a9a82e1bcc47f8d50ec&lt;br /&gt;
&lt;br /&gt;
=='''주요경력'''==&lt;br /&gt;
* 1926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lt;br /&gt;
* 1931 이왕직아악부 아악수&lt;br /&gt;
* 1941 이왕직아악부 아악사&lt;br /&gt;
* 1950 국립국악원 악사장&lt;br /&gt;
* 1954 대한민국예술원 회원&lt;br /&gt;
* 1961 국립국악원 원장&lt;br /&gt;
* 1972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lt;br /&gt;
 &lt;br /&gt;
=='''주요작품 및 저서'''==&lt;br /&gt;
* &amp;lt;&amp;lt;조선음악독본&amp;gt;&amp;gt;&lt;br /&gt;
* &amp;lt;&amp;lt;조선의 아악&amp;gt;&amp;gt;&lt;br /&gt;
* &amp;lt;&amp;lt;조선의 민요&amp;gt;&amp;gt;&lt;br /&gt;
* &amp;lt;&amp;lt;한국음악논고&amp;gt;&amp;gt;&lt;br /&gt;
* &amp;lt;&amp;lt;한국의 무용&amp;gt;&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div&gt;</summary>
		<author><name>Ljy85</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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