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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H 교육용 위키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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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대동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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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 내용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 Meta Data ==&lt;br /&gt;
 타입 : 개념&lt;br /&gt;
 한글항목명 : 대동법&lt;br /&gt;
 한자항목명 : 大同法&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 요약 : [[조선 KU |조선시대]]에 공물(貢物:특산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lt;br /&gt;
&lt;br /&gt;
[[조선 KU |조선시대]] 공물제도는 각 지방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바치게 하였는데, 생산에 차질이 생기거나 자연재해로 인해 피해를 입은 경우에도 반드시 특산물로 공물을 바쳐야만 했다. 공물의 이런 폐단을 이용한 관리나 상인이 백성을 대신하여 공물(특산물)을 나라에 바치고 그 대가를 몇배씩 가중하여 백성에게 받아내는 방납(防納:代納)이라는 제도가 있어 백성의 부담이 한층 가중되었다. 더구나 거주지에서 생산되지도 않는 공물의 배정하여 백성을 착취하는 관리가 많았다. 이런 관리들의 모리 행위는 농민의 부담은 가중되었지만 오히려 국가 수입은 감소되었다. 결국 중간 관리와 상인들만 이익을 보는 조세제도는 조선에서 가장 심각한 폐단이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에 대한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율곡 이이|이이]](李珥)는 1569년([[선조]] 2) 저서 《[[동호문답 KU |동호문답]](東湖問答)》에서 대공수미법(貸貢收米法)을 건의하였으나 실시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 KU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부는 군량 부족에 봉착하였다. 그래서 [[조선 KU |조선]]조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특산물을 공물로 바치는 대신에 미곡으로 납세하도록 장려하였다. 그러나 전쟁 중에 군량을 조달하려던 목적을 달성하기는 어려웠다. 전쟁이 소강 상태로 접어든 1594년([[선조]] 27), [[영의정 KU |영의정]] [[유성룡|류성룡]](柳成龍)은 대공수미법을 제안하고 이 제안은 토지 1결에 쌀 2말씩을 징수하도록 하여 그해 가을부터 전국에 시행되었다. 그러나 징수한 쌀의 양이 매우 적고 수시로 현물로 징수하는 일도 많아 1년이 되지 않아 폐지되었다.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KU |임진왜란]]이 끝나자 농민의 공납 부담이 높아지면서 공납의 폐해는 다시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광해군]]이 즉위하자 호조참의 한백겸(韓百謙)은 대공수미법 시행을 제안하고 [[영의정 KU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이를 재청하여 1608년 5월에 [[경기도 KU |경기도]]에 한하여 실시할 것을 명하고 선혜법(宣惠法)이라는 이름으로 9월부터 실시되었다. 중앙에 선혜청(宣惠廳)과 지방에 대동청(大同廳)을 두고 이를 관장하였는데, 경기도에서는 세율을 춘추(春秋) 2기로 나누어 토지 1결(結)에 8말씩, 도합 16말을 징수하여 그 중 14말은 선혜청으로 보내고 2말은 군현에서 사용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23년 [[인조 KU |인조]]가 [[인조반정]]으로 등극한 후 조익(趙翼)의 건의로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되었으나 강원도를 제외한 충청도 전라도의 대동법은 다음 해 폐지되었다. 당시 인조와 [[서인 KU |서인]] 조정에서는 특산물을 공물로 바치는 것은 백성들의 충성심이라고 여겼다. 이후 대동법의 확대 실시론이 간간이 제기되다가 효종 즉위후, 김육(金堉)·조익(趙翼) 등이 삼남에 대동법을 시행하자고 강경히 주장하였다. 그래서 1651년([[효종 KU |효종]] 2) 8월에 충청도에 다시 시행하게 되었다.1658년([[효종 KU |효종]] 9)에는 전라도 연해지역 27개 군현에 시행되었으며 이어 산군(山郡)에도 1662년(현종 3)에 실시되었다. 경상도는 1677년(숙종 3)부터 실시하여 1결에 13말을 징수하였다. 함경도는 전토가 척박하고 군현들간의 사정이 달라 군현별로 징수량과 물종을 다르게 정하는 상정법(詳定法)이 나타나게 되었다. 상정법은 함경도와 비슷한 상황의 황해도와 강원도에 확대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뒤 세액도 12말로 통일하였다. 산간지방이나 불가피한 경우에는 쌀 대신 베·무명·돈[大同錢]으로 대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동법 실시 후에도 별공(別貢)과 진상(進上)은 그대로 존속하였다. 따라서 백성에게 이중 부담을 지우는 경우가 생겼으며, 호(戶)당 징수가 결(結)당 징수로 되었기 때문에 부호의 부담은 늘고 가난한 농민의 부담은 줄었으며, 국가는 전세수입의 부족을 메웠다.&lt;br /&gt;
&lt;br /&gt;
대동법 실시 뒤 등장한 공인(貢人)은 공납 청부업자인 어용상인으로서 산업자본가로 성장하여 수공업과 상업발달을 촉진시켰다. 또한 화폐의 유통을 촉진시키고, 운송활동의 증대를 가져와 교환경제체제로 전환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경제의 변화로 상공인층이 사회적으로 성장하고 농민분화를 촉진시켜 종래의 신분질서가 와해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8071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667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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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함경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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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lt;br /&gt;
== Meta Data ==&lt;br /&gt;
 타입 : 장소&lt;br /&gt;
 한글항목명 : 함경도&lt;br /&gt;
 한자항목명 : 咸鏡道&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 요약 : 함경북도와 함경남도 지역의 [[조선 KU |조선시대]] 이름.&lt;br /&gt;
&lt;br /&gt;
[[이성계|태조]] 때 영흥(永興)과 길주(吉州)의 이름을 따서 영길도(永吉道)라 하였으나, 1416년([[태종 KU |태종]] 16) 함주(咸州)를 함흥부(咸興府)로 승격시켜 관찰사(觀察使)의 본영을 둠으로써 함흥과 길주의 이름을 따 함길도(咸吉道)라 고쳐, 이때 8도가 갖추어졌다. 1467년(세조 13)에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1470년 함흥부가 함흥군으로 강등되고 관찰사 본영을 영흥부로 옮김에 따라, 영흥부와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의 이름을 따서 영안도(永安道)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1509년([[중종]] 4)에 다시 함흥부와 경성(鏡城)도호부의 이름을 따서 함경도가 되었다. 1896년(건양 1)에 함경도를 남 ·북도로 나누어, 함흥부 ·원산부의 2부, 흥남(興南) ·북청(北靑) ·혜산(惠山)의 3읍 및 함주(咸州)를 비롯한 17군(郡)이 함경남도에, 청진부(淸津府)와 웅기(雄基) ·나진(羅津) ·나남(羅南) ·성진(城津) ·화령(和寧) 등 5읍과 경성을 비롯한 11군이 함경북도에 편입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61562&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3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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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함경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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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a Data ==&lt;br /&gt;
 타입 : 장소&lt;br /&gt;
 한글항목명 : 함경도&lt;br /&gt;
 한자항목명 : 咸鏡道&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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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lt;br /&gt;
&lt;br /&gt;
* 요약 : 함경북도와 함경남도 지역의 [[조선KU|조선시대]] 이름.&lt;br /&gt;
&lt;br /&gt;
[[이성계|태조]] 때 영흥(永興)과 길주(吉州)의 이름을 따서 영길도(永吉道)라 하였으나, 1416년([[태종KU|태종]] 16) 함주(咸州)를 함흥부(咸興府)로 승격시켜 관찰사(觀察使)의 본영을 둠으로써 함흥과 길주의 이름을 따 함길도(咸吉道)라 고쳐, 이때 8도가 갖추어졌다. 1467년(세조 13)에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1470년 함흥부가 함흥군으로 강등되고 관찰사 본영을 영흥부로 옮김에 따라, 영흥부와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의 이름을 따서 영안도(永安道)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1509년([[중종]] 4)에 다시 함흥부와 경성(鏡城)도호부의 이름을 따서 함경도가 되었다. 1896년(건양 1)에 함경도를 남 ·북도로 나누어, 함흥부 ·원산부의 2부, 흥남(興南) ·북청(北靑) ·혜산(惠山)의 3읍 및 함주(咸州)를 비롯한 17군(郡)이 함경남도에, 청진부(淸津府)와 웅기(雄基) ·나진(羅津) ·나남(羅南) ·성진(城津) ·화령(和寧) 등 5읍과 경성을 비롯한 11군이 함경북도에 편입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61562&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3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Digerati Wiki]]&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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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원나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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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a Data ==&lt;br /&gt;
 타입 : 개념&lt;br /&gt;
 한글항목명 : 원&lt;br /&gt;
 한자항목명 : 元&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 요약 :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반에 이르는 약 1세기 사이,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거의 동(東)아시아 전역을 지배한 몽골족의 왕국(1271∼1368).&lt;br /&gt;
&lt;br /&gt;
13세기 초, 칭기즈칸에 의해 구축된 몽골제국(蒙古帝國)은 유러시아 대륙의 북방초원에 정치적 기지를 두고, 대륙남방의 농경지대를 그 속령(屬領)으로 삼아 지배한 유목국가(遊牧國家)로, 속령으로부터의 가혹한 수탈과 부정기적인 약탈로써 경제적 욕구를 충족하였다. 그러나 유목제왕(遊牧帝王)과 그를 둘러싼 유목봉건영주층(遊牧封建領主層), 또는 유목민 지배층과 농경민 피지배층 사이에 정치적 ·경제적 모순이 발생하여 제국은 끊임없이 동요되었다. &lt;br /&gt;
&lt;br /&gt;
이와 같이 유목제국에 잠재된 근본적인 결함을 극복하려고 유목과 농경이 공존할 수 있는 중간의 아건조지대(亞乾燥地帶)에 새로운 정치적 기지를 찾아서 강대하고 집권적인 제국(帝國)을 영위하려 한 것이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世祖]이었다. 그는 형 몽케칸[憲宗]를 계승하려 하였던 막내동생 아리크부카를 제거하고 북방의 초원에 웅거한 유목봉건세력의 진출을 막아, 수도를 몽골 고원의 카라코룸에서 화북(華北)에 가까운 상도(上都)와 화북 안에 있는 대도(大都:北京)로 옮겨 화북의 건조농경지대를 중심으로 한 중국식 집권적(集權的) 관료국가의 확립을 꾀하였다. &lt;br /&gt;
&lt;br /&gt;
그가 시도한 정치적 사업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 1271년 《역경(易經)》의 ‘大哉乾元’을 따서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하고 중국 역대왕조의 계보를 잇는 정통왕조임을 내외에 선언하였다. 이어 74년에서 79년에 걸쳐 화이허강[淮河] 이남 지역에 있던 남송(南宋)을 평정해서 명실공히 중국전토를 영유하게 되었는데, 이에 멈추지 않고 일본 ·베트남 ·미얀마 ·자바 등지에도 침략군을 보냈다. &lt;br /&gt;
&lt;br /&gt;
원나라는 쿠빌라이칸이 다스리는 동안에 동아시아 전역의 대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쿠빌라이칸은 몽골제국의 종주권(宗主權)도 계승한 것이라며 서방의 한국(汗國)들(킵차크 ·차가타이 ·오고타이 ·일 한국 등) 위에도 군림하려 해서, 유목적 전통을 고집하는 한국들은 그를 마땅치 않게 여겨 원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대항하였다. &lt;br /&gt;
&lt;br /&gt;
특히 오고타이한국의 왕 카이두는 이웃 차가타이 ·킵차크 한국의 왕들을 설득해서 반(反)쿠빌라이 동맹을 결성하여 원나라 북서변의 요지를 공략하여 쿠빌라이 정권을 위협하였다. 항쟁은 쿠빌라이칸이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는데, 1301년 카이두가 사망함으로써 전운(戰雲)이 가셨다. 이로부터 원나라는 한국들과 친교를 맺고 제국(帝國)의 종주권을 회복하였다. 아시아 전역에는 이른바 ‘몽골족 지배하의 평화’가 찾아와 동 ·서의 문물이 자유롭게 교류하게 되어 국제무역이 번창하였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원나라 내부의 국정이 해이해지기 시작하여 사회적 여러 모순들이 심화되어 갔다. 이에 편승해서 여러 지방에서 크고 작은 폭동이 일어났는데도 중앙에서는 권신(權臣)들이 정쟁(政爭)에 여념이 없었다. 폭동은 확대되어 한족(漢族)에 의한 민족적 반란으로까지 발전하여 주원장(朱元璋:洪武帝)에 의한 명조(明朝)정권이 출현하였다. &lt;br /&gt;
&lt;br /&gt;
68년 원나라는 수도 대도를 [[명나라]]의 군대에 빼앗겨 순제(順帝:토곤 테무르)가 몽골 본토에 쫓김으로써 원나라의 중국지배는 끝이 났다. 그뒤 몽골본토에 터를 잡은 원군은 얼마 동안 명군과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쇠퇴하여 내분(內紛)으로 소멸되었다. 이를 북원(北元)이라 한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B%90%EB%82%98%EB%9D%BC</id>
		<title>원나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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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lt;br /&gt;
== Meta Data ==&lt;br /&gt;
 타입 : 개념&lt;br /&gt;
 한글항목명 : 원&lt;br /&gt;
 한자항목명 : 元&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 요약 :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반에 이르는 약 1세기 사이,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거의 동(東)아시아 전역을 지배한 몽골족의 왕국(1271∼1368).&lt;br /&gt;
&lt;br /&gt;
13세기 초, 칭기즈칸에 의해 구축된 몽골제국(蒙古帝國)은 유러시아 대륙의 북방초원에 정치적 기지를 두고, 대륙남방의 농경지대를 그 속령(屬領)으로 삼아 지배한 유목국가(遊牧國家)로, 속령으로부터의 가혹한 수탈과 부정기적인 약탈로써 경제적 욕구를 충족하였다. 그러나 유목제왕(遊牧帝王)과 그를 둘러싼 유목봉건영주층(遊牧封建領主層), 또는 유목민 지배층과 농경민 피지배층 사이에 정치적 ·경제적 모순이 발생하여 제국은 끊임없이 동요되었다. &lt;br /&gt;
&lt;br /&gt;
이와 같이 유목제국에 잠재된 근본적인 결함을 극복하려고 유목과 농경이 공존할 수 있는 중간의 아건조지대(亞乾燥地帶)에 새로운 정치적 기지를 찾아서 강대하고 집권적인 제국(帝國)을 영위하려 한 것이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世祖]이었다. 그는 형 몽케칸[憲宗]를 계승하려 하였던 막내동생 아리크부카를 제거하고 북방의 초원에 웅거한 유목봉건세력의 진출을 막아, 수도를 몽골 고원의 카라코룸에서 화북(華北)에 가까운 상도(上都)와 화북 안에 있는 대도(大都:北京)로 옮겨 화북의 건조농경지대를 중심으로 한 중국식 집권적(集權的) 관료국가의 확립을 꾀하였다. &lt;br /&gt;
&lt;br /&gt;
그가 시도한 정치적 사업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 1271년 《역경(易經)》의 ‘大哉乾元’을 따서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하고 중국 역대왕조의 계보를 잇는 정통왕조임을 내외에 선언하였다. 이어 74년에서 79년에 걸쳐 화이허강[淮河] 이남 지역에 있던 남송(南宋)을 평정해서 명실공히 중국전토를 영유하게 되었는데, 이에 멈추지 않고 일본 ·베트남 ·미얀마 ·자바 등지에도 침략군을 보냈다. &lt;br /&gt;
&lt;br /&gt;
원나라는 쿠빌라이칸이 다스리는 동안에 동아시아 전역의 대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쿠빌라이칸은 몽골제국의 종주권(宗主權)도 계승한 것이라며 서방의 한국(汗國)들(킵차크 ·차가타이 ·오고타이 ·일 한국 등) 위에도 군림하려 해서, 유목적 전통을 고집하는 한국들은 그를 마땅치 않게 여겨 원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대항하였다. &lt;br /&gt;
&lt;br /&gt;
특히 오고타이한국의 왕 카이두는 이웃 차가타이 ·킵차크 한국의 왕들을 설득해서 반(反)쿠빌라이 동맹을 결성하여 원나라 북서변의 요지를 공략하여 쿠빌라이 정권을 위협하였다. 항쟁은 쿠빌라이칸이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는데, 1301년 카이두가 사망함으로써 전운(戰雲)이 가셨다. 이로부터 원나라는 한국들과 친교를 맺고 제국(帝國)의 종주권을 회복하였다. 아시아 전역에는 이른바 ‘몽골족 지배하의 평화’가 찾아와 동 ·서의 문물이 자유롭게 교류하게 되어 국제무역이 번창하였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원나라 내부의 국정이 해이해지기 시작하여 사회적 여러 모순들이 심화되어 갔다. 이에 편승해서 여러 지방에서 크고 작은 폭동이 일어났는데도 중앙에서는 권신(權臣)들이 정쟁(政爭)에 여념이 없었다. 폭동은 확대되어 한족(漢族)에 의한 민족적 반란으로까지 발전하여 주원장(朱元璋:洪武帝)에 의한 명조(明朝)정권이 출현하였다. &lt;br /&gt;
&lt;br /&gt;
68년 원나라는 수도 대도를 [[명나라]]의 군대에 빼앗겨 순제(順帝:토곤 테무르)가 몽골 본토에 쫓김으로써 원나라의 중국지배는 끝이 났다. 그뒤 몽골본토에 터를 잡은 원군은 얼마 동안 명군과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쇠퇴하여 내분(內紛)으로 소멸되었다. 이를 북원(北元)이라 한다.&lt;br /&gt;
&lt;br /&gt;
[[Digerati Wiki]]&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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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명나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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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a Data ==&lt;br /&gt;
 타입 : 개념&lt;br /&gt;
 한글항목명 : 명&lt;br /&gt;
 한자항목명 : 明&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 요약 : 한족(漢族)이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운 통일왕조(1368∼1644).&lt;br /&gt;
&lt;br /&gt;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족의 지배를 회복한 왕조이다. 명대(明代)는 중국이 근대화하는 시기와 직접 접속되는 시대로서 중요한 성장·변혁기였다.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여 왕권이 강화되었고 이로 인해 정치는 안정되고 상공업이 번성하였다. 이러한 번성으로 도시가 번창하고 문화와 예술이 발달하였다. 하지만 상업의 발달은 부를 균등하게 분배하지 못했고 관리는 점차 부패하고 토지를 잃은 유민이 속출하여 명나라의 명운이 기울기 시작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몽골족과 왜구의 침입으로 혼란을 겪었으며 후기에는 만주족이 세운 후금(後金 : 이후 [[청나라|청나라]]가 됨)이 명나라를 압박하였다. 결국 1643년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 16대 277년만에 명나라는 멸망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93100&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97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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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자 : [[자운서원팀 KU|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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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lt;br /&gt;
&lt;br /&gt;
* 요약 : 한족(漢族)이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운 통일왕조(1368∼1644).&lt;br /&gt;
&lt;br /&gt;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족의 지배를 회복한 왕조이다. 명대(明代)는 중국이 근대화하는 시기와 직접 접속되는 시대로서 중요한 성장·변혁기였다.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여 왕권이 강화되었고 이로 인해 정치는 안정되고 상공업이 번성하였다. 이러한 번성으로 도시가 번창하고 문화와 예술이 발달하였다. 하지만 상업의 발달은 부를 균등하게 분배하지 못했고 관리는 점차 부패하고 토지를 잃은 유민이 속출하여 명나라의 명운이 기울기 시작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몽골족과 왜구의 침입으로 혼란을 겪었으며 후기에는 만주족이 세운 후금(後金 : 이후 [[청나라|청나라]]가 됨)이 명나라를 압박하였다. 결국 1643년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 16대 277년만에 명나라는 멸망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93100&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97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Digerati Wiki]]&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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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청나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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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a Data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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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항목명 : 청&lt;br /&gt;
 한자항목명 : 淸&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 요약 : 명(明)나라 이후 만주족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세운 정복왕조(征服王朝)로서, [[중국 KU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1636∼1912).&lt;br /&gt;
&lt;br /&gt;
만주인은 수렵·어로를 주된 생업으로 하는 퉁구스족의 일파로서 본래 여진(女眞) 또는 여직(女直)이라 불리었다. 그 일부는 12세기에 화베이[華北]로 진출하여 금(金)왕조를 세웠으나, 만주에 잔류한 대부분은 점차 정착농업을 영위하였으며, 명조 말기에는 해서(海西)·건주(建州)·야인(野人)의 3부로 나누어져 명나라의 간접통치를 받고 있었다. 명나라는 여진족의 여러 부족에 대하여 시종 분열정책을 취하였으나, 조선의 임진왜란(1592∼98)을 전후하여 만주에 대한 명나라의 통제력이 이완된 틈을 타서 건주좌위(建州佐衛)의 수장(首長) 누르하치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스스로 한(汗)의 위(位)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흥경(興京)에 도읍하였다. 이 사람이 청의 태조이다.&lt;br /&gt;
&lt;br /&gt;
[[명나라|명나라]]는 이를 제압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사르후의 싸움에 대패하여(1619) 랴오허강[遼河] 동쪽을 잃었다. 이어 일어난 황타이지[皇太極:太宗]는 먼저 [[명나라|명]]과 [[조선 KU |조선]]의 연합을 막기 위해 두 번에 걸쳐 [[조선 KU |조선]]에 침입하였다(1627 ·1636). 또 내몽골로 진출하여 차하르부(部)를 정복하여 대원전국(大元傳國)의 새(璽)를 얻음으로써 1636년 새삼스레 황제의 위에 올라 국호도 대청(大淸)으로 고쳤다. 이 시기에 명왕조의 사회적 모순은 궁정의 당쟁과 농민반란으로 집중되어 나타났는데, 1644년 이자성(李自成)을 지도자로 하는 농민군은 드디어 베이징[北京]에 진입,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때 농민군을 두려워한 지배계급은 청군과 강화(講和), 산하이관[山海關]을 지키고 있던 오삼계(吳三桂)는 자진하여 청군을 관내로 안내하여 베이징을 회복시켰다.&lt;br /&gt;
&lt;br /&gt;
태종의 아들 순치제(順治帝)는 재빨리 이자성 토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그를 후베이[湖北]로 몰아내 궁사(窮死)시킴과 동시에 중국 본토 지배의 대의명분을 획득하였다. 이민족 지배에 대한 저항은 그 후 복왕(福王) ·노왕(魯王) ·당왕(唐王) ·계왕(桂王) 등 구왕족 소위 남명(南明)의 움직임으로 나타났는데, 농민군을 적대시하여 제휴하지 않았으므로 그 명운이 짧아 대세를 회복시키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청조의 중국 통일에 있어서의 적은, 중국 정복에 협력한 평서왕(平西王) 오삼계,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의 삼번(三藩)이었으며, 수 년에 걸친 삼번의 난의 진압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명나라 최후의 유신(遺臣) 정성공(鄭成功)의 자손이 귀순함으로써 청나라는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에 이르러 비로소 전 중국을 통일하였다.&lt;br /&gt;
&lt;br /&gt;
더구나 강희제는 1689년 러시아제국과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음으로써 19세기 중엽까지, 러시아제국이 동진(東進), 남하하는 것을 억제하였다. 또 간간이 분쟁이 일던 조선과의 경계도 정하여 백두산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1712). 또 계속되는 옹정(雍正) ·건륭(乾隆)의 3대에 걸쳐 중앙아시아의 중가르부(準部)를 토벌하고 이에 따라 칭하이[靑海]의 속령화(屬領化)와 티베트 보호와 평화를 촉진시키면서 1759년에는 중가르부 ·위구르(回紇:후의 新疆省)의 지배를 확립하였다. 이리하여 이 3대에 걸쳐 청왕조는 오늘날의 중국 영토의 조형(祖型)이 되는 중국 사상 최대의 판도를 확립함과 아울러, 동아시아 거의 전역을 그 위령(威領)하에 두었고, 내정의 충실에도 힘입어 그 극성기(極盛期)를 가져왔다.&lt;br /&gt;
&lt;br /&gt;
그러나 건륭 말년, 이미 변경에서 조짐을 보이고 있던 이슬람교도 ·먀오족[苗族] 등의 여러 반란은, 얼마 안되어 가경(嘉慶) 연간에 이르자 백련교(白蓮敎)의 후베이[湖北] 등 5개 성에서 대반란으로 폭발하였다. 백련교의 난은 10년(1796~1804)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국가권력의 지주인 8기(八旗:軍隊)의 무력함이 폭로되었으며, 거기다 권신(權臣) 화신(和珅)의 미증유의 수회사건이 상징하듯, 관료정치의 부패로 인하여 청왕조의 지배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유럽 자본주의의 세계 지배의 파두(波頭)가 중국에 들이닥침으로써 결정적인 청왕조의 쇠퇴를 가져왔다.&lt;br /&gt;
&lt;br /&gt;
이미 건륭 연간의 매카트니, 가경 연간에 애머스트 등 두 차례의 특사(特使)를 통해 산업자본의 판로 개척을 기도하다가 거절당한 영국은, 1840년 아편문제로 발단된 분쟁을 계기로 무력에 의해 중국을 개국시켰으며(아편전쟁), 프랑스 ·러시아 ·미국도 그 뒤를 따랐다. 이후 열강의 청조 지배는 중국에 대한 반식민지적 지배의 매체로서의 성격을 짙게 하였고, 따라서 열강의 자본주의(제국주의)에 대한 직접 ·간접의 저항이 중국사 전개의 원동력이 되기에 이르렀다. 아편전쟁을 발화제로 발발한 중국 사상 최대의 농민전쟁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에서, 홍수전(洪秀全) 등이 봉건적 제관계의 폐기를 지향하여 싸우면서, 궁극적으로는 청왕조를 예속시킨 외국 세력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미 그러한 상황을 뜻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태평천국의 난’은 청왕조의 정규군이 아닌, 사실상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등 지방의 한인(漢人) 관료가 조직한 개인집단, 즉 향용(鄕勇:湘軍 ·淮軍)의 힘에 의존하여 진압되었는데, 이 때문에 지방분권적 경향이 강화되고 후의 군벌(軍閥) 할거의 소지를 만듦과 동시에 관계(官界)에서의 한인의 지위를 높이는 결과를 낳아, 그들이 주체가 되어 위로부터의 중국 근대화의 최초의 시도인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적 체제를 옹호하고 보수(保守)하기 위한 군사공업의 이식을 주안으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무파 관료가 기업을 사물화(私物化)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 오히려 민족자본주의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청 ·일전쟁에서의 패배는 이같은 양무파 노선의 파산을 결정적으로 만들었다.&lt;br /&gt;
&lt;br /&gt;
한편, 제국주의시대로 이행(移行)해 가는 심각한 위기감은, 단순히 유럽 선진국의 기술 이식뿐 아니라, 전통체제 그 자체를 변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캉유웨이[康有爲] 등의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運動)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광서제(光緖帝)까지 동조한 변법자강운동도 서태후(西太后) 등 수구파의 반대로 겨우 100일 유신(維新)으로 막을 내렸고, 의화단(義和團)운동을 계기로 한 외국 군대의 베이징 진주로 수구파가 최종적으로 몰락하였을 때는 입헌안(立憲案)을 비롯한 여러 개혁안이 처음으로 채용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중국 민중의 동향은 혁명의 기운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며 멸만흥한(滅滿興漢)의 민족주의는 화교 ·유학생 ·민족자본가의 반(反)봉건주의와 합류, 쑨원[孫文]이 주도하는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에 결집되어 신해혁명(辛亥革命:1911)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므로 1912년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의 퇴위와 함께 청왕조는 종말을 고하였다. 그것은 또한 중국 민중의 전제군주제와의 결별이기도 하였다. 중국의 근대사는 청왕조 말기부터 시작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646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98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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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항목명 : 청&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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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자 : [[자운서원팀 KU|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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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lt;br /&gt;
* 요약 : 명(明)나라 이후 만주족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세운 정복왕조(征服王朝)로서, [[중국KU|중국]] 최후의 통일왕조(1636∼1912).&lt;br /&gt;
&lt;br /&gt;
만주인은 수렵·어로를 주된 생업으로 하는 퉁구스족의 일파로서 본래 여진(女眞) 또는 여직(女直)이라 불리었다. 그 일부는 12세기에 화베이[華北]로 진출하여 금(金)왕조를 세웠으나, 만주에 잔류한 대부분은 점차 정착농업을 영위하였으며, 명조 말기에는 해서(海西)·건주(建州)·야인(野人)의 3부로 나누어져 명나라의 간접통치를 받고 있었다. 명나라는 여진족의 여러 부족에 대하여 시종 분열정책을 취하였으나, 조선의 임진왜란(1592∼98)을 전후하여 만주에 대한 명나라의 통제력이 이완된 틈을 타서 건주좌위(建州佐衛)의 수장(首長) 누르하치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스스로 한(汗)의 위(位)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흥경(興京)에 도읍하였다. 이 사람이 청의 태조이다.&lt;br /&gt;
&lt;br /&gt;
[[명나라|명나라]]는 이를 제압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사르후의 싸움에 대패하여(1619) 랴오허강[遼河] 동쪽을 잃었다. 이어 일어난 황타이지[皇太極:太宗]는 먼저 [[명나라|명]]과 [[조선KU|조선]]의 연합을 막기 위해 두 번에 걸쳐 [[조선KU|조선]]에 침입하였다(1627 ·1636). 또 내몽골로 진출하여 차하르부(部)를 정복하여 대원전국(大元傳國)의 새(璽)를 얻음으로써 1636년 새삼스레 황제의 위에 올라 국호도 대청(大淸)으로 고쳤다. 이 시기에 명왕조의 사회적 모순은 궁정의 당쟁과 농민반란으로 집중되어 나타났는데, 1644년 이자성(李自成)을 지도자로 하는 농민군은 드디어 베이징[北京]에 진입,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때 농민군을 두려워한 지배계급은 청군과 강화(講和), 산하이관[山海關]을 지키고 있던 오삼계(吳三桂)는 자진하여 청군을 관내로 안내하여 베이징을 회복시켰다.&lt;br /&gt;
&lt;br /&gt;
태종의 아들 순치제(順治帝)는 재빨리 이자성 토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그를 후베이[湖北]로 몰아내 궁사(窮死)시킴과 동시에 중국 본토 지배의 대의명분을 획득하였다. 이민족 지배에 대한 저항은 그 후 복왕(福王) ·노왕(魯王) ·당왕(唐王) ·계왕(桂王) 등 구왕족 소위 남명(南明)의 움직임으로 나타났는데, 농민군을 적대시하여 제휴하지 않았으므로 그 명운이 짧아 대세를 회복시키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청조의 중국 통일에 있어서의 적은, 중국 정복에 협력한 평서왕(平西王) 오삼계,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의 삼번(三藩)이었으며, 수 년에 걸친 삼번의 난의 진압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명나라 최후의 유신(遺臣) 정성공(鄭成功)의 자손이 귀순함으로써 청나라는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에 이르러 비로소 전 중국을 통일하였다.&lt;br /&gt;
&lt;br /&gt;
더구나 강희제는 1689년 러시아제국과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음으로써 19세기 중엽까지, 러시아제국이 동진(東進), 남하하는 것을 억제하였다. 또 간간이 분쟁이 일던 조선과의 경계도 정하여 백두산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1712). 또 계속되는 옹정(雍正) ·건륭(乾隆)의 3대에 걸쳐 중앙아시아의 중가르부(準部)를 토벌하고 이에 따라 칭하이[靑海]의 속령화(屬領化)와 티베트 보호와 평화를 촉진시키면서 1759년에는 중가르부 ·위구르(回紇:후의 新疆省)의 지배를 확립하였다. 이리하여 이 3대에 걸쳐 청왕조는 오늘날의 중국 영토의 조형(祖型)이 되는 중국 사상 최대의 판도를 확립함과 아울러, 동아시아 거의 전역을 그 위령(威領)하에 두었고, 내정의 충실에도 힘입어 그 극성기(極盛期)를 가져왔다.&lt;br /&gt;
&lt;br /&gt;
그러나 건륭 말년, 이미 변경에서 조짐을 보이고 있던 이슬람교도 ·먀오족[苗族] 등의 여러 반란은, 얼마 안되어 가경(嘉慶) 연간에 이르자 백련교(白蓮敎)의 후베이[湖北] 등 5개 성에서 대반란으로 폭발하였다. 백련교의 난은 10년(1796~1804)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국가권력의 지주인 8기(八旗:軍隊)의 무력함이 폭로되었으며, 거기다 권신(權臣) 화신(和珅)의 미증유의 수회사건이 상징하듯, 관료정치의 부패로 인하여 청왕조의 지배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유럽 자본주의의 세계 지배의 파두(波頭)가 중국에 들이닥침으로써 결정적인 청왕조의 쇠퇴를 가져왔다.&lt;br /&gt;
&lt;br /&gt;
이미 건륭 연간의 매카트니, 가경 연간에 애머스트 등 두 차례의 특사(特使)를 통해 산업자본의 판로 개척을 기도하다가 거절당한 영국은, 1840년 아편문제로 발단된 분쟁을 계기로 무력에 의해 중국을 개국시켰으며(아편전쟁), 프랑스 ·러시아 ·미국도 그 뒤를 따랐다. 이후 열강의 청조 지배는 중국에 대한 반식민지적 지배의 매체로서의 성격을 짙게 하였고, 따라서 열강의 자본주의(제국주의)에 대한 직접 ·간접의 저항이 중국사 전개의 원동력이 되기에 이르렀다. 아편전쟁을 발화제로 발발한 중국 사상 최대의 농민전쟁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에서, 홍수전(洪秀全) 등이 봉건적 제관계의 폐기를 지향하여 싸우면서, 궁극적으로는 청왕조를 예속시킨 외국 세력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미 그러한 상황을 뜻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태평천국의 난’은 청왕조의 정규군이 아닌, 사실상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등 지방의 한인(漢人) 관료가 조직한 개인집단, 즉 향용(鄕勇:湘軍 ·淮軍)의 힘에 의존하여 진압되었는데, 이 때문에 지방분권적 경향이 강화되고 후의 군벌(軍閥) 할거의 소지를 만듦과 동시에 관계(官界)에서의 한인의 지위를 높이는 결과를 낳아, 그들이 주체가 되어 위로부터의 중국 근대화의 최초의 시도인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적 체제를 옹호하고 보수(保守)하기 위한 군사공업의 이식을 주안으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무파 관료가 기업을 사물화(私物化)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 오히려 민족자본주의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청 ·일전쟁에서의 패배는 이같은 양무파 노선의 파산을 결정적으로 만들었다.&lt;br /&gt;
&lt;br /&gt;
한편, 제국주의시대로 이행(移行)해 가는 심각한 위기감은, 단순히 유럽 선진국의 기술 이식뿐 아니라, 전통체제 그 자체를 변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캉유웨이[康有爲] 등의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運動)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광서제(光緖帝)까지 동조한 변법자강운동도 서태후(西太后) 등 수구파의 반대로 겨우 100일 유신(維新)으로 막을 내렸고, 의화단(義和團)운동을 계기로 한 외국 군대의 베이징 진주로 수구파가 최종적으로 몰락하였을 때는 입헌안(立憲案)을 비롯한 여러 개혁안이 처음으로 채용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중국 민중의 동향은 혁명의 기운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며 멸만흥한(滅滿興漢)의 민족주의는 화교 ·유학생 ·민족자본가의 반(反)봉건주의와 합류, 쑨원[孫文]이 주도하는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에 결집되어 신해혁명(辛亥革命:1911)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므로 1912년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의 퇴위와 함께 청왕조는 종말을 고하였다. 그것은 또한 중국 민중의 전제군주제와의 결별이기도 하였다. 중국의 근대사는 청왕조 말기부터 시작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646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98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Digerati Wiki]]&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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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병자호란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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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lt;br /&gt;
== Meta Data ==&lt;br /&gt;
 타입 : 사건&lt;br /&gt;
 한글항목명 : 병자호란&lt;br /&gt;
 한자항목명 : 丙子胡亂&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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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 요약 : 1636년([[인조KU|인조]] 14) 12월∼1637년 1월에 [[청나라|청나라]]의 제2차 침구(侵寇)로 일어난 [[조선KU|조선]]·[[청나라|청나라]]의 싸움.&lt;br /&gt;
&lt;br /&gt;
1627년 후금(後金)의 조선에 대한 제1차 침입(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하고 양국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을 요구하였다. 또한 1636년 2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臣事)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宣戰諭文)을 내려, 후금과 결전(決戰)할 의사를 굳혔다. &lt;br /&gt;
&lt;br /&gt;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나라|청]](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대신·척화론자(斥和論者)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主和論者)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였다.&lt;br /&gt;
&lt;br /&gt;
12월 2일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청나라|청]]·몽골·한인(漢人)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瀋陽]을 떠나,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백마산성(白馬山城:義州)을 굳게 지켜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선봉장 마부대는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13일에서야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의 침입사실을 알았고, 14일 적은 개성(開城)을 통과하였다. &lt;br /&gt;
&lt;br /&gt;
조정에서는 급히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강화유수 장신(張紳)을 주사대장(舟師大將)으로,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아 강화·서울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 원임대신(原任大臣)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神主)와, 세자비·원손(元孫)·[[효종KU|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을 비롯한 종실(宗室) 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lt;br /&gt;
&lt;br /&gt;
14일 밤 [[인조KU|인조]]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KU|소현세자]](昭顯世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 등에게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명하고, 8도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도록 격문(檄文)을 발하였으며, 명나라에 급사(急使)를 보내어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lt;br /&gt;
&lt;br /&gt;
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청나라 군과의 결전은 불가능하였다. 또한 성 밖에는 청나라 군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기를 일삼으며, 어미는 진중(陣中)에 잡아놓고 그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 거의 모두 굶어죽고 얼어죽었다.&lt;br /&gt;
&lt;br /&gt;
특히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오래 계속되어, 노숙(露宿)한 장수·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기진하여 병들고 얼어죽는 자가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내에서는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金相憲) 등 주전파(主戰派)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여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청나라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우선 인조가 친히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되, 양국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 3명을 잡아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때마침 강화도가 적에게 함락된 소식을 들어, 어쩔 수 없이 최명길 등을 적진에 보내어 항복조건을 교섭하게 하였다. 1월 28일 이에 청군은 용골대·마부대를 보내 다음과 같은 강화조약 조항을 제시하였다.&lt;br /&gt;
&lt;br /&gt;
① [[청나라|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명나라]]에서 받은 고명(誥命)·책인(册印)을 내놓을 것, ③ 조선 왕의 장자·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聖節:중국황제의 생일)·정조(正朝)·동지(冬至)·천추(千秋:중국 황후·황태자의 생일)·경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⑧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己卯年:1639)부터 일정한 세폐(歲幣)를 보낼 것 등이다. &lt;br /&gt;
&lt;br /&gt;
1월 30일 [[인조KU|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청나라는 맹약(盟約)에 따라 [[소현세자KU|소현세자]]·빈궁(嬪宮)·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를 잡아, 2월 15일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KU|조선]]은 완전히 [[명나라|명나라]]와는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후에는 많은 고아들의 수양(收養)문제와, 수만에 이르는(어느 기록에는 50만) 납치당한 이들의 속환(贖還)문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청나라 군은 납치한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贖價)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하였으나, 대부분 잡혀간 이들은 속가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lt;br /&gt;
&lt;br /&gt;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30냥이고 대개 150∼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서 비싼 경우 1,500냥에 이르렀다. 속환은 개인·국가 모두 그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큰 일이었다. 여기에 순절(殉節)하지 못하고 살아돌아온 것은 조상에 대해 죄가 된다 하여, 속환 사녀(士女)의 이혼문제가 사회·정치문제로 대두하였다. 1645년 10년의 볼모생활 끝에 세자와 [[효종KU|봉림대군]]은 환국하였으나, 세자는 2개월 만에 죽었다. [[인조KU|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KU|효종]](봉림대군)은 볼모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북벌(北伐)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2215&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658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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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선왕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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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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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a Data ==&lt;br /&gt;
 타입 : 인물&lt;br /&gt;
 한글항목명 : 인선왕후&lt;br /&gt;
 한자항목명 : 仁宣王后&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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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 요약 : [[조선 KU |조선]] 제17대 왕 [[효종 KU |효종]]의 비. 1631년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려 풍안부부인에 초봉되고, [[병자호란 KU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과 함께 선양에서 8년간의 볼모생활을 하고 돌아와 세자빈이 되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진봉되었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출생~사망&lt;br /&gt;
|1619~1674&lt;br /&gt;
|-&lt;br /&gt;
!본관&lt;br /&gt;
|덕수(德水)&lt;br /&gt;
|-&lt;br /&gt;
!별칭&lt;br /&gt;
|휘호 경렬명헌(敬烈明獻)&lt;br /&gt;
|}&lt;br /&gt;
&lt;br /&gt;
아버지는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덕수(德水) 장씨 장유(張維)이며 어머니 김씨는 [[우의정 KU |우의정]]을 지낸 김상용의 딸이다. 1618년(광해군10) 12월 시흥 장곡동 안골마을에서 출생하였다.&lt;br /&gt;
&lt;br /&gt;
1631년 14세에 [[효종 KU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과 혼인하여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에 봉해졌다. [[병자호란 KU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 KU |소현세자]] 내외와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 KU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가 8년간 심양에서 기거하였고 그곳에서 [[현종 KU |현종]]을 낳았다. 이후 [[소현세자 KU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볼모에서 풀려나 귀국하였으나 독살로 의심되는 의문의 죽음을 맞았으며 한 달뒤 [[효종 KU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세자로 책봉되었다. 장씨는 1646년 3월 소현세자빈이 사사된 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lt;br /&gt;
&lt;br /&gt;
[[인조 KU |인조]]가 죽은 후 [[효종 KU |효종]]은 왕위에 올랐으며 2년 후 장씨는 정식으로 왕비가 되었다. 효종 못지않은 북벌론 지지자였던 인선왕후는 효종과 더불어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굿판을 근절하고 금주령을 내리는 한편 이불의 색을 적색과 청색의 두가지 색으로 통일하여 전시에 군복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이렇게 준비된 재원은 모두 북벌 계획에 사용되었다.&lt;br /&gt;
&lt;br /&gt;
이후 1659년 [[효종 KU |효종]]은 머리에 난 종기에 침을 맞다가 피를 너무 많이 쏟아 재위 10년만에 사망하였다. 이로서 북벌론은 물거품이 되었고 아들 [[현종 KU |현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세력이 커진 조정대신들에 의해 실권에서 멀어져 갔다. 아들 현종이 즉위한 후 왕대비로서 효숙(孝肅)의 존호를 받았다. 소생으로는 [[현종 KU |현종]]과 6명의 공주를 두었다. 인선왕후는 몸이 무척 뚱뚱했다고 전하며 남편 [[효종 KU |효종]]의 북벌 계획의 수행을 못 보고 1674년(현종 15) 57세로 사망하였다.&lt;br /&gt;
&lt;br /&gt;
[[효종 KU |효종]]이 묻혀 있는 [[경기도 KU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 영릉(寧陵)에 쌍릉으로 안장되어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6274&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3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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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장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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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a Data ==&lt;br /&gt;
 타입 : 개념&lt;br /&gt;
 한글항목명 : 장원&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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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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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lt;br /&gt;
&lt;br /&gt;
문•무과에서 수석으로 급제한 자. [[조선 KU |조선 시대]]에 장원 급제자는 문과의 경우 관품이 없는 자는 종6품에, 관품이 있는 자는 4품을 올려주었으며, 무과는 장원 급제자를 포함한 갑과(甲科) 3인으로 관품이 없는 자는 종7품을, 관품이 있는 자는 3품을 올려주었음. 한편 갑과의 둘째는 방안(放眼) 또는 아원(亞元)이라 하고, 세째는 탐화랑(探花郞)이라 하였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8380&amp;amp;cid=85&amp;amp;categoryId=2644 네이버 한국고전용어사전]&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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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a Data ==&lt;br /&gt;
 타입 : 개념&lt;br /&gt;
 한글항목명 : 사마시&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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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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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lt;br /&gt;
&lt;br /&gt;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선발하는 과거 시험.&lt;br /&gt;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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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4805&amp;amp;cid=85&amp;amp;categoryId=2644 네이버 한국고전용어사전]&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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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lt;br /&gt;
== Meta Data ==&lt;br /&gt;
 타입 : 개념&lt;br /&gt;
 한글항목명 : 사마시&lt;br /&gt;
 한자항목명 : 司馬試 &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선발하는 과거 시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4805&amp;amp;cid=85&amp;amp;categoryId=2644 네이버 한국고전용어사전]&lt;br /&gt;
&lt;br /&gt;
[[Digerati Wiki]]&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9%80%EC%88%98%ED%9D%A5_KU</id>
		<title>김수흥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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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 Meta Data ==&lt;br /&gt;
 타입 : 인물&lt;br /&gt;
 한글항목명 : 김수흥&lt;br /&gt;
 한자항목명 : 金壽興&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 요약 : [[조선KU|조선]] 중기의 문신. [[효종KU|효종]] ·[[현종KU|현종]] 때 여러 관직을 지냈다. 1674년 [[영의정KU|영의정]]으로 [[장렬왕후KU|자의대비]] [[예송논쟁|복상문제]]를 정할 때, [[남인KU|남인]]의 기년설에 대해 대공설을 주장하다가 부처될 뻔 하였다. 1689년 [[남인KU|남인]]이 집권하자 장기에 유배되었다가 죽었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출생~사망&lt;br /&gt;
|1626~1690&lt;br /&gt;
|-&lt;br /&gt;
!본관&lt;br /&gt;
|안동&lt;br /&gt;
|-&lt;br /&gt;
![[자KU|자]]&lt;br /&gt;
|기지&lt;br /&gt;
|-&lt;br /&gt;
!호&lt;br /&gt;
|퇴우당,동곽산인&lt;br /&gt;
|-&lt;br /&gt;
!시호&lt;br /&gt;
|문익&lt;br /&gt;
|-&lt;br /&gt;
!활동분야&lt;br /&gt;
|행정,정치&lt;br /&gt;
|-&lt;br /&gt;
!주요저서&lt;br /&gt;
|《퇴우당집》&lt;br /&gt;
|}&lt;br /&gt;
&lt;br /&gt;
본관 안동. 자 기지(起之). 호 퇴우당(退憂堂)·동곽산인(東郭散人). 시호 문익(文翼). [[영의정KU|영의정]] 수항(壽恒)의 형. 1648년([[인조KU|인조]] 26) 사마시를 거쳐, 1655년(효종 6) 춘당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수항과 함께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교리(副敎理)·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66년([[현종KU|현종]] 7) 호조판서, 1673년 의금부판사가 되었으며, 영릉(寧陵:효종릉)의 석재(石材)가 갈라진 사건으로 인책되어 수항이 우의정에서 물러나자,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천릉(遷陵)이 결정되자 총호사(摠護使)를 겸임하였다. &lt;br /&gt;
&lt;br /&gt;
1674년 [[영의정KU|영의정]]으로 [[장렬왕후KU|자의대비]](慈懿大妃) [[예송논쟁|복상문제]]를 정할 때, [[남인KU|남인]]의 기년설(朞年說:1년)에 대해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주장하다가 부처(付處)될 뻔하였고, [[현종KU|현종]]이 죽자 양사(兩司)의 탄핵으로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서인KU|서인]](西人)이 집권하자 중추부영사, 1688년 [[영의정KU|영의정]]에 임명되었다. 1689년 다시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장기(長鬐)에 유배, 이듬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2614&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3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AC%B8%EB%AC%98</id>
		<title>문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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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5T14:46:4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 관련 항목 */&lt;/p&gt;
&lt;hr /&gt;
&lt;div&gt;=='''메타데이터'''==&lt;br /&gt;
* 타입: 문화유산&lt;br /&gt;
* 한글명: 문묘&lt;br /&gt;
* 한자명: 文廟&lt;br /&gt;
* 영문명: Confucian Shrine&lt;br /&gt;
* 유형: 유적&lt;br /&gt;
*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141호&lt;br /&gt;
* 편자: [[강혜원]]&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File:Seoul munmyo.JPG|thumb|300px|서울 문묘 및 성균관&amp;lt;ref&amp;gt;[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4624&amp;amp;cid=1621&amp;amp;categoryId=162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묘 기사, 확인일자: 2014.06.0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공자|공자(孔子)]]를 받드는 묘우(廟宇).&amp;lt;ref&amp;gt;[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4624&amp;amp;cid=1621&amp;amp;categoryId=162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묘 기사, 확인일자: 2014.06.0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조선의 문묘===&lt;br /&gt;
[[조선 KU |조선]]에서는 문묘를 [[성균관]]에서 관장하였다. 성균관의 이런 건물들을 묘우(廟宇)라고 한다. 묘우의 주요 건물은 [[대성전|대성전(大成殿)]]으로서 좌우에 [[동무]]·[[서무]]라는 부속 행랑을 두어 예배 대상자를 봉안한다. 그리고 향사 때의 헌관과 집사(執事)들의 재계소(齋戒所)이자 향축(香祝)을 봉안하기 위한 곳으로 [[향관청|향관청(享官廳)]]이 있다.&amp;lt;ref&amp;gt;[http://ko.wikipedia.org/wiki/%EB%AC%B8%EB%AC%98 위키피디아, 문묘 기사, 확인일자: 2014.06.0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서울 문묘===&lt;br /&gt;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3가 에 있는 조선시대의 문묘. 1397년([[이성계|태조]] 6)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인 1398년에 준공되었다.&lt;br /&gt;
1963년 1월 21일, 대성전(大成殿)·[[명륜당|명륜당(明倫堂)]]·[[동무|동무(東廡)]]·[[서무|서무(西廡)]]·[[삼문|삼문(三門)]] 등 모두 5동이 [[보물]] 제141호로 지정되었다.&lt;br /&gt;
서울 문묘는 조선시대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제사와 유학교육을 동시에 담당하던 곳이자, 17세기에 지어진 건물이 현존하고 있는 곳으로서 한국유학사와 건축사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이다.&amp;lt;ref&amp;gt;[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4388&amp;amp;cid=1630&amp;amp;categoryId=163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울문묘 기사, 확인일자: 2014.06.0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우리나라 선현(先賢)의 문묘 종사는 고려 때부터 시작되었다. 고려시대인 1020년([[현종]] 11)과 1022년에 최치원과 설총을 각각 종사하였고, 1319년([[충숙왕]] 6)에는 안향을 종사하였다. [[정몽주]] 등 기타 선현은 조선시대에 종사하였다.&amp;lt;ref&amp;gt;[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32302&amp;amp;cid=371&amp;amp;categoryId=1381 이상해, 한국 미의 재발견 - 궁궐 · 유교건축, 솔출판사, 2004.11.30]&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공자를 비롯한 이른바 [[4성|4성(四聖)]], [[공문10철|공문10철(孔門十哲)]], [[송조6현|송조6현(宋朝六賢)]]과 우리나라 [[동방18현|18현]]의 위판을 봉안하고 봄·가을로 [[석전|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있다.&amp;lt;ref&amp;gt;[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5079&amp;amp;cid=1621&amp;amp;categoryId=162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성전 기사, 확인일자: 2014.06.05]&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 4성(四聖) -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lt;br /&gt;
* 공문10철(孔門十哲) - 비공민손(費公閔損), 염경(冉耕), 염옹(冉雍), 재여(宰予), 단목사(端木賜), 염구(冉求), 중유(仲由), 언언(言偃), 복상(卜商), 전손사(颛孫師).&lt;br /&gt;
* 송조6현(宋朝六賢) - [[주돈이|주돈이(周惇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소옹(邵雍), 장재(張載), 주희(朱熹).&lt;br /&gt;
* 동방18현(東方十八賢) - [[최치원|최치원(崔致遠)]], [[설총|설총(薛聰)]], [[안유|안유(安裕)]], [[정몽주|정몽주(鄭夢周)]], [[정여창|정여창(鄭汝昌)]], [[김굉필|김굉필(金宏弼)]], [[이언적|이언적(李彦迪)]], [[조광조|조광조(趙光祖)]], [[김인후|김인후(金麟厚)]], [[이황|이황(李滉)]], [[성혼|성혼(成渾)]], [[이이|이이(李珥)]], [[조헌|조헌(趙憲)]], [[김장생|김장생(金長生)]], [[송시열|송시열(宋時烈)]], [[김집|김집(金集)]], [[박세채|박세채(朴世采)]], [[송준길|송준길(宋浚吉)]]&lt;br /&gt;
&lt;br /&gt;
=='''관련 항목'''==&lt;br /&gt;
&lt;br /&gt;
* 인물&lt;br /&gt;
** [[공자]]&lt;br /&gt;
** [[이성계|태조]]&lt;br /&gt;
** [[최치원]]&lt;br /&gt;
** [[설총]]&lt;br /&gt;
** [[안유]]&lt;br /&gt;
** [[정몽주]]&lt;br /&gt;
** [[정여창]]&lt;br /&gt;
** [[김굉필]]&lt;br /&gt;
** [[이언적]]&lt;br /&gt;
** [[조광조]]&lt;br /&gt;
** [[김인후]]&lt;br /&gt;
** [[이황]]&lt;br /&gt;
** [[성혼]]&lt;br /&gt;
** [[이이]]&lt;br /&gt;
** [[조헌]]&lt;br /&gt;
** [[김장생]]&lt;br /&gt;
** [[송시열]]&lt;br /&gt;
** [[김집]]&lt;br /&gt;
** [[박세채]]&lt;br /&gt;
** [[송준길]]&lt;br /&gt;
&lt;br /&gt;
* 장소&lt;br /&gt;
&lt;br /&gt;
* 사건&lt;br /&gt;
&lt;br /&gt;
* 문헌&lt;br /&gt;
&lt;br /&gt;
* 개념&lt;br /&gt;
** [[보물]]&lt;br /&gt;
** [[대성전]]&lt;br /&gt;
** [[명륜당]]&lt;br /&gt;
** [[삼문]]&lt;br /&gt;
** [[동무]]&lt;br /&gt;
** [[서무]]&lt;br /&gt;
** [[향관청]]&lt;br /&gt;
** [[4성]]&lt;br /&gt;
** [[공문10철]]&lt;br /&gt;
** [[송조6현]]&lt;br /&gt;
** [[동방18현]]&lt;br /&gt;
** [[석전]]&lt;br /&gt;
&lt;br /&gt;
=='''웹자원'''==&lt;br /&gt;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4624&amp;amp;cid=1621&amp;amp;categoryId=162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묘 기사.]&lt;br /&gt;
# [http://ko.wikipedia.org/wiki/%EB%AC%B8%EB%AC%98 위키피디아, 문묘 기사.]&lt;br /&gt;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4388&amp;amp;cid=1630&amp;amp;categoryId=163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울문묘 기사.]&lt;br /&gt;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32302&amp;amp;cid=371&amp;amp;categoryId=1381 이상해, 한국 미의 재발견 - 궁궐 · 유교건축, 2004, 솔출판사.]&lt;br /&gt;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5079&amp;amp;cid=1621&amp;amp;categoryId=162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성전 기사.]&lt;br /&gt;
# [http://www.skkok.com/default.asp 성균관 홈페이지.]&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Reflist}}&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A0%95%EB%AA%BD%EC%A3%BC</id>
		<title>정몽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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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 내용 */&lt;/p&gt;
&lt;hr /&gt;
&lt;div&gt;== Meta Data ==&lt;br /&gt;
* 타입: 인물&lt;br /&gt;
* 한글항목명 : 정몽주&lt;br /&gt;
* 한자항목명 : 鄭夢周&lt;br /&gt;
* 편자: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http://kadhlab102.com/wiki/index.php/201410325%EC%9E%A5%EC%84%A0%EC%98%81 장선영]&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 출생-사망 : 1337 ~ 1392&lt;br /&gt;
* 본관 : 영일&lt;br /&gt;
* 자 : 달가&lt;br /&gt;
* 호 : 포은&lt;br /&gt;
* 시호 : 문충&lt;br /&gt;
* 별칭 : 초명 몽란·몽룡&lt;br /&gt;
* 활동분야 : 정치, 문학&lt;br /&gt;
* 출생지 : 영천&lt;br /&gt;
* 주요저서 : 《[[포은집]]》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고려 말기 문신 겸 학자.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주자가례]]》를 따라 개성에 [[오부학당 KU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 KU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단심가]]〉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039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7713 두산백과 정몽주]&lt;br /&gt;
&amp;lt;br/&amp;gt; [http://ko.wikipedia.org/wiki/%EC%A0%95%EB%AA%BD%EC%A3%BC 위키피디아 정몽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8%88%EC%86%A1%EB%85%BC%EC%9F%81</id>
		<title>예송논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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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5T14:26:1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 Meta Data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 Meta Data ==&lt;br /&gt;
 타입 : 사건&lt;br /&gt;
 한글항목명 : 예송논쟁&lt;br /&gt;
 한자항목명 : 禮訟論爭&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시대명&lt;br /&gt;
|조선&lt;br /&gt;
|}&lt;br /&gt;
&lt;br /&gt;
[[현종 KU |현종]] 때 [[인조 KU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趙大妃)의 상례(喪禮) 문제를 둘러싸고 [[남인 KU |남인]]과 [[서인 KU |서인]]이 두 차례에 걸쳐 대립한 사건. &lt;br /&gt;
&lt;br /&gt;
1차 예송은 1659년([[효종 KU |효종]] 10) 효종이 죽자 효종의 어머니 조대비의 복상을 서인의 뜻에 따라 기년(朞年, 만 1년)으로 정했는데, 이에 대해 남인 허목(許穆)·윤휴(尹鑴) 등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일어났다. 이들이 효종은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장자(長子)나 다름없으므로 3년(만 2년)으로 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는데 비해, [[송시열 KU |송시열]] 등 서인은 효종은 인조의 둘째왕자이므로 장자의 예로 할 수 없다고 반박했고, 결국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lt;br /&gt;
&lt;br /&gt;
2차 예송은 74년([[현종 KU |현종]] 15) 효종의 비가 죽자, 다시 조대비의 복상을 몇 년으로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당시 집권층인 [[남인 KU |남인]]은 기년으로 정했는데, 이에 대해 [[서인 KU |서인]]은 대공(大功, 8개월)설을 주장했으나 [[남인 KU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논쟁은 단순히 복상 문제를 둘러싼 당파의 대립이 아니라, 왕권을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입장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즉 [[효종 KU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서 장자의 예를 따를 수 없다는 [[서인 KU |서인]]의 견해는 왕권도 일반사대부와 동등하게 취급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신권(臣權)의 강화를 꾀하려는 입장이었다. 반면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왕은 장자의 예를 따라야 한다는 [[남인 KU |남인]]의 견해는 왕권을 일반사대부의 예와 달리 취급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왕권강화를 통해 신권의 약화를 꾀하려는 입장이었다. &lt;br /&gt;
&lt;br /&gt;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양란 이후 중세 질서의 재조(再造)에서, 대지주인 양반지배층 중심의 재조를 할 것인가, 아니면 지주층의 이익을 다소 누르면서 소농 중심의 개혁을 할 것인가의 사회개혁론과 연결된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19017&amp;amp;cid=828&amp;amp;categoryId=828 네이버 한국고중세사사전]&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0%91%EC%88%A0%ED%99%98%EA%B5%AD</id>
		<title>갑술환국</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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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5T10:59:4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 내용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 Meta Data ==&lt;br /&gt;
 타입 : 사건&lt;br /&gt;
 한글항목명 : 갑술환국&lt;br /&gt;
 한자항목명 : 甲戌換局&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 요약 : 1694년([[숙종 KU |숙종]] 20) 폐비민씨(廢妃閔氏)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 KU |남인]](南人)이 화를 입어 실권(失權)하고 [[소론|소론]]과 [[노론 KU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 사건.&lt;br /&gt;
&lt;br /&gt;
[[남인 KU |남인]]은 1689년의 [[기사환국 KU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힘겹게 집권했는데, 기사환국은 남인이 스스로 정치력을 발휘하여 집권한 것이 아니라 서인에 대한 숙종의 염증과 혐오 때문에 얻은 것이었다. 특히 궁녀였던 소의장씨를 두고 서인과 숙종의 갈등의 골이 깊었기 때문에 남인이 집권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남인은 자신들의 실권을 항상 불안하게 여겼으며 언제든 또다시 실각할 수 있다는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당시 노론이었던 김춘택(金春澤)과 소론 한중혁(韓重爀) 등이 폐출된 [[인현왕후 KU |인현왕후]] 민씨의 복위운동을 전개했는데, 함이완이 이런 사실을 남인 민암에게 고변하였고 집권파인 남인은 이를 계기로 반대당인 서인 일파를 축출할 목적으로 김춘택 등 수십 명을 체포하여 국문하였다. &lt;br /&gt;
&lt;br /&gt;
이때 남인들은 민씨 폐출(廢黜)의 원인이 된 [[희빈 장씨 KU |소의장씨]](昭儀張氏:장희빈) 소생의 원자(元子) 정호(定號)에 정치적 생명을 걸고 있었다. 그런 판국에 만일 민씨가 복위하여 다시 왕비가 되면 남인은 또 실권하게 되므로 폐비민씨를 지지하는 김춘택 등 서인을 몰아내려고 하였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숙종의 심경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장씨를 총애하여 [[희빈 장씨 KU |희빈]](禧嬪:희빈장씨)을 삼았으며 아들을 낳자 나중에는 왕비로까지 책봉하였으나, 장씨가 차차 방자한 행동을 취했으므로 그를 싫어하고 민씨를 폐한 일을 후회하게 되었다. 게다가 장씨보다는 무수리 출신의 후궁 최씨(최씨는 후일 영조의 생모가 된다.)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 게다가 궁중 내에서는 최씨의 독살설이 퍼지면서 남인들은 다시 정치적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런 정황으로 마침내 숙종은 남인이었던 민암의 처사를 문제삼았고 김춘택 등의 폐비민씨 복위운동을 옳게 여겨, 민암을 사사(賜死)하고 남인 세력인 권대운(權大運)·목내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을 유배하였으며, 동시에 민씨를 지지했던 소론의 남구만(南九萬)·[[박세채 KU |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을 조정의 요직에 등용하였다. &lt;br /&gt;
&lt;br /&gt;
한편, 기사환국 이후 왕비가 된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고 그때 민씨를 지지하여 2번이나 상소를 올렸다가 사사한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하여 [[김수항 KU |김수항]](金壽恒) 등에게는 작위를 내렸다. 이 옥사의 타격으로 남인은 완전히 정권에서 밀려나 다시 대두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그 대신 서인이 실권을 잡게 되었으며, 그 후부터는 노·소론(老少論) 간에 쟁론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 사건을 갑술옥사(甲戌獄事) 또는 갑술경화(甲戌更化)라고도 하며 이후 남인은 정치력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이후 집권하지 못했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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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희빈 장씨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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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 내용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 Meta Data ==&lt;br /&gt;
 타입 : 인물&lt;br /&gt;
 한글항목명 : 희빈 장씨&lt;br /&gt;
 한자항목명 : 禧嬪張氏&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 요약 : 조선 19대왕 [[숙종KU|숙종]]의 빈이며 20대왕 경종의 생모이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출생~사망&lt;br /&gt;
|1659~1701&lt;br /&gt;
|-&lt;br /&gt;
!본관&lt;br /&gt;
|[[안동KU|안동]]&lt;br /&gt;
|-&lt;br /&gt;
!본명&lt;br /&gt;
|장옥정(張玉貞)&lt;br /&gt;
|-&lt;br /&gt;
!별칭&lt;br /&gt;
|장희빈, 옥산부대빈&lt;br /&gt;
|-&lt;br /&gt;
!국적&lt;br /&gt;
|[[조선KU|조선]]&lt;br /&gt;
|}&lt;br /&gt;
&lt;br /&gt;
본관은 [[안동KU|안동]](仁同)이며, 이름은 옥정(玉貞)으로 전해진다. 아버지는 역관(譯官) 출신인 장형(張炯)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다. 친가와 외가 모두 역관 집안으로 매우 부유한 환경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부인 장응인(張應仁)과 외조부인 윤성립(尹誠立)은 모두 역관으로 벼슬이 정3품과 종4품에 이르렀으며, 당숙인 장현(張炫)은 숙종 때에 역관의 수장인 수역(首譯)을 지냈으며 거부(巨富)로 이름이 높았다.&lt;br /&gt;
&lt;br /&gt;
정확한 시기와 배경은 확인되지 않으나 어린 나이에 나인(內人)으로 뽑혀 입궁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희빈 장씨가 “머리를 따 올릴 때부터” 궁중에 들어와 생활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1680년(숙종 6) 무렵부터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의 총애를 받았으나 숙종의 생모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명으로 궁에서 쫓겨났다. 당시 당숙인 장현도 [[경신환국|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KU|서인]](西人)이 집권한 뒤에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의 심복으로 여겨져 유배되었다.&lt;br /&gt;
&lt;br /&gt;
희빈 장씨는 1683년 [[명성왕후KU|명성왕후]]가 죽은 뒤에야 다시 궁으로 돌아왔으며, 1686년(숙종 12) 숙원(淑媛)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소의(昭儀)로 승격되었다가 1688년 왕자 윤(昀, 뒷날의 경종)을 낳았고, 이듬해 음력 1월 아들이 원자로 책봉되면서 희빈(禧嬪)이 되었다. 당시 [[송시열KU|송시열]](宋時烈) 등의 서인(西人)은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삼으려는 숙종의 뜻에 반대하다가 정권을 [[남인KU|남인]](南人)에게 넘겨주었다. 결국 [[기사환국KU|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이 몰락하면서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KU|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 민씨가 폐비되고, 희빈 장씨가 1689년(숙종 15) 음력 10월 22일에 왕비로 책봉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1694년([[숙종KU|숙종]] 20) [[갑술환국|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인현왕후KU|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었고, 희빈 장씨는 그해 음력 4월 12일에 왕후(王后)의 자리에서 쫓겨나 다시 희빈의 작호를 받았다. 그리고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발고로 거처인 취선당(就善堂)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게 했다는 혐의를 받아 사사(賜死)되었다. 희빈 장씨는 죽은 뒤에 광주(廣州) 진해촌(眞海村, 지금의 [[경기도KU|경기도]] 광주군 오포면)에 매장되었으나, 1969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西五陵) 경내의 대빈묘(大嬪墓)로 옮겨졌다. 아들인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은 1722년(경종 2) 생모인 희빈 장씨를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56557&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3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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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기사환국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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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 Meta Data */&lt;/p&gt;
&lt;h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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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a Data ==&lt;br /&gt;
 타입 : 사건&lt;br /&gt;
 한글항목명 : 기사환국&lt;br /&gt;
 한자항목명 : 己巳換局&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요약 : 1680년([[숙종KU|숙종]] 6)의 경신출척(庚申黜陟)으로 실세하였던 [[남인KU|남인]](南人)이 1689년 [[희빈 장씨KU|희빈장씨]]의 소생인 원자(元子) 정호(定號)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KU|서인]](西人)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일.&lt;br /&gt;
&lt;br /&gt;
[[숙종KU|숙종]]의 계비(繼妃) [[인현왕후KU|인현왕후]] 민씨(閔氏)가 왕비로 책립된 지 여러 해가 되도록 후사를 낳지 못하자, 숙종은 민씨가 왕후로 간택되기 이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던 궁녀 장옥정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며 [[명성왕후KU|명성왕후]]가 사망하자 [[희빈 장씨KU|장옥정]]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여 후궁으로 삼았으며 그러던 차에 장씨가 왕자 윤(昀)을 낳게 되자 일약 정치적 격변을 몰고오게 되었다. 왕자 윤의 출생으로 파급된 여파로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정치 실세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를 두고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고 불렀다.&lt;br /&gt;
&lt;br /&gt;
[[숙종KU|숙종]]은 윤을 원자(元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 장씨KU|희빈]](禧嬪)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때 당시의 집권세력이던 서인은 정비(正妃) 민씨가 아직 나이 젊으므로 그의 몸에서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적자(嫡子)로써 왕위를 계승함이 옳다 하여 원자책봉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남인들은 숙종의 주장을 지지하였고, [[숙종KU|숙종]]은 그 권력이 왕권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성장한 서인의 전횡을 누르기 위하여 남인을 등용하는 한편, 원자의 명호를 자신의 주장대로 정하고 숙원을 희빈으로 책봉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때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KU|송시열]](宋時烈)은 상소를 올려 숙종의 처사를 잘못이라고 간하였다. 숙종은 원자정호와 희빈 책봉이 이미 끝났는데, 한 나라의 원로 정치인이 상소질을 하여 정국(政局)을 어지럽게 만든다고 분개하던 차에 남인 이현기(李玄紀) 등이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이를 기회로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제주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약(賜藥)을 내렸다. 송시열의 사사(賜死)로 된서리를 맞은 서인은 이어서 김수흥(金壽興) ·[[김수항KU|김수항]](金壽恒) 등의 거물 정치인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파직되고, 또는 유배되어 서인은 조정에서 물러나고, 그 대신 권대운(權大運) ·김덕원(金德遠) ·목래선(睦來善) 등의 남인이 정치적 실세로 등용되었다. 이 환국(換局)의 여파로 [[인현왕후KU|인현왕후]] 민씨는 폐출(廢黜)되고, 장희빈은 정비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103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778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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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임진왜란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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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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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a Data ==&lt;br /&gt;
 타입 : 사건&lt;br /&gt;
 한글항목명 : 임진왜란&lt;br /&gt;
 한자항목명 : 壬辰倭亂&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 요약 : 1592년([[선조|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lt;br /&gt;
&lt;br /&gt;
1597년 제2차 침략전쟁을 따로 정유재란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文祿慶長]의 역(役), [[중국KU|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이라고 한다. [[조선KU|조선]] 조정에서는 남해안 지방에 왜구들이 자주 침략하자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장악하는 [[비변사|비변사]](備邊司)라는 합좌기관(合坐機關)을 설치하여 이에 대비하였으나, 선조 때에 지배계급은 당파를 중심으로 분열하여 서로 반목질시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와 같은 파쟁으로 중앙에서는 국방정책조차도 마련하지 않고 변해가는 동양의 국제정세를 [[명나라|명(明)나라]]와의 친선관계만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또 안일 속에서 고식적인 대책에만 만족해하던 지배층은 인접국가인 [[일본|일본]]이나 대륙의 [[여진족|여진족]]의 정치적 변동이나 사항을 구체적으로 탐지하려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16세기 말에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通信使)도 당파적인 엇갈림에 치우쳐 상반된 내용을 보고하였다. 한편 [[율곡 이이KU|이이]](李珥)는 10만 양병설(養兵說)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조선사회는 이미 오랜 평화 속에서 지배계층인 사대부의 편당(偏黨)정치, 기강의 해이, 전세제(田稅制)의 문란 등 여러 폐단으로 인심이 동요되었다. 조정에서는 각 도에 왜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군비를 정비하라는 명령을 내려도 몇 곳을 제외하고는 민폐를 야기시킨다는 원성만 높았으며 이에 동조한 일부 수령들도 전비(戰備)를 중지하라는 장계(狀啓)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대륙침공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은 1585년경부터였고 1587년에 그는 국내 통일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규슈[九州]정벌을 끝마치고 대마도주(對馬島主) 소 요시시게[宗義調]에게 조선 침공의 뜻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조선 사정에 정통한 쓰시마도주는 이 계획이 무모한 것임을 알고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lt;br /&gt;
&lt;br /&gt;
따라서 쓰시마도주는 가신인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로 하여 1587년 조선으로 파견, 일본 국내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 첫번째 일본 사신이 부산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의 영접에 대한 가부와 서계(書契)의 서사(書辭)가 종래와 달리 오만하다 해서 문제가 되어 조정에서는 여러 논의가 있었다. 특히 공주교수(公州敎授) 조헌(趙憲)은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폐(時弊)와 국방을 논하는 등 일본 정벌의 강경론을 주장하자 결국 조정에서는 수로미매(水路迷昧)를 이유로 통신사의 파견을 거절하였다. 도요토미의 첫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다시 쓰시마도주의 알선으로 1588년 10월과 89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조공과 함께 통신사의 파견을 간청하고 앞서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노략질한 조선인을 잡아 보내왔다. 이에 조선 정부는 1590년 3월 황윤길(黃允吉)을 정사(正使), 김성일(金誠一)을 부사(副使), 허성(許筬)을 종사관(從事官)으로 한 통신사 일행을 파견하였고 이들은 이듬해 정월 일본의 답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lt;br /&gt;
&lt;br /&gt;
일본의 답서에는 종래의 외교관례에 따르지 않는 무례한 구절과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뜻하는 글이 있어 침략의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1591년 3월 이들 사신이 복명하는 자리에서 정사 황윤길([[서인KU|서인]])은 왜가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한 데 반해 부사 김성일([[동인|동인]])은 왜가 침범할 동정이 없다는 상반된 보고로 당파적인 엇갈림과 함께 조정의 의견도 통일되지 못하였다. 동인세력은 서인들이 전쟁을 빌미로 정치적 위기를 넘기려한다고 의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어 제3차 일본 사신 일행이 조선 통신사보다 한달 늦게 입경하여 일본이 가도입명(假道入明)하리라는 통고에 조정은 놀라 그 해 5월에 일본의 서계 내용과 함께 왜정(倭情)을 명에 알리는 한편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여 김수(金晬) ·이광(李洸) ·윤선각(尹先覺) 등으로하여금 경상 ·전라 연안의 여러 성을 수축하게 하고 각 진영의 무기를 정비하게 하였다. 신립(申砬) ·이일(李鎰)에게는 변비(邊備)를 순시하게 하는 등 요충지인 영남지방의 방비에 힘을 기울였으나 이미 시기가 늦었다. 이 동안 일본의 침략계획은 더욱 성숙하여 내전을 통해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築城術)·해운술 등을 정비하고 조총(鳥銃)의 대량생산도 진행되었다. 1592년 4월 13일 경상도 동래부 다대포 응봉봉수대(鷹峰烽燧臺)에서는 왜군의 700여 병선(兵船)이 쓰시마를 출항하여 부산포에 이르고 있다는 상황보고가 곧 경상·전라도의 각 감영(監營)과 중앙에 전달되었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경상좌수영군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궤멸되었고 14일에는 왜군 선발대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약 1만 8000 병력이 부산성을 공격하여 십수시간의 혈전 끝에 부산성(釜山城)을 사수하던 부산진첨사(釜山鎭僉使) 정발(鄭撥) 등의 전사로 성을 빼앗겼다. 이튿날 동래(東萊)에 진격한 왜군들과 맞선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 이하 군민(軍民)은 끝까지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lt;br /&gt;
&lt;br /&gt;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군의 후속부대는 계속 상륙해 와서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제2군 2만 2000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군 1만 1000여 병력이 다대포(多大浦)를 거쳐 김해(金海)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등의 9,000여 수군(水軍)이 편성되어 바다에서 이들을 응원하였다. 일본 국내의 잔류병력과 쓰시마 등지의 주둔군 등 일본 침략군의 총병력은 약 20만이었는데 이 중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제1군은 중로(中路)로 동래-양산(梁山)-청도(淸道)-대구(大邱)-인동(仁同)-선산(善山)-상주(尙州)-조령(鳥嶺)-충주(忠州)-여주(驪州)-양근(楊根)-용진(龍津)나루-경성동로(京城東路), 제2군 좌로(左路)는 동래-언양(彦陽)-경주(慶州)-영천(永川)-신녕(新寧)-군위(軍威)-용궁(龍宮)-조령-충주-죽산(竹山)-용인(龍仁)-한강, 제3군 우로(右路)는 김해(金海)-성주(星州)-무계(茂溪)-지례(知禮)-등산(登山)-추풍령(秋風嶺)-영동(永同)-청주(淸州)-경기도의 3로로 나뉘어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lt;br /&gt;
&lt;br /&gt;
4월 17일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으로부터 왜군 침공의 급보가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신립을 도순변사(都巡邊使), 이일을 순변사, 김여물(金汝岉)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여 왜군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김성일을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 김근(金玏)을 좌도안집사(左道安集使)로 삼아 민심수습과 항전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북상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이일에게는 중로(中路)인 조령 방면을, 유극량(劉克良)과 변기(邊器) 등에게는 각기 죽령과 추풍령을 방비하게 하였고 도순변사 신립과 도체찰사(都體察使) 류성룡(柳成龍)으로 하여금 이일을 응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일이 4월 24일 상주에서 가토에게 패하여 충주로 물러나자 왜군은 조령과 죽령 등지에서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충주까지 진격하였다. &lt;br /&gt;
&lt;br /&gt;
이일의 뒤를 이은 신립은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방어작전을 폈으나 패하였다. 이일 등이 죽령·조령·추풍령 등의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출발한 후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守城大將)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北兵使)였던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都元帥)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다. 신립의 패전보고가 있자 4월 30일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개성을 향하여 피란길에 올랐다. 서울이 함락되자 선조는 다시 평양으로 달아났다. 파천에 대한 민심이 거제지자 파천을 주동한 사람은 영의정 이산해로 내몰고, 류성룡은 파천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거짓 죄목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임해군(臨海君)은 함경도로, 순화군(順和君)은 강원도로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였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두 왕자를 붙잡아 왜군에게 인도하였다.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수복을 꾀하고자 하였다. 왕이 달아나자 백성들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고 특히 하삼도(下三道)는 무정부적 혼란상태가 더했다. 왕이 피난해 있는 사이 민란이 일어나 공사노비의 문적이 있는 장례원(掌隷院)과 형조의 건물을 불태우고 경복궁·창덕궁  등 궁궐과 관청에 들어가 약탈을 하였다. 상륙 20일만에 서울은 왜군에게 점령되었으며 서울에 입성한 왜군은 대오를 정비하여 고니시의 부대는 평안도, 가토의 부대는 함경도, 구로다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로를 정하는 한편 서울을 지키는 부대를 두고 경상·강원·전라도 방면으로 진출하여 후방지역을 담당하였다. 강원도·황해도 방면으로 모병하러 간 두 왕자도 왜병의 포로가 되고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왜군에 의해 개성·평양은 부산 상륙 이후 60일도 못 되어 함락, 거의 무방비상태인 전국토는 함경도까지 진출한 왜군에게 짓밟히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서울이 함락되고 함경도 지역까지 왜군의 침략을 당하고 있을 때 해상의 싸움은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하는 왜병을 막아내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편제와 전술은 고려 이래로 왜구 방어 위주였으므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따라서 각도에는 수영(水營)이 있어 이를 수군의 근간으로 하였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으로 침입한 왜선단(倭船團)에 경상좌수영과 우수영은 해상에서 제대로 싸움조차 하지 못한 채 대패하였다. 전라좌수영의 수군절도사로 있던 이순신은 경상우수영으로부터 왜군의 침입보고를 받자 출동하여, 옥포(玉浦)의 첫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한산도(閑山島)·부산 등지에서 계속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한산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진주성(晉州城)싸움·행주산성(幸州山城)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는다.&lt;br /&gt;
&lt;br /&gt;
이순신의 활약으로 해상권을 장악한 조선군으로 인해,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작전은 분쇄되었다. 해상에서의 승리와 함께 육지에서는 부산진·동래의 수성전(守城戰)과 김해성(金海城)의 저항, 경상우방어사(慶尙右防禦使) 조경(趙儆) 휘하의 돌격대장 정기룡(鄭起龍)의 추풍령전투, 밀양 작원(鵲院)에서의 밀양부사 박진(朴晉)의 선전,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李陽元)의 해유령(蟹踰嶺) 승전 등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한편 혼란과 민심의 이산 속에서도 근왕(勤王)을 부르짖는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영남에서는 유림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 등이, 호남지방에서는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호서에서는 조헌(趙憲) 등이, 함경도에서는 정문부(鄭文孚)가 거병하였다. 또한 조선 사대부들에게 천대만 받았던 승려들이 봉기하여 가세하였다. &lt;br /&gt;
&lt;br /&gt;
조헌은 충청도 옥천(沃川)에서 일어나 청주의 왜병을 축출하고 금산(錦山)의 왜병을 공격하다 전사하였고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宜寧)에서 거병하여 의령·창령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적병을 격퇴하였다.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長興)에서 거병하여 금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으며 김천일은 수원에서 거병하여 제2차 진주싸움에 참가하였다. &lt;br /&gt;
&lt;br /&gt;
정문부는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鏡城)·길주(吉州) 등을 회복하고 관동지방의 적을 축출하였다. 이 외에도 대소의 허다한 의병이 봉기했으며 휴정(休靜)·유정(惟政) 같은 승려들이 승병을 거느리고 싸움에 참가하기도 하여 이러한 의병의 활동은 왜군의 군사행동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왕이 파천하는 도중 사신을 명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자 명에서는 조선 땅에서 왜군을 격퇴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파병을 결정하여, 선봉장으로 낙상지(駱尙志)와 사대수(査大受) 등이 먼저 건너오고 이어서 송응창(宋應昌)·이여송(李如松)이 4만 5000의 동정군(東征軍)을 이끌고 조선의 김응서(金應瑞) 등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 이를 탈환하였다. &lt;br /&gt;
&lt;br /&gt;
계속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던 명군은 벽제관(碧蹄館)에서 왜군과 일대 접전이 벌어져 개성으로 퇴각하고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의 군대와 연합,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행주산성에는 전 전라도순찰사 권율(權慄)이 이치(梨峙)싸움에서 승리한 후 명의 원군과 호응하여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웅거하였으나 벽제관싸움에서 명군이 패퇴하자 고립되었다. 권율은 조방장(助防將) 조경, 승장(僧將) 처영(處英)과 함께 약 2,300의 정병으로 행주산성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몇 차례의 격전 끝에 왜군을 물리치자 왜군은 다시 서울 이북에 출병하지 않고 서울 철수를 서두르게 되었다. 임진강을 끼고 조선·명의 연합군과 왜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일본측 고니시의 강화회담 제의로 이덕형(李德馨)과 일본의 야나가와 초신[柳川調信]·겐소[玄蘇] 사이에 강화회담이 시작되어 강화는 교섭단계에 들어갔다. 그 즈음 왜군은 앞서 김시민에게 패퇴한 진주성을 재차 공격해왔는데 김천일·황진(黃進)·최경회(崔慶會) 등이 역전했으나 함락되었다. &lt;br /&gt;
&lt;br /&gt;
두 차례에 걸친 진주싸움은 행주싸움에 못지않은 격전이었고 특히 제1차 진주성싸움은 임진왜란 3대첩에 든다. 조선측의 강화반대에도 불구하고 명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회담은 진척되어 심유경(沈惟敬) 등이 일본에 파견되었고 우리측에서도 황진을 통신사로 보내게 되었다. 강화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갔고 명은 왜군의 재공격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여 주력부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5년간 계속된 명·일간의 강화회의는 1596년 9월 일본 오사카성[大阪城] 회담에서 결렬되었다. 회담이 결렬된 이유는 명에서는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삼고 그 입공(入貢)을 허락한다는 봉공안(封貢案)으로써 국면을 해결지으려 했으나 도요토미는 ① 명의 황녀로써 일본의 후비(后妃)로 삼게 할 것, ② 조선의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③ 감합인(勘合印:貿易證印)을 복구할 것, ④ 조선의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을 요구하였다. &lt;br /&gt;
&lt;br /&gt;
심유경은 이 요구를 명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명은 봉공안에 의해 1596년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칙서와 금인(金印)을 보냈는데, 화의는 결렬되고 이듬해 왜군은 재차 침입하게 되었다. 이 때에는 조선도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경상도의 금오(金烏)·공산(公山)·화왕산성(火旺山城)을 비롯하여 각도의 산성을 수축하는 등 군비를 갖추었고 양호(楊鎬)를 경리, 마귀(麻貴)를 제독(提督)으로 한 명의 원군 5만 5000도 즉시 출동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맴도는 데 그쳤다. 1596년 12월에 고니시군이 부산에 상륙하고 이듬해 1월에는 가토군이 다대포(多大浦)에 상륙하여 양산(梁山)을 함락하고 서생포(西生浦)에 진을 쳤다. 정유재란 때의 왜군 총병력은 14만 1500으로, 수군도 강화되었다. 왜군은 임진년 당시와는 달리 경상·충청·전라도의 완전 점령을 전략으로 하여 전주를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워, 7월 말부터 좌군은 남해(南海)·사천(泗川)·고성(固城)·하동(河東) 방면에서, 우군은 광양(光陽)·순천(順天)·김해(金海)·창원(昌原) 방면에서, 가토는 밀양(密陽)·초계(草溪)·거창(居昌) 등을 거쳐 각기 전주로 향하였다. 왜군은 황석산성(黃石山城)의 싸움에서 고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고령(高靈)에서 상주목사 정기룡(鄭起龍)군에 패한 데 이어 직산(稷山) 싸움에서도 패하여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순천·울산 등지의 연해안에 진주하게 되었다. 해전에서는 1597년 1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왜군의 본거지를 공격하지 않고 소극적이라는 죄명으로 하옥되고 원균(元均)이 그 후임이 되었으나 7월의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원균과 전라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의 수군이 전멸하였다. 이에 다시 이순신이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남은 12척의 병선으로 전선을 수습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명량(鳴梁)대첩에서 적함 133척을 맞아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두고 다시 제해권을 회복하였다.  &lt;br /&gt;
&lt;br /&gt;
8월 도요토미가 죽자 이를 계기로 왜군은 총퇴각하였다. 왜군의 가토가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에서 퇴각하고 순천의 고니시도 퇴각하려 했으나 이순신의 수군이 이를 차단하자 왜의 수군 300여 척이 이를 후원하려 노량(露梁)에 이르러 최후의 해전이 벌어졌다. 이순신은 명의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과 합세하여 왜선 200여 척을 격파하여 임진왜란 최후의 이 해전에서 승리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로써 전후 7년간에 걸쳤던 왜란은 조선·명·일본 3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특히 싸움터였던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으며 정치·경제·문화·사회·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따라서 위정자들의 급선무는 전란으로 인한 문물의 파괴, 재력의 탕진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정치·군사적인 면에 있어서는 비변사(備邊司)의 강화와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사기구의 개편이 시작되었다. &lt;br /&gt;
&lt;br /&gt;
또한 난중에는 각종 무기가 제작되어 이장손(李長孫)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변이중(邊以中)은 화차(火車)를 각기 발명하였고 왜의 조총과 명군이 사용한 서양식 대포인 불랑기포(佛郞機砲)도 모조하여 사용하였다. 전화로 인한 농촌의 황폐, 은결(隱結)의 증가, 국가질서의 문란 등으로 대동법(大同法)의 실시, 면세전(免稅田) 확대의 방지, 균역법(均役法)의 시행, 기민(饑民)을 위한 환곡(還穀)·모곡(耗穀)의 회수책 등이 제도화되었다. 한편 혼란한 사회와 민심의 흉흉함을 틈타 이몽학(李夢學)의 난 등 사방에서 일어나는 민란과 함께 시행된 속오군(束伍軍)제도, 공명첩(空名帖)의 발행 등은 조선의 신분제도 붕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문화적 손실로는 왜병의 방화로 불국사·경복궁 등의 건물과 사고(史庫)에 보관 중이던 역대 왕조의 실록·서적 등이 소실되고 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하였다. 한편 전쟁으로 인한 질병의 만연으로 질병퇴치를 위한 의학서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이 편찬되었고 사상적인 측면으로는 의병·승병을 통한 애국심의 발로와 자아반성과 함께 명의 내원(來援)에 대한 사대사상이 고조되는 반면에 왜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사상이 더욱 강해졌다.&lt;br /&gt;
&lt;br /&gt;
전란 중에 대두하기 시작한 여진의 청(淸)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망하고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대신 도쿠가와[德川]의 막부(幕府)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침략의 결과로 조선으로부터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술을 처음으로 도입하게 되었고 포로로 잡아간 도자기 기술자에 의해 획기적으로 요업(窯業)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약탈하여 간 많은 서적은 성리학(性理學) 등 그들의 학문에 크게 기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7019&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3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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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 Meta Data ==&lt;br /&gt;
* 타입: 문화재&lt;br /&gt;
* 한글항목명: 권율장군묘&lt;br /&gt;
* 한자항목명: 權慄將軍墓&lt;br /&gt;
* 편자: [[자운서원팀 KU|자운서원팀]] [http://kadhlab102.com/wiki/index.php/201410315%EC%98%A4%EC%9C%A4%EB%AF%B8 오윤미]&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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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 ==&lt;br /&gt;
* 지정종목: 시도기념물&lt;br /&gt;
* 지정번호: '''경기기념물 제2호'''&lt;br /&gt;
* 지정일: 1972년 05월 04일 &lt;br /&gt;
* 소재지: 경기도 양주시 권율로 223(장흥면 석현리 산 168-1)&lt;br /&gt;
* 시대: 조선&lt;br /&gt;
* 성격: 묘&lt;br /&gt;
&amp;lt;br/&amp;gt;&lt;br /&gt;
권율의 호는 만취당(晩翠堂), 본관은 [[안동KU|안동]](安東)이며 1537년(중종 31) 강화군 영동에서 태어났다. 1582년(선조 15) 과거에 급제하고 55세 때는 의주목사(義州牧使)로 부임하여 북방 여진족을 방어하였다. [[임진왜란KU|임진왜란]] 때에는 1593년(선조 26) [[행주대첩KU|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나라에 큰 전공을 세웠고, [[행주대첩KU|행주대첩]] 후 도원수로 임명되어 전군을 지휘하였다. 1599년(선조 32) 권율이 죽자 나라에서는 영의정을 추증하고 [[영가부원군KU|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을 추봉하여 공적을 기렸다.&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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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92942&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3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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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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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십이지신상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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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a Data ==&lt;br /&gt;
 타입 : 문화유산&lt;br /&gt;
 한글항목명 : 십이지신상&lt;br /&gt;
 한자항목명 : 十二支神像&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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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 요약 : 십이지를 상징하는 수면인신상(獸面人身像).&lt;br /&gt;
&lt;br /&gt;
십이지라는 개념은 [[중국KU|중국]]의 은대(殷代)에서 비롯되었으나, 이를 방위(方位)나 시간에 대응시킨 것은 대체로 한대(漢代) 중기의 일로 추정된다. 다시 이것을 쥐[子]·소[丑]·범[寅]·토끼[卯]·용[辰]·뱀[巳]·말[午]·양[未]·원숭이[申]·닭[酉]·개[戌]·돼지[亥] 등 열두 동물과 대응시킨 것은 훨씬 후대의 일로, 불교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대(唐代)에 와서는 십이지생초(十二支生肖)를 조각한 석재 및 토우가 묘지장식에 나타났다.&lt;br /&gt;
&lt;br /&gt;
한국의 경우는 [[호석KU|호석]](護石)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한 경주(慶州) 괘릉(掛陵)이나 김유신묘(金庾信墓)가 최초의 것으로 보인다. 성덕왕릉(聖德王陵)은 호석이 넘어지지 않도록 삼각형 수석(袖石)을 받치고 그 사이에 따로 환조(丸彫) 십이지신상을 세운 특이한 예이며, 그 이후의 왕릉에는 괘릉과 마찬가지로 호석면에 십이지신상을 양각하였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입상(立像)뿐만 아니라 좌상(坐像)도 나타나고, 신라의 예처럼 면석(面石)에만 조각한 것과 반대로 안에 끼운 널판돌에 새기기도 했으며, 음각(陰刻)한 것도 간혹 나타난다.&lt;br /&gt;
&lt;br /&gt;
[[조선KU|조선시대]]에서는 전대와 거의 같으나, [[인조KU|인조]]의 장릉(長陵)에서부터는 십이지신상 대신에 모란무늬[牧丹文]가 나타나게 된다. 십이지신상은 수호신으로 호석뿐만 아니라 현실(玄室) 내부에 벽화로 그린 경우도 있으며, 원원사지(遠願寺址) 3층석탑이나 황복사지(皇福寺址)에서 찾아볼 수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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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19914&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057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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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오부학당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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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a Data ==&lt;br /&gt;
 타입 : 문화유산&lt;br /&gt;
 한글항목명 : 오부학당&lt;br /&gt;
 한자항목명 : 五部學堂&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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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lt;br /&gt;
&lt;br /&gt;
* 요약 : 고려 말 조선 초기에 두었던 학제(學制).&lt;br /&gt;
&lt;br /&gt;
학당은 고려시대의 초등교육기관으로 1261년(원종 2)에 동 ·서부에 학당을 설치하여 별감(別監)을 두고 가르친 것이 처음이다. 개경으로 환도한 후, 동·서학당을 개편하여 5부 학당으로 그 체제를 변경하였다. &lt;br /&gt;
&lt;br /&gt;
[[조선KU|조선]]에 들어와서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두어 서울을 동 ·서 ·중 ·남 ·북의 5부로 나누어 여기에 학교를 각각 하나씩 설치하기로 하여 5부학당[五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북부학당은 끝내 설치하지 못하고 1445년(세종 27)에 폐지되어, 동학(東學) ·서학(西學) ·중학(中學) ·남학(南學) 등 4부학당만이 존속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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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28193&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732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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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선죽교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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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 내용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 Meta Data ==&lt;br /&gt;
 타입 : 문화유산&lt;br /&gt;
 한글항목명 : 선죽교&lt;br /&gt;
 한자항목명 : 善竹橋&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 요약 :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교(石橋).&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지정번호&lt;br /&gt;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59호&lt;br /&gt;
|-&lt;br /&gt;
!소재지&lt;br /&gt;
|개성시 선죽동&lt;br /&gt;
|-&lt;br /&gt;
!시대&lt;br /&gt;
|고려시대&lt;br /&gt;
|-&lt;br /&gt;
!종류/분류&lt;br /&gt;
|다리&lt;br /&gt;
|-&lt;br /&gt;
!크기&lt;br /&gt;
|길이 8.35m, 너비 3.36m&lt;br /&gt;
|}&lt;br /&gt;
&lt;br /&gt;
북한의 국보급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59호로 변경되었다. 개성 남대문에서 동쪽 약 1km 거리의 자남산 남쪽 개울에 있는 다리이다. 태조 왕건이 919년([[이성계KU|태조]] 1) 송도(지금의 개성시)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lt;br /&gt;
&lt;br /&gt;
길이 8.35m, 너비 3.36m의,  화강석으로 축조된 전형적인 널다리이다. 고려시대에는 돌난간이 없었는데, 1780년(정조 4) 정몽주의 후손들이 난간을 설치하였다. &lt;br /&gt;
&lt;br /&gt;
선죽교는 1392년(조선 태조 즉위년) [[정몽주|정몽주]]가 후에 [[태종KU|태종]]이 된 이방원의 일파에게 피살된 장소이기도 하다. 원래 선지교(善地橋)라 불렸는데, 정몽주가 피살되던 날 밤 다리 옆에서 참대가 솟아나왔다 하여 선죽교(善竹橋)로 고쳐 불렀다고 전한다. &lt;br /&gt;
&lt;br /&gt;
지금은 통행을 제한하는 대신 행인을 위하여 바로 옆에 좁은 돌다리를 가설하였다. 다리 옆에 비각 안에 정몽주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기(基)가 서 있다. 또 선죽교 서쪽으로 정몽주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숭양서원(북한 국보 128)과 표충비(表忠碑)가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5781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2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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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망주석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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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Created page with &amp;quot; == Meta Data ==  타입 : 문화유산  한글항목명 : 망주석  한자항목명 : 望柱石  편자 : 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amp;quot;&lt;/p&gt;
&lt;hr /&gt;
&lt;div&gt;&lt;br /&gt;
== Meta Data ==&lt;br /&gt;
 타입 : 문화유산&lt;br /&gt;
 한글항목명 : 망주석&lt;br /&gt;
 한자항목명 : 望柱石&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망두석(望頭石) ·망주석표(望柱石表)라고도 한다. 기둥의 윗부분이 보주형두(寶珠形頭)로 되어 돌받침 위에 올린다. 망주석은 중국에서 전하여 통일신라에서 발전되기 시작하여, 8세기경에는 왕릉의 석물 배치가 정비됨에 따라 묘제석물(墓制石物)로 자리를 굳혀 오늘날에 이른다. 무덤의 시설형식에 따라 묘주(墓主)의 사회 신분을 나타내는데, 무덤을 지키는 수호 신앙과 기념적인 기능을 가진 석조물이다. 중국의 《진서(陳書)》 &amp;lt;예의(禮儀)&amp;gt;에 적힌 “양(梁)의 천감(天監) 6년(507)에 묘제를 바로잡되, 석인(石人) ·석수(石獸) ·석비(石碑)의 건립을 금하고 석주(石柱)만 세워 그 위에 이름 ·지위를 적을 것을 허가하였다”라는 대목에서도 망주석의 용도를 알 수 있다. 한국에서는 현존하는 왕릉과 상류층의 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민간인의 무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간혹 다람쥐 등을 조각하여 민속 생활의 일면을 보이기도 한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91804&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2174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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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제주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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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Created page with &amp;quot; == Meta Data ==  타입 : 장소  한글항목명 : 제주도  한자항목명 : 濟州道  영어항목명 : Jeju-do  편자 : 자운서원팀 20141...&amp;quot;&lt;/p&gt;
&lt;h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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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a Data ==&lt;br /&gt;
 타입 : 장소&lt;br /&gt;
 한글항목명 : 제주도&lt;br /&gt;
 한자항목명 : 濟州道&lt;br /&gt;
 영어항목명 : Jeju-do&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위치&lt;br /&gt;
|한반도 남서 해상에 있는 한국 최대의 섬&lt;br /&gt;
|-&lt;br /&gt;
!면적(㎢)&lt;br /&gt;
|1848.4&lt;br /&gt;
|-&lt;br /&gt;
!행정구분&lt;br /&gt;
|2시&lt;br /&gt;
|-&lt;br /&gt;
!행정관청 소재지&lt;br /&gt;
|[http://map.naver.com/?title=%EC%A0%9C%EC%A3%BC%ED%8A%B9%EB%B3%84%EC%9E%90%EC%B9%98%EB%8F%84&amp;amp;y=33.4894340&amp;amp;x=126.4984221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문연로 6(연동 312-1)]&lt;br /&gt;
|-&lt;br /&gt;
!꽃&lt;br /&gt;
|참꽃&lt;br /&gt;
|-&lt;br /&gt;
!나무&lt;br /&gt;
|녹나무&lt;br /&gt;
|-&lt;br /&gt;
!새&lt;br /&gt;
|제주큰오색딱따구리&lt;br /&gt;
|-&lt;br /&gt;
!홈페이지&lt;br /&gt;
|[http://www.jeju.go.kr/ 제주도청]&lt;br /&gt;
|-&lt;br /&gt;
!인구(명)&lt;br /&gt;
|586,149(2013년)&lt;br /&gt;
|}&lt;br /&gt;
&lt;br /&gt;
북으로 목포와의 거리는 141.6㎞, 북동쪽 부산과의 거리는 286.5㎞이며, 동으로 일본 쓰시마섬[對馬島]과는 255.1㎞ 떨어져 있다. 동쪽으로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일본의 쓰시마섬 및 규슈[九州]의 나가사키현[長崎縣], 서쪽으로 중국의 상하이[上海]와 마주하며, 남쪽으로 동중국해와 면한다.&lt;br /&gt;
&lt;br /&gt;
한국·[[중국 KU |중국]]·일본 등 극동 지역의 중앙부에 있어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하며, 도 전체가 바다로 둘러싸였다. 수리적(數理的)으로는 동경 126°08'∼126°58', 북위 33°06'∼34°00'에 위치한다. 북단은 북위 34°00'의 제주시 추자면 대서리이며, 남단은 북위 33°06'의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도다.&lt;br /&gt;
&lt;br /&gt;
한국 최남단에 있는 도로서, 제주도를 포함해 8개의 유인도와 55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유인도는 우도·상추자도·하추자도·비양도·횡간도·추포도·가파도·마라도이다. 남북 간의 거리가 약 31㎞, 동서간의 거리가 약 73㎞로 동서로 가로놓인 모양이다.&lt;br /&gt;
&lt;br /&gt;
러시아·[[중국 KU |중국]] 등의 대륙과 일본·동남아 등지를 연결하는 요충지이며, 천혜의 자연경관이 수려한 세계적인 휴양관광지다. 특히 4면의 청정한 바다 위에 우뚝 솟은 한라산은 1,800여 종의 식물과 수천 마리의 야생노루가 서식하는 동식물의 보고다. 또 한·일, 한·미 정상회담을 비롯해 여러 차례의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등 새로운 국제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2011년 11월에는 브라질의 아마존, 아르헨티나의 이과수 폭포, 인도네시아의 코모도 섬, 베트남의 하룽베이, 필리핀의 지하강,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테이블마운틴과 함께 스위스 비영리 재단 뉴세븐원더스(New7wonders)가 뽑은 '세계 7대 자연 경관'에 선정되었다.&lt;br /&gt;
&lt;br /&gt;
전국 광역시·도 중 인구가 가장 적다. 행정구역은 2행정시 7읍 5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도청 소재지는 제주시 연동에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1373&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4009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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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경상남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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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Created page with &amp;quot; == Meta Data ==  타입 : 장소  한글항목명 : 경상남도  한자항목명 : 慶尙南道   영어항목명 : Gyeongsangbuk-do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amp;quot;&lt;/p&gt;
&lt;h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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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a Data ==&lt;br /&gt;
 타입 : 장소&lt;br /&gt;
 한글항목명 : 경상남도&lt;br /&gt;
 한자항목명 : 慶尙南道 &lt;br /&gt;
 영어항목명 : Gyeongsangbuk-do&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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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위치&lt;br /&gt;
|한반도 남동단에 있는 도&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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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행정구분&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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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행정관청 소재지&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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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꽃&lt;br /&gt;
|장미&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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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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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lt;br /&gt;
|-&lt;br /&gt;
!인구(명)&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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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동쪽으로는 울산광역시, 남쪽으로는 부산광역시와 남해, 서쪽으로는 [[전라북도|전라북도]]와 [[전라남도|전라남도]], 북쪽으로는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경상북도]]에 접해 있다. 동서 252km, 남북 200km의 연장거리를 가지며, 북위 34°29′~35°54′, 동경 127°35′~129°13′에 있다.&lt;br /&gt;
&lt;br /&gt;
남한 전체 면적의 약 10.6%를 차지하며, 420개 섬이 흩어져 있는 다도해로 전체 면적의 약 8.5%를 차지한다. 동쪽에는 태백산맥의 여맥이 뻗어 있고 중앙부에는 낙동강이 흐르며 서쪽에는 [[소백산맥 KU |소백산맥]]이 호남지방과 경계를 이룬다. 표고 100m 이하의 저지대와, 100∼500m 지대가 전체 면적의 86%를 차지한다. &lt;br /&gt;
&lt;br /&gt;
도를 상징하는 꽃은 장미이며, 나무는 예로부터 주민의 모임장소였던 느티나무, 새는 백로, 물고기는 볼락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0029&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947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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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Created page with &amp;quot; == Meta Data ==  타입 : 장소  한글항목명 : 경상남도  한자항목명 : 慶尙南道   영어항목명 : Gyeongsangbuk-do  편자 : 자운서원팀 KU|자운서...&amp;quot;&lt;/p&gt;
&lt;h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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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a Data ==&lt;br /&gt;
 타입 : 장소&lt;br /&gt;
 한글항목명 : 경상남도&lt;br /&gt;
 한자항목명 : 慶尙南道 &lt;br /&gt;
 영어항목명 : Gyeongsangbuk-do&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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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위치&lt;br /&gt;
|한반도 남동단에 있는 도&lt;br /&gt;
|-&lt;br /&gt;
!면적(㎢)&lt;br /&gt;
|10522.71&lt;br /&gt;
|-&lt;br /&gt;
!행정구분&lt;br /&gt;
|8시 10군&lt;br /&gt;
|-&lt;br /&gt;
!행정관청 소재지&lt;br /&gt;
|[http://map.naver.com/?title=%EA%B2%BD%EC%83%81%EB%82%A8%EB%8F%84&amp;amp;y=35.2376439&amp;amp;x=128.6918216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중앙대로 300(사림동)]&lt;br /&gt;
|-&lt;br /&gt;
!꽃&lt;br /&gt;
|장미&lt;br /&gt;
|-&lt;br /&gt;
!나무&lt;br /&gt;
|느티나무&lt;br /&gt;
|-&lt;br /&gt;
!새&lt;br /&gt;
|백로&lt;br /&gt;
|-&lt;br /&gt;
!인구(명)&lt;br /&gt;
|3,309,000&lt;br /&gt;
|}&lt;br /&gt;
&lt;br /&gt;
동쪽으로는 울산광역시, 남쪽으로는 부산광역시와 남해, 서쪽으로는 [[전라북도|전라북도]]와 [[전라남도|전라남도]], 북쪽으로는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경상북도]]에 접해 있다. 동서 252km, 남북 200km의 연장거리를 가지며, 북위 34°29′~35°54′, 동경 127°35′~129°13′에 있다.&lt;br /&gt;
&lt;br /&gt;
남한 전체 면적의 약 10.6%를 차지하며, 420개 섬이 흩어져 있는 다도해로 전체 면적의 약 8.5%를 차지한다. 동쪽에는 태백산맥의 여맥이 뻗어 있고 중앙부에는 낙동강이 흐르며 서쪽에는 [[소백산맥KU|소백산맥]]이 호남지방과 경계를 이룬다. 표고 100m 이하의 저지대와, 100∼500m 지대가 전체 면적의 86%를 차지한다. &lt;br /&gt;
&lt;br /&gt;
도를 상징하는 꽃은 장미이며, 나무는 예로부터 주민의 모임장소였던 느티나무, 새는 백로, 물고기는 볼락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0029&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947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Digerati Wiki]]&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2%BD%EC%83%81%EB%B6%81%EB%8F%84</id>
		<title>경상북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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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Created page with &amp;quot; == Meta Data ==  타입 : 장소  한글항목명 : 경상북도  한자항목명 : 慶尙北道  영어항목명 : Gyeongsangbuk-do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amp;quot;&lt;/p&gt;
&lt;hr /&gt;
&lt;div&gt;&lt;br /&gt;
== Meta Data ==&lt;br /&gt;
 타입 : 장소&lt;br /&gt;
 한글항목명 : 경상북도&lt;br /&gt;
 한자항목명 : 慶尙北道&lt;br /&gt;
 영어항목명 : Gyeongsangbuk-do&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위치&lt;br /&gt;
|한반도 남동부에 있는 도&lt;br /&gt;
|-&lt;br /&gt;
!면적(㎢)&lt;br /&gt;
|19026.06&lt;br /&gt;
|-&lt;br /&gt;
!행정구분&lt;br /&gt;
|10시 13군&lt;br /&gt;
|-&lt;br /&gt;
!행정관청 소재지&lt;br /&gt;
|[http://map.naver.com/?title=%EA%B2%BD%EC%83%81%EB%B6%81%EB%8F%84&amp;amp;y=35.8928957&amp;amp;x=128.6003669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로 60(산격동 1445-3)]&lt;br /&gt;
|-&lt;br /&gt;
!꽃&lt;br /&gt;
|백일홍&lt;br /&gt;
|-&lt;br /&gt;
!나무&lt;br /&gt;
|느티나무&lt;br /&gt;
|-&lt;br /&gt;
!새&lt;br /&gt;
|왜가리&lt;br /&gt;
|-&lt;br /&gt;
!홈페이지&lt;br /&gt;
|[http://www.gb.go.kr 경상북도청]&lt;br /&gt;
|-&lt;br /&gt;
!인구(명)&lt;br /&gt;
|2,696,554(2013년)&lt;br /&gt;
|}&lt;br /&gt;
&lt;br /&gt;
동쪽으로 동해에 면하고, 서쪽으로 [[충청북도|충청북도]]·[[전라북도|전라북도]], 북쪽으로 [[강원도|강원도]]·[[충청북도|충청북도]], 남쪽으로 대구광역시·[[경상남도|경상남도]]에 접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태백산맥·[[소백산맥 KU |소백산맥]]과 그 지맥, 동해로 주변지역과 경계를 이루며, 전국에서 가장 원형에 가까운 형상을 취하고 있어, 하나의 행정구역인 동시에 전형적인 지리구(地理區)를 형성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도를 상징하는 꽃은 도내에 고루 자생되고 있는 백일홍이며, 도의 나무는 느티나무, 도를 대표하는 새는 왜가리이다. 상징 캐릭터는 신나리로, 흥이 일어나 기분이 좋아진다는 신과 지체 높은 사람을 높여 부르는 나리의 합성어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0042&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922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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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경상북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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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Created page with &amp;quot; == Meta Data ==  타입 : 장소  한글항목명 : 경상북도  한자항목명 : 慶尙北道  영어항목명 : Gyeongsangbuk-do  편자 : 자운서원팀 KU|자운서...&amp;quot;&lt;/p&gt;
&lt;h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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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a Data ==&lt;br /&gt;
 타입 : 장소&lt;br /&gt;
 한글항목명 : 경상북도&lt;br /&gt;
 한자항목명 : 慶尙北道&lt;br /&gt;
 영어항목명 : Gyeongsangbuk-do&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위치&lt;br /&gt;
|한반도 남동부에 있는 도&lt;br /&gt;
|-&lt;br /&gt;
!면적(㎢)&lt;br /&gt;
|19026.06&lt;br /&gt;
|-&lt;br /&gt;
!행정구분&lt;br /&gt;
|10시 13군&lt;br /&gt;
|-&lt;br /&gt;
!행정관청 소재지&lt;br /&gt;
|[http://map.naver.com/?title=%EA%B2%BD%EC%83%81%EB%B6%81%EB%8F%84&amp;amp;y=35.8928957&amp;amp;x=128.6003669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로 60(산격동 1445-3)]&lt;br /&gt;
|-&lt;br /&gt;
!꽃&lt;br /&gt;
|백일홍&lt;br /&gt;
|-&lt;br /&gt;
!나무&lt;br /&gt;
|느티나무&lt;br /&gt;
|-&lt;br /&gt;
!새&lt;br /&gt;
|왜가리&lt;br /&gt;
|-&lt;br /&gt;
!홈페이지&lt;br /&gt;
|[http://www.gb.go.kr 경상북도청]&lt;br /&gt;
|-&lt;br /&gt;
!인구(명)&lt;br /&gt;
|2,696,554(2013년)&lt;br /&gt;
|}&lt;br /&gt;
&lt;br /&gt;
동쪽으로 동해에 면하고, 서쪽으로 [[충청북도|충청북도]]·[[전라북도|전라북도]], 북쪽으로 [[강원도|강원도]]·[[충청북도|충청북도]], 남쪽으로 대구광역시·[[경상남도|경상남도]]에 접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태백산맥·[[소백산맥KU|소백산맥]]과 그 지맥, 동해로 주변지역과 경계를 이루며, 전국에서 가장 원형에 가까운 형상을 취하고 있어, 하나의 행정구역인 동시에 전형적인 지리구(地理區)를 형성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도를 상징하는 꽃은 도내에 고루 자생되고 있는 백일홍이며, 도의 나무는 느티나무, 도를 대표하는 새는 왜가리이다. 상징 캐릭터는 신나리로, 흥이 일어나 기분이 좋아진다는 신과 지체 높은 사람을 높여 부르는 나리의 합성어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0042&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922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Digerati Wiki]]&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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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Created page with &amp;quot; == Meta Data ==  타입 : 장소  한글항목명 : 충청북도  한자항목명 : 忠淸北道  영어항목명 : Chungcheongbuk-do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amp;quo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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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a Data ==&lt;br /&gt;
 타입 : 장소&lt;br /&gt;
 한글항목명 : 충청북도&lt;br /&gt;
 한자항목명 : 忠淸北道&lt;br /&gt;
 영어항목명 : Chungcheongbuk-do&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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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위치&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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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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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행정구분&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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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행정관청 소재지&lt;br /&gt;
|[http://map.naver.com/?title=%EC%B6%A9%EC%B2%AD%EB%B6%81%EB%8F%84&amp;amp;y=36.6336891&amp;amp;x=127.4896370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상당로 182(문화동 889)]&lt;br /&gt;
|-&lt;br /&gt;
!꽃&lt;br /&gt;
|백목련&lt;br /&gt;
|-&lt;br /&gt;
!나무&lt;br /&gt;
|느티나무&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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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lt;br /&gt;
|까치&lt;br /&gt;
|-&lt;br /&gt;
!홈페이지&lt;br /&gt;
|[http://www.cb21.net 충청북도청]&lt;br /&gt;
|-&lt;br /&gt;
!인구(명)&lt;br /&gt;
|1,565,972(2013년)&lt;br /&gt;
|}&lt;br /&gt;
&lt;br /&gt;
동쪽으로 [[경상북도|경상북도]], 서쪽으로 경기도와 [[충청남도 KU |충청남도]], 북쪽으로 [[강원도 KU |강원도]], 남쪽으로 [[전라북도|전라북도]]와 접한다. 도를 상징하는 꽃은 백목련,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까치이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유일의 내륙도로 북동쪽에 태백산맥, 동쪽에 [[소백산맥 KU |소백산맥]], 북서쪽에 차령산맥이 지나며 서경은 구릉지와 평야로 되어 있는 남고북저의 거대한 분지 지형이다. 화강암 및 화강편마암류가 3분의 2를 차지하며, 옥천지향사의 남동측은 불국사 화강암으로 이루어졌고, 북서측과 남부지역은 대보화강암 및 화강편마암류가 대부분이다.&lt;br /&gt;
    &lt;br /&gt;
하천은 남한강과 금강 2대 하천이 흐른다. 오대산 부근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도내에서 서남류하다가 단양군 부근에서 서쪽으로 흘러 제천시 황강리를 지나 충주시 부근에서 달천과 합류하여 [[경기도 KU |경기도]]를 지나 황해로 흘러 들어간다. 금강과 남한강의 유역을 따라 단양·제천·한수·충주·연풍·괴산·음성 등의 침식분지가 발달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서울특별시와 영·호남지방의 중간에 위치하여 국도와 경부고속국도·중부고속국도가 통과하고 남서부에는 경부선, 북동부에는 중앙선 철도가 지나며, 충북선이 북동∼남서 방향으로 달리고 있어 교통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lt;br /&gt;
&lt;br /&gt;
동경 127°28 '∼128°28 ', 북위 36°1 '∼37°20 '에 위치하며, 같은 위도상에 중국 중앙부, 인도 북부, 이란 북부, 이란 중부, 에스파냐 남단부, 미국 남부가 있다.&lt;br /&gt;
&lt;br /&gt;
여름은 고온다습하고 겨울은 한랭건조한 온대 몬순기후로서 계절의 변화가 뚜렷할 뿐만 아니라 보기 드문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보인다. 연평균기온 &lt;br /&gt;
13.6℃, 최저기온 -5.3℃, 최고기온 29.7℃, 연평균강수량 1,100㎜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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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7884&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890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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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입 : 장소&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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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위치&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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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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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31.5&lt;br /&gt;
|-&lt;br /&gt;
!행정구분&lt;br /&gt;
|3시 9군&lt;br /&gt;
|-&lt;br /&gt;
!행정관청 소재지&lt;br /&gt;
|[http://map.naver.com/?title=%EC%B6%A9%EC%B2%AD%EB%B6%81%EB%8F%84&amp;amp;y=36.6336891&amp;amp;x=127.4896370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상당로 182(문화동 889)]&lt;br /&gt;
|-&lt;br /&gt;
!꽃&lt;br /&gt;
|백목련&lt;br /&gt;
|-&lt;br /&gt;
!나무&lt;br /&gt;
|느티나무&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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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lt;br /&gt;
|[http://www.cb21.net 충청북도청]&lt;br /&gt;
|-&lt;br /&gt;
!인구(명)&lt;br /&gt;
|1,565,972(2013년)&lt;br /&gt;
|}&lt;br /&gt;
&lt;br /&gt;
동쪽으로 [[경상북도|경상북도]], 서쪽으로 경기도와 [[충청남도KU|충청남도]], 북쪽으로 [[강원도KU|강원도]], 남쪽으로 [[전라북도|전라북도]]와 접한다. 도를 상징하는 꽃은 백목련,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까치이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유일의 내륙도로 북동쪽에 태백산맥, 동쪽에 [[소백산맥KU|소백산맥]], 북서쪽에 차령산맥이 지나며 서경은 구릉지와 평야로 되어 있는 남고북저의 거대한 분지 지형이다. 화강암 및 화강편마암류가 3분의 2를 차지하며, 옥천지향사의 남동측은 불국사 화강암으로 이루어졌고, 북서측과 남부지역은 대보화강암 및 화강편마암류가 대부분이다.&lt;br /&gt;
    &lt;br /&gt;
하천은 남한강과 금강 2대 하천이 흐른다. 오대산 부근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도내에서 서남류하다가 단양군 부근에서 서쪽으로 흘러 제천시 황강리를 지나 충주시 부근에서 달천과 합류하여 [[경기도KU|경기도]]를 지나 황해로 흘러 들어간다. 금강과 남한강의 유역을 따라 단양·제천·한수·충주·연풍·괴산·음성 등의 침식분지가 발달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서울특별시와 영·호남지방의 중간에 위치하여 국도와 경부고속국도·중부고속국도가 통과하고 남서부에는 경부선, 북동부에는 중앙선 철도가 지나며, 충북선이 북동∼남서 방향으로 달리고 있어 교통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lt;br /&gt;
&lt;br /&gt;
동경 127°28 '∼128°28 ', 북위 36°1 '∼37°20 '에 위치하며, 같은 위도상에 중국 중앙부, 인도 북부, 이란 북부, 이란 중부, 에스파냐 남단부, 미국 남부가 있다.&lt;br /&gt;
&lt;br /&gt;
여름은 고온다습하고 겨울은 한랭건조한 온대 몬순기후로서 계절의 변화가 뚜렷할 뿐만 아니라 보기 드문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보인다. 연평균기온 &lt;br /&gt;
13.6℃, 최저기온 -5.3℃, 최고기온 29.7℃, 연평균강수량 1,100㎜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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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7884&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890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Digerati Wiki]]&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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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 내용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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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a Data ==&lt;br /&gt;
 타입 : 장소&lt;br /&gt;
 한글항목명 : 전라북도&lt;br /&gt;
 한자항목명 : 全羅北道&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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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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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분&lt;br /&gt;
|6시 8군 14읍 145면 82동&lt;br /&gt;
|-&lt;br /&gt;
!행정관청 소재지&lt;br /&gt;
|[http://map.naver.com/?title=%EC%A0%84%EB%9D%BC%EB%B6%81%EB%8F%84&amp;amp;y=35.8189680&amp;amp;x=127.1089339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효자로 225(효자동 3가 1)]&lt;br /&gt;
|-&lt;br /&gt;
!꽃&lt;br /&gt;
|백일홍&lt;br /&gt;
|-&lt;br /&gt;
!나무&lt;br /&gt;
|은행나무&lt;br /&gt;
|-&lt;br /&gt;
!새&lt;br /&gt;
|까치&lt;br /&gt;
|-&lt;br /&gt;
!홈페이지&lt;br /&gt;
|[http://www.jeonbuk.go.kr 전라북도청]&lt;br /&gt;
|-&lt;br /&gt;
!인구(명)&lt;br /&gt;
|1,871,818(2013년)&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 125°58′~ 127°54′, 북위 35°18′~ 36°09′에 있다. 동쪽은 [[경상남도|경상남도]] 산청군과 거창군, [[경상북도|경상북도]]의 김천과 [[소백산맥 KU |소백산맥]]의 주 능선으로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전라남도|전라남도]]의 영광·장성·담양·곡성·구례군과 접해 있으며, 북쪽은 충청남도의 금산·논산·부여·서천군, [[충청북도|충청북도]]의 영동군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황해에 면한다.&lt;br /&gt;
&lt;br /&gt;
도를 상징하는 꽃은 백일홍이며,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까치이다. 행정구역은 6시 8군 14읍 145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도청 소재지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3가 1번지에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9472&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969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A0%84%EB%9D%BC%EB%82%A8%EB%8F%84</id>
		<title>전라남도</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A0%84%EB%9D%BC%EB%82%A8%EB%8F%84"/>
				<updated>2014-06-15T06:58:4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 내용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 Meta Data ==&lt;br /&gt;
 타입 : 장소&lt;br /&gt;
 한글항목명 : 전라남도&lt;br /&gt;
 한자항목명 : 全羅南道&lt;br /&gt;
 영어항목명 : Jeollanam-do&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위치&lt;br /&gt;
|한반도 남서단에 있는 도&lt;br /&gt;
|-&lt;br /&gt;
!면적(㎢)&lt;br /&gt;
|12095.06&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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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 17군&lt;br /&gt;
|-&lt;br /&gt;
!행정관청 소재지&lt;br /&gt;
|[http://map.naver.com/?title=%EC%A0%84%EB%9D%BC%EB%82%A8%EB%8F%84&amp;amp;y=34.8169820&amp;amp;x=126.4603888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읍 오룡길 1(남악리 1000)]&lt;br /&gt;
|-&lt;br /&gt;
!꽃&lt;br /&gt;
|동백&lt;br /&gt;
|-&lt;br /&gt;
!나무&lt;br /&gt;
|은행나무&lt;br /&gt;
|-&lt;br /&gt;
!새&lt;br /&gt;
|산비둘기&lt;br /&gt;
|-&lt;br /&gt;
!홈페이지&lt;br /&gt;
|[http://www.jeonnam.go.kr 전라남도청]&lt;br /&gt;
|-&lt;br /&gt;
!인구(명)&lt;br /&gt;
|1,906,887(2013년)&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 125°04′~ 127°54′, 북위 33°54′~ 35°30′에 있다. 동쪽으로 [[섬진강 KU |섬진강]]과 [[소백산맥 KU |소백산맥]]을 경계로 [[경상남도|경상남도]]에 접하며, 서쪽으로 황해를 건너 멀리 [[중국 KU |중국]]과 마주보고 있다. 남쪽으로는 다도해와 제주해협을 건너 [[제주도|제주도]]와 마주보며, 북쪽으로는 [[노령산맥 KU |노령산맥]]을 경계로 [[전라북도|전라북도]]와 접한다. 남북 길이는 175.9km, 동서 길이는 도서지역을 합쳐 262.8 km에 이른다.&lt;br /&gt;
&lt;br /&gt;
행정구역은 5시 17군 31읍 198면이며, 가구수는 73만 1092가구이다. 도청 소재지는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읍 오룡길 1에 있다. 도를 상징하는 꽃은 동백이고, 도의 나무는 은행나무이고, 도의 새는 산비둘기이고, 도의 물고기는 참돔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9470&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985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8%81%EA%B4%91</id>
		<title>영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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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 내용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 Meta Data ==&lt;br /&gt;
 타입 : 장소&lt;br /&gt;
 한글항목명 : 영광&lt;br /&gt;
 한자항목명 : 榮光&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전라남도|전라남도]]의 북서부 끝 해안에 위치한 영광은 북쪽으로 [[전라북도|전라북도]] [[고창|고창군]]과 맞붙어 있다. 지금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영광굴비뿐이지만, 이곳은 예전부터 ‘옥당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지방 수령을 지내려면 남으로는 전라도 영광이요, 북으로는 [[황해도|황해도]] 안악’이라는 말이 있었을 만큼 각종 물산이 풍부하고, 우리나라 서남 해안을 연결하는 뱃길의 중요한 거점으로서 번성하던 고장이다.&lt;br /&gt;
&lt;br /&gt;
[[고려 KU |고려]] 성종 11년(992) 정부에서 남쪽 지방에 열두 군데의 조창을 설치할 때 지금의 영광 법성포에는 부용창이 두어졌다. 부용창은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나주|나주]]의 영산창(영산포)과 함께 전라도의 2대 조창으로서 가장 번성한 포구이자 문물의 집산지가 되었다.&lt;br /&gt;
&lt;br /&gt;
그후 [[조선 KU |조선]] [[중종|중종]] 9년(1514)에 영산창이 폐쇄된 후에는 전라남도 전 지역의 세미를 관할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조창이 되었다. 더불어 이 조창을 방비하기 위해 수군 만호가 배치되었고 숙종 34년(1708)에는 법성진으로 승격, 수군첨절제사가 주둔하게 됨에 따라 바다의 자원과 세미를 받아들이는 곳이자 수군기지로서, 또 전라도 최대의 포구로서 번영을 누렸다.&lt;br /&gt;
&lt;br /&gt;
1970년대 이래 서해안 조기잡이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고 법성포는 토사가 쌓여 항구로서의 구실을 다해가고 있다. 모든 물산을 뱃길로 수송해야 했던 옛적에, 칠산어장에 어부들의 노래가 가득하던 한 시기 전에, ‘서울 저자와 같이 떠드는 소리가 가득’했던 영광의 영광(榮光)은 이제 빛을 잃어가고 있다.&lt;br /&gt;
&lt;br /&gt;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 큰 구실을 했던 고장이지만, 조기 파시나 조창·조운선 운영 등 주로 유동 인구에 의해 번성했던 까닭인지 문화유적이나 유물은 많지 않은 편이다. 오늘날 이곳에서 찾아볼 만한 곳으로는 [[조선 KU |조선]]의 대쪽 선비 수은 강항을 기리는 내산서원과 불교의 남방 해로 유입 설화가 간직된 불갑사를 꼽을 수 있겠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4584&amp;amp;cid=754&amp;amp;categoryId=2498 답사여행의 길잡이 1]&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AC%B8%EA%B3%A1%EC%A7%91</id>
		<title>문곡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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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 Meta Data ==&lt;br /&gt;
 타입 : 문헌&lt;br /&gt;
 한글항목명 : 문곡집&lt;br /&gt;
 한자항목명 : 文谷集&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구분&lt;br /&gt;
|시문집, 활자본&lt;br /&gt;
|-&lt;br /&gt;
!저자&lt;br /&gt;
|[[김수항 KU |김수항]]&lt;br /&gt;
|-&lt;br /&gt;
!시대&lt;br /&gt;
|[[조선 KU |조선]] 중기(1696년)&lt;br /&gt;
|-&lt;br /&gt;
!소장&lt;br /&gt;
|[[규장각|규장각]]도서&lt;br /&gt;
|-&lt;br /&gt;
!요약&lt;br /&gt;
|[[조선 KU |조선]] 후기의 문신 [[김수항 KU |김수항]](金壽恒)의 시문집.&lt;br /&gt;
|}&lt;br /&gt;
&lt;br /&gt;
활자본. 28권 14책. [[규장각|규장각]]도서. 아들 창집(昌集)과 창협(昌協) 형제가 산정(刪定)하여 1696년([[숙종 KU |숙종]] 22)에 간행하였고, 1699년 [[안세징|안세징]](安世徵)이 [[영광|영광]]군수(靈光郡守)로 있을 때 이를 증산(增刪)하여 중간하였다. 내용은 시(詩) 1,031수와 문(文) 474편을 수록한 방대한 책으로, 권1∼7은 시, 권8∼15는 소차(疏箚), 권16은 계(啓), 권17은 의(議), 권18은 비명(碑銘) ·묘갈(墓碣), 권19는 묘지(墓誌), 권20은 묘표(墓表), 권21∼22는 행장(行狀), 권23∼24는 제문(祭文), 권25는 반교문(頒敎文) ·책문(冊文) ·교명문(敎命文) ·전지(傳旨) ·표전(表箋) ·상량문(上樑文), 권26은 서(序) ·기(記) ·제발(題跋) ·잡저(雜著), 그리고 권27∼28은 서독(書牘)을 수록하였으며, [[김창협|김창협]]이 쓴 발문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9531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2868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E%A5%EB%A0%AC%EC%99%95%ED%9B%84_KU</id>
		<title>장렬왕후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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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Created page with &amp;quot; == Meta Data ==  타입 : 인물  한글항목명 : 장렬왕후  한자항목명 : 莊烈王后  편자 : 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amp;quot;&lt;/p&gt;
&lt;hr /&gt;
&lt;div&gt;&lt;br /&gt;
== Meta Data ==&lt;br /&gt;
 타입 : 인물&lt;br /&gt;
 한글항목명 : 장렬왕후&lt;br /&gt;
 한자항목명 : 莊烈王后&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출생~사망&lt;br /&gt;
|1624 ~ 1688&lt;br /&gt;
|-&lt;br /&gt;
!본관&lt;br /&gt;
|양주&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 제16대 [[인조KU|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인조KU|인조]]가 죽고 [[효종KU|효종]]이 즉위하자, 대비(大妃)가 되었다. 며느리인 [[효종KU|효종]]비 인선대비가 죽자 다시 [[예송논쟁|복상 문제]]가 일어났다. [[서인KU|서인]]은 9개월 복상을 주장했고 [[남인KU|남인]]은 1년 복상을 주장했는데 남인이 승리, 서인이 조정에서 물러나고 조대비는 1년 복상을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837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3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6%81%EC%9D%B8</id>
		<title>북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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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 내용 */&lt;/p&gt;
&lt;hr /&gt;
&lt;div&gt;== Meta Data ==&lt;br /&gt;
* 타입: 개념&lt;br /&gt;
* 한글항목명: 북인&lt;br /&gt;
* 한자항목명: 北人 &lt;br /&gt;
* 편자: [[도산서원팀 KU |도산서원팀]] [http://kadhlab102.com/wiki/index.php/201410333%ED%99%A9%EC%A7%80%ED%9D%AC 황지희]&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조선 KU |조선 시대]]의 사색당파의 하나. [[이발(李潑]]),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당파이다. [[우성전]], [[유성룡|유성룡]] 등을 중심으로 한 [[남인 KU |남인]]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A4%91%EC%A2%85</id>
		<title>중종</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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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 Meta data */&lt;/p&gt;
&lt;hr /&gt;
&lt;div&gt;=='''Meta data'''==&lt;br /&gt;
* 타입: 인물&lt;br /&gt;
* 한글항목명 : 중종&lt;br /&gt;
* 한자항목명 : 中宗&lt;br /&gt;
* 편자: [[심곡서원팀 KU |심곡서원팀]] [[송유빈 KU |송유빈]]&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 이름 : 이역(李懌)&lt;br /&gt;
* 생년 : 1506년&lt;br /&gt;
* 몰년 : 1544년&lt;br /&gt;
* 역할 : 조선 제11대 왕(재위 1506∼1544) &lt;br /&gt;
자는 낙천(樂天), 휘(諱) 역(懌)이다. 성종의 2남이며 연산군(燕山君)의 이복동생이다. 어머니는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 비는 신수근(愼守勤)의 딸 단경왕후(端敬王后), 제1계비(繼妃)는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 제2계비는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lt;br /&gt;
&lt;br /&gt;
1494년(성종 25) 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해졌는데, 1506년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에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연산군 시대의 폐정(弊政)을 개혁하였으며, 1515년(중종 10) 이래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사류(新進士類)를 중용하여 그들이 표방하는 왕도정치를 실시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광조 등의 개혁방법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고, 또 조급하게 서둘렀기 때문에 훈구파(勳舊派), 즉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lt;br /&gt;
&lt;br /&gt;
뿐만 아니라 중종 자신도 조광조 등의 왕에 대한 지나친 도학적(道學的) 요구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차에, 1519년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파의 모함에 따라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를 숙청하였다. 그 뒤 훈구파의 전횡(專橫)이 자행되었으며, 또 1521년에는 송사련(宋祀連)의 무고로 신사무옥(辛巳誣獄)이 일어나 안처겸(安處謙) 일당이 처형되었다.&lt;br /&gt;
&lt;br /&gt;
1524년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의 파직, 1525년 유세창(柳世昌)의 모역사건, 1527년 작서(灼鼠)의 변에 따른 경빈(敬嬪) 박씨(朴氏)의 폐위 등 크고 작은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1531년 김안로의 재등장으로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였는데, 문정왕후를 배경으로 한 윤원로(尹元老) ·윤원형(尹元衡) 형제가 등장하여 1537년(중종 32) 김안로를 숙청하였으나, 이번에는 윤원형 일당의 횡포가 시작되었다. &lt;br /&gt;
&lt;br /&gt;
그러는 동안 나라의 남북에서 외환이 그치지 않아, 1510년(중종 5)의 삼포왜란(三浦倭亂), 1522년 동래(東萊) 염장(鹽場)의 왜변(倭變), 1524년 야인(野人)의 침입, 1525년 왜구(倭寇)의 침입 등이 잇달았다. 치세 초기에는 미신타파를 위하여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고, 과거제도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해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향약(鄕約)을 권장하여 백성들의 상조(相助)정신을 고취시켰다. &lt;br /&gt;
&lt;br /&gt;
또, 그 시기에 《소학(小學)》 《이륜행실(二倫行實)》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속록(大典續錄)》 《천하여지도(天下輿地圖)》 《삼강행실(三綱行實)》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이문속집집람(吏文續集輯覽)》 《대동연주시격(大東聯珠詩格)》 등 다방면에 걸친 문헌이 편찬 ·간행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 이후 이와 같은 문화발전을 위한 정책은 거의 정지되었다. 다만, 치세 말기에 군적(軍籍)의 개편과 전라도 ·강원도 ·평안도에 대한 양전(量田)을 실시하였으며, 진(鎭)을 설치하고 성곽을 보수하는 한편, 평안도 여연(閭延) ·무창(茂昌) 등지의 야인을 추방하는 등 국방정책을 추진하였다. &lt;br /&gt;
&lt;br /&gt;
한편,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여 활자를 개조하고, 지방의 사실(史實)을 기록하기 위하여 외사관(外史官)을 임명하였으며, 1540년(중종 35) 역대 실록(實錄)을 인쇄하여 이를 사고(史庫)에 보관하게 하였다. 중종의 치세에서 처음에는 어진 정치를 펴는 데 상당히 의욕적이었으나, 기묘사화 이후 간신(奸臣)들이 판을 치는 통에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여 볼만한 치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능은 경기 고양(高陽)으로 하였다가 1562년(명종 17)에 이장하였다. 능호는 정릉(靖陵)이며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요약'''==조선 제11대 왕(재위 1506∼1544). 연산군 시대의 폐정을 개혁하였으며, 조광조 등의 신진 사류(士類)를 중용, 왕도정치를 시도하였으나, 지나치게 이상적인 개혁방법이 훈구파의 반발을 초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신진사류를 숙청하였다. 이후 신사무옥(辛巳誣獄), 삼포왜란 등으로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3749&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3 두산백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C%A0%EC%84%B1%EB%A3%A1</id>
		<title>유성룡</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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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5T06:26: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410297: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 Meta Data ==&lt;br /&gt;
 타입 : 인물&lt;br /&gt;
 한글항목명 : 유성룡&lt;br /&gt;
 한자항목명 : 柳成龍&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1542([[중종|중종]] 37)∼1607([[선조 KU |선조]] 40). [[조선 KU |조선]] 중기의 문신.&lt;br /&gt;
&lt;br /&gt;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의성 출생. 자온(子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작(公綽)이고,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중영(仲郢)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퇴계 이황|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했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9364&amp;amp;cid=1592&amp;amp;categoryId=1592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8%A5%EB%B3%91%EC%84%9C%EC%9B%90_KU</id>
		<title>옥병서원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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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a Data ==&lt;br /&gt;
 타입 : 인물&lt;br /&gt;
 한글항목명 : 안세징&lt;br /&gt;
 한자항목명 : 安世徵&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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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출생~사망&lt;br /&gt;
|1639 ~ ?&lt;br /&gt;
|-&lt;br /&gt;
!본관&lt;br /&gt;
|광주(廣州)&lt;br /&gt;
|-&lt;br /&gt;
!자&lt;br /&gt;
|자원(子遠)&lt;br /&gt;
|-&lt;br /&gt;
!호&lt;br /&gt;
|환성재(喚醒齋)&lt;br /&gt;
|-&lt;br /&gt;
!국적&lt;br /&gt;
|한국&lt;br /&gt;
|-&lt;br /&gt;
!활동분야&lt;br /&gt;
|정치&lt;br /&gt;
|-&lt;br /&gt;
!요약&lt;br /&gt;
|[[조선 KU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1684년 장령으로 있을 때 허목(許穆)의 관작을 회복시키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갑술환국]] 후 [[인현왕후 KU |인현왕후]]를 폐위시키는 데 앞장선 이현일·목내선·민암·[[장희재|장희재]]를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후 진주목사·종성부사 등을 거쳐 공조참의에 올랐다.&lt;br /&gt;
|}&lt;br /&gt;
&lt;br /&gt;
[[송준길|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다. 1675년([[숙종 KU |숙종]] 1)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해 다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KU |성균관]] 학유(學諭)가 되었다. 학유로 있으면서 홍득우(洪得禹)·조상우(趙相愚) 등과 함께 스승 송준길의 복작(復爵)·추증을 상소하였다가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삭제당하였다. 1681년([[숙종 KU |숙종]] 7) 지평에 임명되었으며, 1684년([[숙종 KU |숙종]] 10) 장령이 되어 허목(許穆)의 관작을 회복시키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1685년 정언에 임명되고, 1694년([[숙종 KU |숙종]] 20) 필선(弼善)을 거쳐 장령이 되었다. 그해 [[갑술환국|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난 후에 [[인현왕후 KU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시키는 데 앞장선 이현일(李玄逸)·목내선(睦來善)·민암(閔黯) 등을 탄핵하고, [[희빈 장씨 KU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장희재]](張希載)를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후 진주목사(晋州牧使)·종성부사(鍾城府使) 등을 거쳐 공조참의에 올랐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8566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4298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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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규장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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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a Data ==&lt;br /&gt;
 타입 : 문화유산&lt;br /&gt;
 한글항목명 : 규장각&lt;br /&gt;
 한자항목명 : 奎章閣&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201410297김소희|김소희]]&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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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내용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설립일&lt;br /&gt;
|1776년&lt;br /&gt;
|-&lt;br /&gt;
!설립목적&lt;br /&gt;
|정치, 경제, 사회 등 현실문제의 학문적 해결&lt;br /&gt;
|-&lt;br /&gt;
!주요활동/업무&lt;br /&gt;
|국립도서관&lt;br /&gt;
|-&lt;br /&gt;
!요약&lt;br /&gt;
|조선시대의 관아&lt;br /&gt;
|}&lt;br /&gt;
&lt;br /&gt;
내각(內閣)이라고도 한다. [[정조|정조]](正祖)가 즉위한 1776년 궐내(闕內)에 설치, 역대 국왕의 시문, 친필(親筆)의 서화(書畵)·고명(顧命)·유교(遺敎)·선보(璿譜:王世譜)·보감(寶鑑) 등을 보관 관리하던 곳이다. 규장각의 명칭은 1464년([[세조|세조]] 10) 양성지(梁誠之)가 헌의(獻議)한 일이 있고, 1694년([[숙종 KU |숙종]] 20)에는 종부시(宗簿寺)에 예속된 어제(御製)·어필(御筆)을 보관하는 한 소각(小閣)의 각명(閣名)으로 쓰기도 하였으나 곧 폐지되었다. 정조는 즉위하자 곧 [[창덕궁 KU |창덕궁]](昌德宮)의 북원(北苑)에 새로 집을 짓고 고사(故事)를 따라 규장각이라 명명(命名), 직제(職制)를 갖춘 한 독립된 기구로서 국립도서관의 기능을 가지게 하였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단순히 역대 국왕의 어제·어필을 보관하는 일뿐만 아니라, 당시왕권을 위태롭게 하던 척리(戚里)·환관(宦官) 들의 음모와 횡포를 누르고, 건국 이래의 정치·경제·사회 등의 현실문제의 해결은 곧 학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 국가적 규모로 도서를 수집하고 보존 간행하는 데 있었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당색(黨色)을 초월하여 학식이 높은 사람을 모아 우대하였고, 그들 학자들은 [[조선 KU |조선]]왕조가 지니고 있던 구조적(構造的)인 모순에 대한 비판과 재검토를 하였다. 정조는 세손(世孫)으로 있을 때부터 정색당(貞賾堂)이라는 서고(書庫)를 지어 도서수집에 전념하였으며, [[명나라|명나라]]에서 기증해 온 [[중국 KU |중국]]본을 모았으며, 또 입연사절(入燕使節)을 통하여 새로운 서적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부속기구로서 서고(西庫)와 열고관(閱古館)을 두었으며, 서고에는 조선본, 열고관에는 중국본을 나누어 보관하였고, 열고관의 도서가 늘어남에 따라 다시 개유와(皆有窩)라는 서고를 증축하였다. &lt;br /&gt;
&lt;br /&gt;
규장각의 도서는 1781년(정조 5)경에 장서 정리가 되면서 총 3만여 장서의 도서목록이 서호수(徐浩修)에 의하여 작성되어 이를 《규장총목(奎章總目)》이라 하였다. 규장각은 도서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그와 함께 도서를 편찬하는 데도 힘을 기울여 많은 책을 편찬하였다. 그 중에서도 매일매일의 정사(政事)를 기록한 《[[일성록|일성록]](日省錄)》은 대표적인 것으로, 정조 때 편찬하기 시작한 이 편년체(編年體) 사서(史書)는 한말(韓末)까지 계속되었다. &lt;br /&gt;
&lt;br /&gt;
규장각은 1894년 [[갑오개혁 KU |갑오개혁]] 때 궁내부(宮內府)에 두었다가 이듬해인 1895년 규장원(奎章院)으로 고쳐 이때 한·중 양국본의 도서와 각종 왕가 전보(傳寶)를 보관하였으며, 1897년(고종 34) 다시 규장각으로 이름을 환원시켰다. 규장각에는 제학(提學:종1∼정2품) 2명, 직제학(直提學:종2품∼정3품 당상관) 2명, 직각(直閣:정3∼종6품) 1명, 대교(待敎:정7∼9품) 1명 외에 검서관(檢書官) 4명 등의 관원이 있었다. 이 중에서 특히 검서관에는 종래 임용되지 못하던 서얼(庶孼)도 등용하여 서적의 교정과 서사(書寫)를 맡기어 5품에 해당하는 군직(軍職)을 주었다. &lt;br /&gt;
&lt;br /&gt;
규장각은 교서관(校書館)을 외각(外閣)으로 편입시켜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을 인쇄·반포하였으며, 1907년 제실(帝室)의 문한(文翰)·기록을 보관하였다. &lt;br /&gt;
&lt;br /&gt;
1908년 근대적인 직제(職制)를 편성하여 전모(典謀)·도서·기록·문서 등 4과가 사무를 집행하였으며, 이때 《[[승정원일기 KU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각 관서의 일기 및 등록과 정족(鼎足)·태백(太白)·오대(五臺)·적상(赤裳) 등의 사고(史庫) 장서까지 관할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로 그 이름이 없어지고, 소장되어 있던 도서는 한때 이왕직(李王職)에 도서실을 두어 보관하고 있었으나 1911년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으로 넘어갔다. 이때 넘어간 도서는 5,353부 10만 187책, 각종 기록은 1만 730책에 달하였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1912년 총독부에 참사관실(參事官室)이 설치되어 이들 도서와 관련된 사무는 참사관실로 이관되었고, 1922년 학무국으로 이관되었다가, 다시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으로 이관되었는데, 이때 15만 1519권의 책이 이 대학의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이 책들은 광복 후 [[서울대학교|서울대학교]]에서 인수하여 관리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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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410297김소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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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Meta Data ==&lt;br /&gt;
 타입 : 인물&lt;br /&gt;
 한글항목명 : 김소희&lt;br /&gt;
 한자항목명 : 金昭希&lt;br /&gt;
 영어항목명 : Kim So Hee&lt;br /&gt;
 편자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http://kadhlab102.com/wiki/index.php/User:201410297 김소희]&lt;br /&gt;
&lt;br /&gt;
&lt;br /&gt;
== 프로필 ==&lt;br /&gt;
 이름 : 김소희&lt;br /&gt;
 소속 :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lt;br /&gt;
 학번 : 201410297&lt;br /&gt;
 학교 : [http://www.konkuk.ac.kr/ 건국대학교]&lt;br /&gt;
 학과 : 문화콘텐츠학과&lt;br /&gt;
 나이 : 20&lt;br /&gt;
 성별 : 女&lt;br /&gt;
 별명 : [http://home.ebs.co.kr/cocomong/board/3/500507/list?hmpMnuId=101 코코몽]&lt;br /&gt;
 사는 곳 : 서울시 노원구&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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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력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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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sangsoo.es.kr/ 서울상수초등학교]&lt;br /&gt;
* [http://www.sinsang.ms.kr/ 신상중학교]&lt;br /&gt;
* [http://www.yonghwa.hs.kr/ 용화여자고등학교]&lt;br /&gt;
* [http://www.konkuk.ac.kr/ 건국대학교]&lt;br /&gt;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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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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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가사항 ==&lt;br /&gt;
&lt;br /&gt;
* 관심분야 : 춤/음악/아이돌/여행/사진/IT/건국대/문콘/운동/패션/사람/동물 등&lt;br /&gt;
* 꿈 : 남녀노소 누구나 감동받을 수 있는 공연을 기획하는 것&lt;br /&gt;
&lt;br /&gt;
* 좋아하는 것 : 춤, 음식, 음악(노래), 컴퓨터, 아이돌, 사진, 여행, 패션, 개, 고양이, 뛰어 놀기&lt;br /&gt;
* 싫어하는 것 : 생야채, 거짓말, 허세, 어색, 큰 벌레, 찝찝함&lt;br /&gt;
* 좋아하는 가수 : G-Dragon&lt;br /&gt;
* 좋아하는 음식 : 한식, 분식, 일식, 중식, 양식 등 생야채 빼고 다&lt;br /&gt;
* 싫어하는 음식 : 생야채&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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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싶은 말 ==&lt;br /&gt;
&lt;br /&gt;
[[자운서원팀 KU |자운서원팀]] 짱짱!! 모두 화이팅!!!&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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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원왕후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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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a Data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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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자 : [[자운서원팀 KU|자운서원팀]] [http://kadhlab102.com/wiki/index.php/User:201410297 김소희]&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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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출생~사망&lt;br /&gt;
|1687 ~ 1757&lt;br /&gt;
|-&lt;br /&gt;
!본관&lt;br /&gt;
|[[경주KU|경주]]&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KU|조선]] 제19대 [[숙종KU|숙종]]의 둘째 [[계비KU|계비]]. 본관 경주(慶州). 성 김(金). 존호(尊號) 혜순자경(惠順慈敬). [[휘KU|휘]]호(徽號) 정의장목(定懿章穆). 전호(殿號) 효소(孝昭).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주신KU|주신]](柱臣)의 딸. 1702년(숙종 28)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소생은 없다. 능은 [[고양시KU|고양]](高陽)의 [[명릉KU|명릉]](明陵)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6329&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3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410297</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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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현왕후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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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a Data ==&lt;br /&gt;
 타입 : 인물&lt;br /&gt;
 한글항목명 : 인현왕후&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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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요약 : 조선 제19대 [[숙종KU|숙종]]의 계비. [[기사환국KU|기사환국]] 때 폐서인이 되었다가 갑술옥사로 다시 왕후로 복위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궁녀가 쓴 소설《[[인현왕후전KU|인현왕후전]]》이 전해진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width=&amp;quot;100%&amp;quot;&lt;br /&gt;
!출생~사망&lt;br /&gt;
|1667 ~ 1701&lt;br /&gt;
|-&lt;br /&gt;
!본관&lt;br /&gt;
|여흥&lt;br /&gt;
|-&lt;br /&gt;
!별칭&lt;br /&gt;
|존호 효경숙성장순, 휘호 의열정목&lt;br /&gt;
|-&lt;br /&gt;
!국적&lt;br /&gt;
|[[조선KU|조선]]&lt;br /&gt;
|-&lt;br /&gt;
!출생지&lt;br /&gt;
|한양&lt;br /&gt;
|}&lt;br /&gt;
&lt;br /&gt;
성은 민씨(閔氏)이고,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존호(尊號)는 효경숙성장순(孝敬淑聖莊純), 휘호(徽號)는 의열정목(懿烈貞穆)이다. [[형조판서KU|형조판서]] 등을 지낸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KU|민유중]](閔維重)의 딸로서 1681년 숙종의 [[계비KU|계비]](繼妃)가 되었다. 숙종은 세자로 책봉되고 [[김만기KU|김만기]](金萬基)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숙종이 왕으로 등극하자 김씨는 [[인경왕후KU|인경왕후]](仁敬王后)가 되었다. 하지만 인경왕후가 천연두로 20세에 사망하자 인현왕후가 숙종 비로 간택되었던 것이며 그녀의 나이 15세였다. &lt;br /&gt;
&lt;br /&gt;
인현왕후 민씨의 집안은 [[서인KU|서인]]으로 당시 조정의 실권은 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숙종은 궁녀 [[희빈 장씨KU|장옥정]](張氏；희빈 장씨)을 좋아하여 인현왕후 민씨를 멀리하였다. 당시 장옥정은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KU|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에 의해 궁에서 쫗겨나 궐밖에서 살고 있었지만 숙종은 항상 장옥정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장옥정은 서인(西人)과 정치적으로 대립세력이었던 [[남인KU|남인]](南人)에 속했기 때문에 견제를 받아 후궁으로 머물수가 없었다. 하지만 1683년 명성왕후 김씨가 세상을 뜨자 숙종은 1686년 3년 상을 마치고 장옥정을 다시 궁으로 불러 후궁으로 삼았다. 당시 정치적으로는 서인의 영수이자 숙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던 [[김석주KU|김석주]](金錫胄)가 사망하고 민씨의 아버지 민유중도 세상을 뜨자 8년간 집권했던 서인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숙종 또한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진 서인에 염증을 느끼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인을 등용하였다.&lt;br /&gt;
&lt;br /&gt;
1688년 장씨가 왕자 윤(昀；뒷날의 [[경종KU|경종]])을 낳자 윤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왕자 윤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던 서인들은 숙청되기 시작했고 이 문제로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KU|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西人)이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나고 인현왕후도 폐위(廢位)되어 궁중에서 쫓겨나 서인(庶人)이 되었다. 1693년 무수리였던 최씨가 숙종의 아이를 잉태하자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도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국정을 운영하는 남인에 대한 실망감도 커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1694년 남인이 주도하는 역모사건이 고변되었고 [[갑술옥사KU|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 서인 소론 세력이 다시 정치적 실세로 등용되었으며 그해 4월 마침내 폐서인되었던 민씨도 왕후로 복위하였다. 1701년 사망하였는데 소생이 없었으며, 능은 [[경기도KU|경기도]] [[고양시KU|고양]](高陽)의 [[명릉KU|명릉]](明陵)이다. &lt;br /&gt;
&lt;br /&gt;
인현왕후를 주인공으로 하여 궁녀가 쓴 소설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이 전하는데, 인현왕후를 유교적 덕목과 인품을 갖춘 여인으로 그려내고 있다. 반면 [[숙종실록KU|숙종실록]]에는 희빈장씨가 왕자 윤을 출산하자 이로 인한 시기와 질투로 숙종과 관계가 멀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6494&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4298 네이버 두산백과]&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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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춘추시대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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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a Data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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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자 : [[자운서원팀 KU|자운서원팀]] [http://kadhlab102.com/wiki/index.php/User:201410297 김소희]&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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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lt;br /&gt;
&lt;br /&gt;
B.C. 770 [[주나라KU|주]](周)의 동천(东迁) 이후부터 B.C. 221 [[진나라KU|진]](秦) 시황제(始皇帝)의 통일까지의 시기로 [[공자KU|공자]](孔子)가 사서인 춘추(春秋)에서 이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을 서술한 데서 붙여진 이름. 이 시대는 지방분권적인 봉건제도가 해체되고, 진(秦), 한(汉)의 중앙집권적인 군현제가 실시되어가는 과도적인 시기로 [[존양왕이KU|존왕양이]](尊王洋夷)의 정신을 숭상하며 지방 분권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전국시대에 들어와서 존왕양이의 정신이 쇠퇴하고 오로지 약육강식의 논리만 살아남음으로써 7개의 강국 진(秦)ㆍ초(楚)ㆍ연(燕)ㆍ제(齐)ㆍ한(韩)ㆍ위(魏)ㆍ조(赵)의 전국칠웅(战国七雄)만이 남아 중앙집권적 국가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춘추시대의 군주가 후(候)라고 칭했던 반면, 전국시대의 군주는 왕(王)이라 칭하는 등 지방분권에서 중앙집권으로 변모해가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lt;br /&gt;
&lt;br /&gt;
춘추시대에는 최초로 철제농기구가 사용되고 우경(牛耕)이 시작되는 등 경제에 있어서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으며 이러한 경제 발전은 사회구조에 변화를 가져와 은(殷)ㆍ주(周)로 대표되는 씨족 사회가 사라졌고 가문의 배경이 없더라도 본인 자신의 재능으로 활약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으며 평민, 귀족, 왕족에 상관없이 군주들은 나라의 북국강병에 도움이 되는 인재들을 등용하였고, 이러한 사회 흐름에 따라 다양한 사상을 주장하는 [[제자백가KU|제자백가]](诸子百家)도 등장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09599&amp;amp;cid=796&amp;amp;categoryId=1535 네이버 중국시사문화사전]&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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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조선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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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요약 : BC 108년까지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존재한 한국 최초의 국가.&lt;br /&gt;
&lt;br /&gt;
《[[삼국유사KU|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朝鮮)을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그 뒤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세운 [[조선KU|조선]]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 용어가 널리 쓰였다. 지금은 단군이 건국한 조선과 위만조선을 포괄하여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고조선의 건국시기는 기원전 2333년으로 전한다. &lt;br /&gt;
&lt;br /&gt;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7세기 초이다. 이 무렵에 저술된 《관자(管子)》에 ‘발조선(發朝鮮)’이 제(齊)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보하이만[渤海灣] 북쪽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lt;br /&gt;
&lt;br /&gt;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랴오허[遼河]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집단이 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세운 중심집단의 시조설화(始祖說話) 형식으로 만들어졌다가, 뒤에 고조선 국가 전체의 건국설화로 확대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와 주(周)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였는데, 이때 고조선도 인접국인 연(燕)나라와 동시에 왕을 칭하였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더욱이 고조선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大夫) 예(禮)의 만류로 그만두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조선은 BC 4세기 무렵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연과 대립하고, 또 당시 중국인들이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BC 3세기 후반부터 연이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고조선은 밀리기 시작하였다. BC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요하 상류에 근거를 둔 동호족(東胡族)을 원정한 다음 고조선 영역내로 쳐들어왔다. 이때 연은 요동지방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고 장새(障塞)를 쌓았다. 그 결과 고조선은 서방 2,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 만번한(滿潘汗:랴오둥의 어니하 및 그와 합류한 청하의 하류지역에서 동북으로 성수산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요하 유역쪽에서 평양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lt;br /&gt;
&lt;br /&gt;
그뒤 진(秦)나라가 연을 멸망시키고(BC 222), 요동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의 공격이 두려워서 복속할 것을 청하였지만, 직접 조회(朝會)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부왕이 죽고 아들 준왕(準王)이 즉위할 무렵 진(秦)이 내란으로 망하고, 대신 BC 202년 한(漢)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은 진과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고, 다만 과거 연이 쌓은 장새만을 수축하고 고조선과의 경계를 패수(浿水)로 재조정하였다. BC 195년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지방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위만(衛滿)도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BC194년 위만은 자신의 세력을 모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워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로 가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고 부른다. &lt;br /&gt;
&lt;br /&gt;
위만은 유이민집단과 토착 고조선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중국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 ·임둔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는 남쪽의 진국(辰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漢)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濊君) 남려(南閭)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은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였는데, 그것은 고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양측은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한은 BC 109년 육군과 수군을 동원하여 수륙 양면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고, 고조선은 총력을 다하여 이에 저항하였다. &lt;br /&gt;
&lt;br /&gt;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 ·이탈되었다.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은 강화(講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남쪽의 진국으로 갔다. 또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尼谿相) 삼(參), 장군(將軍) 왕겹(王唊)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長)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BC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한은 고조선의 영역에 낙랑 ·임둔 ·현도 ·진번 등 4군을 설치하였다. 이때 많은 고조선인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그들은 삼한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lt;br /&gt;
&lt;br /&gt;
고조선이 한의 대군을 맞아 약 1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조선의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이었다. 고조선 후기에는 철기가 한층 더 보급되고,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은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그러한 성격에 말미암은 바가 컸다. &lt;br /&gt;
&lt;br /&gt;
지배층 사이의 취약한 결속력은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고조선 사회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지금 전하는 [[8조법KU|8조법]]을 통해 볼 때 계급의 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제·신분제가 존재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웹 자원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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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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