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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H 교육용 위키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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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4-22T02:48:53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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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심즉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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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7T08:33: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 중국 남송(南宋)의 육상산(陸象山)이 제창하여 명대(明代)의 왕양명(王陽明)이 계승한 학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 주자(朱子)가 주장하는 ‘성즉리(性卽理)’(인간의 本性은 곧 天理로서 도덕적 善이라는 사상)에 대항하여 제창한 것으로 주자가 마음(心)에는 성(性)과 정(情)의 두 요소가 있으며 정을 억제하고 본성(本性)으로 돌아가라는 엄격한 수양법을 주장하는 데 대하여, 육상산은 정이란 말하자면 환영(幻影)과 같은 것이므로 본심(本心:本性)이 곧 천리(天理)임을 믿고 적극적으로 실천하자고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 이와 같은 사상은 곧, 엄격한 도덕주의에 대한 낙천적인 도덕론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왕양명은 이 ‘심즉리’의 입장을 더욱 진전시켜 천리, 즉 도덕적인 원리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면서, 성과 정을 포함한 마음 전체의 모습이 천리라고 주장하였다. 양명학(陽明學)에 입각한 ‘심즉리’는 인간의 정욕(情慾)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측면이 있으며, 주자학(朱子學) 비판에서는 육상산의 입장보다 한결 강렬하였다.&lt;br /&gt;
&lt;br /&gt;
== 참고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19792&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464 심즉리(두산백과)]&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B1%EC%A6%89%EB%A6%AC</id>
		<title>성즉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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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7T08:32: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 중국 송대(宋代)의 철학자 정이천(程伊川)이 주창하고 주자(朱子)가 계승한 주자학의 근본 명제(命題).&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 혼탁한 '기(氣)'로 더럽혀지지 않은 '성(性:본연의 성)'이야말로 천리(天理)라고 주장하는 설(說)이다. 성(性)과 정(情)을 분명하게 구별한 연후에, 그 성을 함양하기 위해 엄격한 도덕적·학문적 수양을 요구하는 주자학 특유의 엄격주의의 기본이 되었다. 후에 육상산(陸象山)·왕양명(王陽明) 등의 '심즉리(心卽理)'설(說)이 이 명제에 대한 대립이론으로 나타났다.&lt;br /&gt;
&lt;br /&gt;
== 참고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12753&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479 성즉리(두산백과)]&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B%88%EA%B3%A0%ED%95%99</id>
		<title>훈고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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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7T08:31: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Created page with &amp;quot;==요약== * 언어(言語)를 연구함으로써 문장을 바르게 해석하고 고전(古典) 본래의 사상을 이해하려는 학문.  == 내용 == * 중국의 경서(...&amp;quot;&lt;/p&gt;
&lt;hr /&gt;
&lt;div&gt;==요약==&lt;br /&gt;
* 언어(言語)를 연구함으로써 문장을 바르게 해석하고 고전(古典) 본래의 사상을 이해하려는 학문.&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 중국의 경서(經書) 연구로부터 일어났으며, 좁은 의미로는 한(漢) ·당(唐) 및 청대(淸代)의 훈고학을 일컫는다. ‘訓’은 언어라는 뜻, ‘詁’는 옛 언어를 말한다. &lt;br /&gt;
* 어느 나라에서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전의 탐독은 어려워지게 마련이지만, 특히 중국에서는 진(秦)의 시황제(始皇帝)의 분서갱유(焚書坑儒:BC 213∼BC 212) 사건과, 한초(漢楚)의 흥망(BC 209∼BC 202), 그리고 진(秦)에서 한초(漢初)에 걸쳐 한자(漢字)의 일대 변혁이 있어 짧은 기간 동안 학문적 단절이 있었다. 그래서 한나라 이전의 서적을 읽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한나라 때는 유교가 가장 중요한 학문으로 자리를 잡아나갔고 중국의 학문은 유교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한나라(漢:BC 202∼AD 8)에 들어서 사라진 유교경전의 내용을 발굴하고 그 뜻을 밝히는 학문이 발달했는데 이를 훈고학이라고 한다. &lt;br /&gt;
* 《시경(詩經)》의 〈모전(毛傳)〉은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아(爾雅)》는 자전(字典)의 원시적인 것으로서 문자의 학문인 소학(小學)의 전문서이다. 후한(後漢:25∼220)에서는 폭넓은 연구가 이루어져 마융(馬融) ·정현(鄭玄) ·가규(賈逵) 등이 나타났고,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소학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이와 같이 한의 훈고학은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밝혀 원래의 의미를 밝혔는데 이런 훈고학의 흐름은 삼국 ·육조(六朝)를 거쳐 당나라까지 이어졌으며, 당나라의 공영달(孔穎達) 등이 칙명을 받아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집하므로(640) 큰 성과를 올렸다. 그 후 유심적(唯心的) 경향이 강한 송학(宋學)의 유행으로 훈고학은 일시 쇠퇴하였으나, 청나라(淸:1644∼1911)에 이르러는 서양과학의 영향을 받게 되어 실증적인 고증학(考證學)이 일어났으며, 한학 부흥을 목표로 내걸었다. 청의 훈고학 특징은 《설문해자》를 기초로 하는 소학을 존중한 점에 있으며, 대진(戴震) ·단옥재(段玉裁) ·왕염손(王念孫) ·왕인지(王引之) ·유월(兪樾) 등이 그 대표적인 학자이다.&lt;br /&gt;
&lt;br /&gt;
== 참고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56232&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464 훈고학(두산백과)]&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6%84%EC%84%9C%EA%B0%B1%EC%9C%A0</id>
		<title>분서갱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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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7T08:30: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Created page with &amp;quot;== 요약 == 진나라의 승상(丞相) 이사(李斯)가 주장한 탄압책으로 실용서적을 제외한 모든 사상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를 생매장한 ...&amp;quot;&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진나라의 승상(丞相) 이사(李斯)가 주장한 탄압책으로 실용서적을 제외한 모든 사상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를 생매장한 일.&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 상앙(商鞅) ·한비자(韓非子) 등의 법가(法家)는 우민 정책과 법에 의한 획일적인 사회 통제를 주장하기 때문에 법치 노선을 비판할 수 있는 일체의 학문과 사상을 배격하였으며, 특히 선왕 도를 내세워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유가(儒家)를 배척하였다. 진(秦)나라는 상앙 변법 이래 법치 노선을 견지하였고 천하 통일 이후에도 이 정책은 변하지 않았다. 시황제(始皇帝) 34년(BC 213년) 전국의 유생들이 진나라에서 실시하는 중앙집권적 군현제를 반대하고 봉건제 부활을 주장함으로써 불행한 사태가 시작되었다. 시황제는 일단 그 의견을 조정의 공론에 붙였으나, 철저한 법가로 일관한 승상 이사(李斯)는 그에 반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차제에 사적인 학문으로 정치를 비판하는 일체의 행동을 본원적으로 봉쇄하기 위하여 진나라 이외의 모든 책은 불태우고, 《시》 《서》 백가어를 소장한 자는 30일 이내에 모두 관에 신고하여 불태우게 했다. 이를 어긴 자는 관노 성단(城旦)으로 삼으며, 감히 《시》 《서》를 논한 자는 기시(棄市)에 처하고, 옛것을 들먹이며 현실 정치를 비방한 자는 족형(族刑)에 처할 것, 단 의약 ·점복 ·농업 관계 서적은 제외할 것을 건의하자, 시황제는 이를 재가하였다.&lt;br /&gt;
&lt;br /&gt;
* 이듬해(BC 212년) 불로장생약(不老長生藥)을 구한다는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이라는 방사(方士)가 많은 재물을 사취(詐取)한 뒤 시황제의 부덕(不德)을 비난하며 도망을 치자, 시황제는 함양(咸陽)에 있는 유생을 체포하여 결국 460여 명이 구덩이에 매장되는 형을 받았다. 이것이 역사상 악명 높은 시황제의 분서갱유인데, 처형 규모도 크지 않고 실제 유생이라기보다는 사기성이 농후한 일부 방사를 겨냥한 것이라는 점을 들어 유가(儒家) 탄압을 과장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또 분서도 그 실제적인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진제국에서 유가가 환영받지 못한 것은 명백하며, 한제국이 BC 191년 새삼 ‘협서율(挾書律:금서 소지를 금하는 법)’을 폐지할 때까지 원칙상 유가의 고전이 자유롭게 학습될 수 없던 것도 사실이라면, 분서갱유가 유가를 일시나마 크게 위축시킨 것은 사실이다.&lt;br /&gt;
&lt;br /&gt;
== 참고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466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787 분서갱유(두산백과)]&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8%88</id>
		<title>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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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7T08:29:5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Created page with &amp;quot;== 요약 == * 넓은 의미로는 풍속이나 습관으로 형성된 행위 준칙, 도덕 규범, 등 각종 예절.  == 내용 == * 사회의 질서를 위해 만들어진...&amp;quot;&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 넓은 의미로는 풍속이나 습관으로 형성된 행위 준칙, 도덕 규범, 등 각종 예절.&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 사회의 질서를 위해 만들어진 유교적 윤리규범을 지칭한다. 예(禮)는 본시 고대 사회에서 복을 받기 위해 귀신을 섬기는 일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예(禮)’자의 ‘示’는 ‘神’자에서, ‘豊’은 그릇에 곡식을 담은 모양이라고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풀이한다. 유가에서 예를 매우 중요시하여 《시경(詩經)》에는 ‘사람이면서 예가 없다니 어찌하여 빨리 죽지 않는가(人而無禮胡不遄死)라고 하였고 심지어 예로써 짐승과 구분 기준을 삼았다. 예의 종류로 오례(五禮)라 하여 길례 ·흉례 ·군례 ·빈례 ·가례(吉禮 ·凶禮 ·軍禮 ·賓禮 ·嘉禮)를, 구례(九禮)라 하여 관례(冠禮) ·혼례(婚禮) ·조례(朝禮) ·빙례(聘禮) ·상례(喪禮) ·제례(祭禮) ·빈주례(賓主禮) ·향음례(鄕飮禮) ·군여례(軍旅禮)를 말하여 한국에도 전래되었지만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일상 생활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례(四禮), 곧 관례, 혼례, 상례, 제례이다. 이 사례를 일컬어 가례(家禮)라 하며 주자의 예설을 모아 편한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조선시대의 모든 가례의 표준이 되었다.&lt;br /&gt;
&lt;br /&gt;
* 지금까지도 항간에서 많이 쓰이는 《사례편람(四禮便覽)》을 비롯하여 《사례찬설》 《사례촬요》 《사례훈몽》 등 예절에 관한 많은 책들이 한결같이 《주자가례》를 모범으로 삼았을 정도로 주자의 예설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런데 이런 예법은 주로 양반 계층에서 지켜졌으며 이른바 상민계급에게는 별로 통용되지 않았다. 중국은 양반계급에서조차 한국만큼 예가 철저하게 준용되지 않았다. 한국의 지나친 예의 준용은 당쟁이나 사화를 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하여 사회에 끼친 부정적 영향이 매우 컸다. 이는 공자가 강조한 예의 본질은 차츰 퇴색하고 예의 형식이 위세를 떨쳤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27525&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532 예(두산백과)]&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B8</id>
		<title>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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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7T08:28: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Created page with &amp;quot;== 요약 ==  공자(孔子)의 중심 사상. 인은 ‘어질다’는 뜻으로, 선(善)의 근원이 되고 행(行)의 기본이 되는 것을 이른다.  == 내용 ==  ...&amp;quot;&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lt;br /&gt;
공자(孔子)의 중심 사상. 인은 ‘어질다’는 뜻으로, 선(善)의 근원이 되고 행(行)의 기본이 되는 것을 이른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 중국사상이 인에 심원한 내용이 부여되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춘추시대 전후부터이다. 공자가 인을 자기의 사상의 핵심을 표현하는 개념으로서 정립한 이후, 공자학파에서는 &amp;lt;인간다움의 극치&amp;gt;를 표징하는 최고의 덕목이 되었다. 인의 내용에 대해서 공자 자신 여러 가지로 주장하는데, &amp;lt;사람을 사랑하는&amp;gt;것으로 일반화되었다. 유가는 사랑에 차등을 두는 것을 시인하기 때문에,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인 &amp;lt;효(孝)&amp;gt;의 실천이 인을 실현하는 제1단계라고 하며, 친근한 자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해서 그 사랑이 미치는 범위를 점차 확대해가면 종극적으로는 인류애에 도달한다고 생각하였다. &amp;lt;겸애(무차별의 사랑)&amp;gt;를 주장하는 묵자에게서 이 &amp;lt;인애(仁愛)&amp;gt;는 &amp;lt;별애(차별애)&amp;gt;라고 비판되었는데 가족애나 애국심이 반드시 인류애와 양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비판이다.&lt;br /&gt;
* 또한 공자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인식과 함께 &amp;lt;극기복례&amp;gt; 즉 자기 멋대로의 기를 극복하고, 사회적 규범인 예에 따르는 것이 인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성선설을 주장하는 맹자는 묵자의 겸애를 자기의 부모와 타인의 부모를 구별하지 않는 &amp;lt;금수의 사랑&amp;gt;이라고 공격하고, 공자의 인설을 발전시켰는데 인의 근거를 사람의 마음, 즉 인간의 불행을 묵시할 수 없다는 &amp;lt;사람에 인내하는 마음&amp;gt;에서 구했다. 공자는 개인의 존재방식에 따라서 인을 주장하는데, 맹자는 사회적 타당성을 의미하는 &amp;lt;의(義)&amp;gt;에 인과 대등한 가치를 주고, &amp;lt;인의의 도&amp;gt;를 주장하고, &amp;lt;사람에게 인내하는 마음&amp;gt;에 의거한 &amp;lt;사람에게 인내하는 정치&amp;gt;의 실현을 지향하는 것이 참된 &amp;lt;왕자&amp;gt;의 임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 &amp;lt;인정(仁政)&amp;gt;의 주장은 &amp;lt;인간다움&amp;gt;의 표현인 인은 개인의 노력, 존재방식만으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 등의 사회적 힘에 뒷받침되어서 보다 고도로 달성된다는 인식을 배후에 지니고 있다.&lt;br /&gt;
* 그후 송대가 되어서 인설은 독자적으로 철학적 전개를 하고, 주돈이는 우주론적으로 인을 해석해서 인류 최고규범이라고 하였으며, 정호(명도)는 인을 사람 중에 있는 &amp;lt;천의 원리&amp;gt;라고 보고, 이 &amp;lt;원&amp;gt;의 유행을 인의 본질이라고 하였다. 정이는 인을 &amp;lt;이(理)&amp;gt;라고 하며, &amp;lt;공(公)&amp;gt;이라고 주장하고, 정이의 설을 계승한 주희(주자)가 &amp;lt;인은 사랑의 이치, 마음의 덕이다&amp;gt;라고 정의한 것은 사랑을 작용으로 보고, 인을 본체로 보는 입장에 서있기 때문이었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30699&amp;amp;cid=275&amp;amp;categoryId=1105 인(종교학대사전, 1998.8.20, 한국사전연구사)]&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6828&amp;amp;cid=1621&amp;amp;categoryId=1621 인(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0%B1%EC%9A%B4%EB%8F%99%EC%84%9C%EC%9B%90</id>
		<title>백운동서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0%B1%EC%9A%B4%EB%8F%99%EC%84%9C%EC%9B%90"/>
				<updated>2014-06-17T08:27:3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Created page with &amp;quot;== 요약 == *서원의 시초. 조선 중종 때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서원으로 안향(安珦)을 봉사함  == 내용 == *조선시대의 서원은 선현에...&amp;quot;&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서원의 시초. 조선 중종 때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서원으로 안향(安珦)을 봉사함&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조선시대의 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와 학문 연구, 사림의 자제 교육 등을 담당하였는데, 이 서원의 시초가 백운동서원이다. 중종 때(1543) 풍기 군수인 주세붕이 안향이 살던 경상도 순흥면의 백운동에 그를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자제들의 교육 장소로 삼은 데서 '백운동서원'이라고 하였다. 그 후 명종 때는 이황의 건의로 백운동서원이 소수서원으로 사액(賜額)되고, 국가로부터 서적과 토지, 노비 등을 받고 면세와 면역의 특권까지 받아 경제적인 기반을 확립할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이후 많은 서원들이 지방에 설치되었는데, 선현을 받들고 교육과 연구를 하던 서원은 향교와 다르게 각기 다른 선현들을 제사지냈으며, 그 운영에서도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서원의 증대에는 특히 이황과 그 제자들의 노력이 컸다. 선조 때는 편액을 하사받은 사액 서원만 100개가 넘었으며, 18세기에는 700여 개소, 고종 때는 1,000여 개소나 되었는데 그중 사액 서원이 약 1/3을 차지하였다. 이 서원은 영조 때와 대원군 때 대폭 정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참고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34010&amp;amp;cid=525&amp;amp;categoryId=525 백운동서원 (시사상식사전, 박문각)]&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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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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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경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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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Created page with &amp;quot;== 요약 == * 유학(儒學)의 근본이 되는 문헌.  == 내용 == * 경(經)이라고도 한다. 경(經)은 직물의 주축이 되는 날실을 가리키며 가장 기...&amp;quot;&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 유학(儒學)의 근본이 되는 문헌.&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 경(經)이라고도 한다. 경(經)은 직물의 주축이 되는 날실을 가리키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성현의 가르침을 기록한 것을 ‘경’ 또는 ‘경서’라고 하게 되었다. 맹자(孟子)는 《시(詩)》 《서(書)》 《춘추(春秋)》를 경이라 하였고, 순자(荀子)는 여기에 《예(禮)》와 《악(樂)》을 추가하였으며, 장자(莊子)는 다시 《역(易)》을 추가하여 그 하나하나에 ‘경(經)’을 붙여 《시경(詩經)》 《역경(易經)》 등이라 하게 되었다. 이들 육서(六書)를 ‘육경(六經)’이라 하며, 한(漢)나라 때는 ‘육예(六藝)’라고도 하였다. &lt;br /&gt;
&lt;br /&gt;
*시대가 흐름에 따라 경서의 수가 증가하여 남송(南宋) 시대에 이르러서는 《역》 《서》 《시》와 《주례(周禮)》 《의례(儀禮)》 《예기(禮記)》의 ‘삼례(三禮)’에 《춘추》의 《좌씨전(左氏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의 3전(傳) 및 《논어(論語)》 《효경(孝經)》 《맹자(孟子)》 《이아(爾雅)》를 추가하여 ‘13경’이 되었으나, 정호(程顥) ·정이(程頤)의 이정자(二程子)와 주자(朱子)는 《예기(禮記)》 속의《대학(大學)》 《중용(中庸)》 2편과 《논어》 및 《맹자》를 합하여 ‘사서(四書)’라 하고, 《역경》 《서경》 《시경》 《예기》 《춘추》의 ‘오경(五經)’과 합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이라 하고 중히 여겼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0058&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465 경서(두산백과)]&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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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설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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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655(태종무열왕 2)∼? 신라 중대의 대학자.&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 자는 총지(聰智). 증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赤大公), 할아버지는 나마(奈麻) 담날(談捺)이고, 아버지는 [[원효(元曉)]],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다. 육두품 출신인 듯하며,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증보문헌비고≫에는 경주설씨(慶州薛氏)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출생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원효불기 元曉不羈＞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태종무열왕 때, 즉 654∼660년 사이에 출생한 듯하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했으며, 우리말로 구경(九經)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10현(新羅十賢)의 한 사람이며, 또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더불어 신라3문장(新羅三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삼국사기≫에 “우리말(方言)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훈도하였다(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라 했고, ≪삼국유사≫에는 “우리말(方音)로 화이(華夷 : 중국 민족과 그 주변의 오랑캐)의 방속(方俗)과 물건의 이름을 이해하고 육경(六經)과 문학을 훈해(訓解)했으니, 지금도 우리 나라［海東］의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이가 전수(傳受)해 끊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lt;br /&gt;
&lt;br /&gt;
* 이 두 기록을 근거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설총이두창제설(薛聰吏讀創製說)이 비롯되었으나, 이는 틀린 것이다. 여러 기록에서 ‘吏讀·吏道·吏吐·吏套·吏頭·吏札’ 따위로 불리는 이 방법은 향가 표기법인 [[향찰(鄕札)]]을 가리키는 것인데, 우리말로 육경을 읽는 데 능통했다고 해서 이것을 이두 또는 향찰의 고안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향가 표기식 방법, 즉 향찰은 설총 이전부터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568년(진흥왕 29)에 북한산 비봉(碑峯)에 세운 진흥왕순수비의 비문에도 이미 나타나 있고, 또 설총 이전에 향찰로 표기된 향가 작품으로는 진평왕 때의 ＜서동요 薯童謠＞·＜혜성가 彗星歌＞와 선덕여왕 때의 ＜풍요 風謠＞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설총이 향찰(이두)을 창안한 것이 아니라 향찰을 집대성,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설총은 향찰의 권위자로 봄이 타당하다. 설총은 육경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함으로써 한문을 국어화하고, 유학 또는 한학의 연구를 쉽게 그리고 빨리 발전시키는 데 공이 컸다. 또 관직에 나아가 문필에 관계되는 직, 즉 한림과 같은 직에 있었을 것이며, 신문왕 때 국학(國學)을 설립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719년(성덕왕 18)에는 나마의 관등으로서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를 저술하였다. 이 밖에도 많은 작품이 있었을 것이나 ≪삼국사기≫를 엮을 때 이미 “글을 잘 지었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지금도 남쪽 지방에 더러 설총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으나 글자가 떨어져 나가 읽을 수가 없으니 끝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다.”라고 하면서 완전하게 남은 게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lt;br /&gt;
&lt;br /&gt;
*한편, 오늘날 설총의 문적(文蹟)으로는 우화적 단편 산문인 ＜화왕계 花王戒＞가 당시 신문왕을 풍간(諷諫)했다는 일화로서 ≪삼국사기≫ 설총열전에 실려 전한다. 이 ＜화왕계＞는 ＜풍왕서 諷王書＞라는 이름으로 ≪동문선≫ 권53에도 수록되어 있다. 죽은 뒤에도 계속 숭앙되어 고려시대인 1022년(현종 13) 1월에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문묘(文廟) 동무(東廡)에 신라2현이라 해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5353&amp;amp;cid=1590&amp;amp;categoryId=1590 설총(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9C%EB%8B%B9</id>
		<title>서당</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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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7T08:23:1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Created page with &amp;quot;=== 요약 === * 향촌사회에 생활근거를 둔 사족(士族)과 백성이 주체가 되어 면·동·이를 기본단위로 설립한 초중등 단계의 사설교육...&amp;quot;&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 향촌사회에 생활근거를 둔 사족(士族)과 백성이 주체가 되어 면·동·이를 기본단위로 설립한 초중등 단계의 사설교육기관.&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논자에 따라서는 고구려시대의 경당(扃堂)과 같은 학교제도를 서당교육의 출발로 이해하기도 한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을 세워 관학교육(官學敎育)의 출발로 삼는 한편, 민간교육기관으로서 [[경당]]을 두었다. 중국의 사료(史料)인 ≪신당서 新唐書≫와 ≪구당서 舊唐書≫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구려 사람들은 책을 사랑하여 벼슬아치 집에서 평민의 집에 이르기까지 저자거리에 큰 집을 지어 이를 경당이라 부르고, 혼인하기 전의 자제들이 여기에서 밤낮으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경당에서는 [[문무겸비]]의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이는 신라의 [[화랑도]]와 마찬가지로 교육기관인 동시에 청소년들의 결사조직체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지닌 맹점은 경당의 사회적인 역할이 과연 어느 정도로 서당의 사회적 역할과 일치하였는가를 명확히 해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앞으로 경당에 대한 정밀한 성격규명이 있은 다음이라야 서당과의 상호 동질성과 이질성이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신라에서도 [[설총(薛聰)]]이 [[경서(經書)]]를 이두로 풀어서 제생(諸生：여러 학생)을 가르쳤다고 하였으니, 그가 가르친 곳이 사숙일 가능성이 짙고, 이 또한 서당교육의 연원의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는 경관(經館)과 서사(書社)라는 서당 형태의 교육기관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lt;br /&gt;
&lt;br /&gt;
*서당의 사회적 의미가 증대한 것은 16세기 [[사림파]]의 등장과 시기를 같이 하는 것으로, 중종대 사림파의 [[향약]]보급운동과도 일련의 연관성을 지닌다. 16세기 서당 설립의 주도 세력은 대부분 당시 향촌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던 명문사족 출신인 대토지 소유자였다. 예를 들면, 안동의 의성 김씨(義城金氏) 가문, 고평(高坪)의 청주 정씨(淸州鄭氏) 가문, 의성의 함양 박씨(咸陽朴氏) 가문 등이 그 전형적인 사례들이다. 당시 서당 설립의 주도 세력의 신분은 입사(入仕：벼슬한 뒤에 처음으로 그 벼슬자리에 나감) 이전의 생원·진사들이 주류였고, 설립의 명분은 대체로 반상(班常：양반과 상사람) 구별을 비롯한 유학적 질서율을 향촌사회에 정착시키려고 하는 데서 찾고 있다. 서당의 교육내용은 고급 성리서(性理書)를 위주로 하거나 과거응시를 목적으로 하는, 이른바 고제적 서당(高弟的書堂)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한편 서당의 설립은 관(官)의 지원을 최대한 배제하고, 경내 백성들의 공동체적 일체감 속에서 민간자산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양란 후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사족들은 약화된 재지기반을 강화하는 방안으로 서당을 중심으로 관권 및 외부 사림과의 결합을 시도하였다.&lt;br /&gt;
&lt;br /&gt;
*오늘날 서당은 크게 세가지 유형으로 나뉘는데, 대부분은 서당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초보적인 수준부터 중·고급 수준까지 한자 능력 습득을 목적으로 하는 사설학원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이 곳에서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예와 예절교육을 담당하기도 하며, 방학을 이용한 특별강좌를 운영하기도 한다. 두 번째로는 전통적인 서당 교육방법을 고수하며, 한자로 된 고전을 능숙하게 해독해낼 수 있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서당이 극소수 존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인터넷의 빠른 보급과 확산에 힘입어 사이버 서당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로 기존의 서당이나 한학연수원에서 운영하는 것으로서, 한자인구의 저변 확대라는 점에서 향후 역할이 주목된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4121&amp;amp;cid=404&amp;amp;categoryId=404 서당(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4%80%ED%95%99</id>
		<title>관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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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17T08:21: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 조선시대의 교육 제도&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조선시대 성균관(成均館)과 사부학당(四部學堂, 四學이라고도 함)을 합쳐 부른 칭호.&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24153&amp;amp;cid=1592&amp;amp;categoryId=1592 네이버 지식백과 관학(館學)]&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A1%B0%EC%84%A0%EC%9D%98_%EA%B5%90%EC%9C%A1_%EC%8B%9C%EC%84%A4_KU</id>
		<title>조선의 교육 시설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A1%B0%EC%84%A0%EC%9D%98_%EA%B5%90%EC%9C%A1_%EC%8B%9C%EC%84%A4_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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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lt;/p&gt;
&lt;hr /&gt;
&lt;div&gt;==[[관학 KU | 관학]]==&lt;br /&gt;
==[[서당 KU | 서당]]==&lt;br /&gt;
==[[성균관 KU | 성균관]]==&lt;br /&gt;
==[[서원 KU | 서원]]==&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201310212_%EC%9D%B4%EC%A7%80%ED%98%95</id>
		<title>201310212 이지형</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201310212_%EC%9D%B4%EC%A7%80%ED%9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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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lt;/p&gt;
&lt;hr /&gt;
&lt;div&gt;[[File:201310212.jpg|200px]]&lt;br /&gt;
&lt;br /&gt;
*이름 : 이지형&lt;br /&gt;
*소속 : 건국대 철학과&lt;br /&gt;
*학번 : 201310212&lt;br /&gt;
&lt;br /&gt;
*새삼스레 문콘아이들이 대단하다고 느껴지고 있음&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8%B0%ED%98%B8%ED%95%99%ED%8C%8C(%E7%95%BF%E6%B9%96%E5%AD%B8%E6%B4%BE)</id>
		<title>기호학파(畿湖學派)</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8%B0%ED%98%B8%ED%95%99%ED%8C%8C(%E7%95%BF%E6%B9%96%E5%AD%B8%E6%B4%BE)"/>
				<updated>2014-06-10T06:22: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Created page with &amp;quot; ===요약=== *조선 중기 기호지방을 근거지로 한 이이(李珥)·성혼(成渾) 학파를 통칭한 말  ===내용===  *원래 기호지방은 경기도와 호서...&amp;quot;&lt;/p&gt;
&lt;hr /&gt;
&lt;div&gt;&lt;br /&gt;
===요약===&lt;br /&gt;
*조선 중기 기호지방을 근거지로 한 이이(李珥)·성혼(成渾) 학파를 통칭한 말&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원래 기호지방은 경기도와 호서지방·해서지방을 포괄하는 지역을 의미하지만, 역사적 개념에서 기호학파는 경기도·충청도 지역의 이이·성혼의 문인과 학자들의 집단을 지칭한다. &lt;br /&gt;
조선 전기에 영남지방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왕조교체에 불만을 품고 은거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일단의 학자군이 형성되고, 조선 중기에 이황(李滉)이 배출되면서 영남학파가 성립되었지만 기호학파는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학문적 결속력이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조 후기에 동서분당이 형성되고 영남학파의 다수가 [[동인]]이 되면서 이에 대항하는 [[서인]]세력이 기호지역을 중심으로 결집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참고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1673&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450 두산백과 기호학파]&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8%81%EB%82%A8%ED%95%99%ED%8C%8C</id>
		<title>영남학파</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8%81%EB%82%A8%ED%95%99%ED%8C%8C"/>
				<updated>2014-06-10T06:20: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lt;/p&gt;
&lt;hr /&gt;
&lt;div&gt;== 내용 ==&lt;br /&gt;
*먼저 영학파는 정몽주에서 비롯되어 길재·김숙자를 거쳐 김종직(金宗直)으로 이어지는데, 김종직은 당대 유학의 조종으로서 많은 제자를 두었다. 특히 김굉필과 정여창은 도학에 정진하여 후대 한국성리학이 발전할 수 있는 학문적 토양을 조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연산군 때 훈구파와 갈등하여 정치적으로 희생되었지만, 그 도학정신은 이어져 한 갈래는 조광조를 통해 기호지방으로 전해졌고, 다른 한 갈래는 이언적을 거쳐 이황·조식으로 전승되었다. &lt;br /&gt;
&lt;br /&gt;
*조선 중기에 경상좌도에서 이황의 학문사상을 추종하는 유파가 형성되었는데, 이를 퇴계학파라 하며 조목(趙穆)·기대승·김성일·유성룡 등이 유명했다. 같은 시기에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조식의 학식과 덕행을 추종하는 남명학파가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조식의 영향을 받아 기절(氣節)과 의리를 숭상했으며 곽재우(郭再祐)·정인홍(鄭仁弘) 등이 이에 속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남명학파는 쇠퇴하고 퇴계학파가 성해지면서 좌도·우도의 구별이 흐려지고 퇴계학파로 흡수되어, 나중에는 퇴계학파가 영남학파의 대명사가 되었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19028&amp;amp;cid=828&amp;amp;categoryId=828 네이버 지식백과 : 영남학파]&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A1%B0%EC%84%A0%EC%9D%98_%EC%82%AC%EC%83%81_KU</id>
		<title>조선의 사상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A1%B0%EC%84%A0%EC%9D%98_%EC%82%AC%EC%83%81_KU"/>
				<updated>2014-06-10T06:17: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lt;/p&gt;
&lt;hr /&gt;
&lt;div&gt;== 성리학 ==&lt;br /&gt;
=== 요약 ===&lt;br /&gt;
* 중국 송(宋) ·명(明)나라 때 학자들에 의하여 성립된 학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도학(道學)·이학(理學)·성명학(性命學) 또는 이것을 대성시킨 이의 이름을 따서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한다. 유학(儒學)은 중국 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그것이 성립되던 상대(上代)에는 종교나 철학 등으로 분리되지 않은 단순한 도덕사상이었으며, 그 대표적 인물에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있다. 공자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으려고 천하를 주유(周遊)하면서 [[인(仁)]]과 [[예(禮)]]를 설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고향에 돌아와 육경(六經:詩·書·禮·樂·易·春秋)을 제자에게 가르치며 도리(道理)를 후세에 전하였다. &lt;br /&gt;
&lt;br /&gt;
*선진시대(先秦時代)에 이르러 유학은 도덕 실천의 학으로서 크게 일어났으나, 시황제(始皇帝)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큰 시련을 겪은 다음 한·당대(漢唐代)에는 경전(經典)을 수집·정리하고, 그 자구(字句)에 대한 주(注)와 해석을 주로 하는 소위 [[훈고학(訓學)]]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송·명 시대에 이르러 유학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사회체제의 변화에 따라 노불(老佛) 사상을 가미하면서 이론적으로 심화되고 철학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즉, 북송(北宋)의 정호(程顥)는 천리(天理)를 논하였고 그 아우 정이(程)는 ‘[[성즉리(性卽理)]]’의 학설을 폈으며, 그 밖에 주돈이(周敦頤)·장재(張載)·소옹(邵雍) 등이 여러 학설을 편 것을 남송(南宋)의 주희(朱熹:朱子)가 집성(集成)·정리하여 철학의 체계를 세운 것이 성리학으로, 일명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와는 달리 육상산(陸象山)은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을 왕양명(王陽明)이 계승하여 육왕학(陸王學)을 정립, 이것 역시 성리학이라 하나 대개의 경우는 성리학이라 하면 [[주자학]]을 가리킨다. &lt;br /&gt;
&lt;br /&gt;
*성리학은 [[이]](理)·[[기]](氣)의 개념을 구사하면서 우주(宇宙)의 생성(生成)과 구조(構造), 인간 심성(心性)의 구조,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세(姿勢) 등에 관하여 깊이 사색함으로써 한·당의 훈고학이 다루지 못하였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내성적(內省的)·실천철학적인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유학사상을 수립하였다. 그 내용은 크게 나누어 태극설(太極說)·이기설(理氣說)·심성론(心性論)·성경론(誠敬論)으로 구별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참고 자료===&lt;br /&gt;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12540&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445 네이버 지식백과  성리학]&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 주리론 ==&lt;br /&gt;
&lt;br /&gt;
=== 정의 ===&lt;br /&gt;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에서 이(理)의 우위를 주장하는 이론.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주리」라는 말은 [[퇴계 이황]]이 기대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이후 대체로 [[영남학파]]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처음 이황이 이와 기가 서로 작용한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設)]을 통해 이의 우위와 능동성을 주장한 이후 영남학자들은 별다른 논란 없이 이를 받아들였는데, 기호학자들이 율곡 이이의「기발이승도설(氣發理乘途設)」에 따라 이의 무능동성과 기의 능동성을 주장하자, 이기론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황의 학설을 옹호하는 학파의 성격을 강화해갔다. 그것은 이황이 죽은 뒤 100년이 지난 17세기후반 이현일(李玄逸)에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이이의 성리설을 19조목으로 비판했다. &lt;br /&gt;
&lt;br /&gt;
*그의 아들 이재(李栽)는 한걸음 더 나아가 기의 작용을 기다리지 않고 이만으로도 이미 만물의 체용(體用)을 갖추고 있음을 주장했다. 이상정(李象靖)을 거쳐 유치명(柳致明)에 이르면 주리론은 한층 강화되어, 이가 우주의 주체이자 마음의 본체라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다. 기호학파의 일부 학자들도 주리론을 주장했는데, 이항로(李恒老)는 이의 우위를 인정하는 입장이었고, 기정진(奇正鎭)은 일반적인 주리론에서 더 나아가 기가 이에 포함된다는 극단적인 「유리론(唯理論)」으로까지 발전시켰다. 주리론은 주기론과 조선 후기 내내 학문적·정치적으로 대립, 발전했으며, 정치 및 사회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19027&amp;amp;cid=275&amp;amp;categoryId=3100 네이버 지식백과 : 주리론]&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 주기론 ==&lt;br /&gt;
=== 요약 ===&lt;br /&gt;
* 주기파(主氣派)는 ‘심즉기(心卽氣)’를 주장하는 [[이이]]가 기발설(氣發說)을 옹호한 조선시대 성리학의 2대 분파중의 하나이다. 경기·호남지방에서 성행하였으므로 [[기호학파(畿湖學派)]]라고도 한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 조선왕조 성리학계의 일찍이 주기론(主氣論)을 주창한 것은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이었다. 그후 얼마 동안은 그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이와 그를 이은 율곡학파가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공격하자 퇴계학파는 이기호발설을 옹호하며 율곡학파를 ‘주기파’라고 불렀다. 그뿐 아니라, 율곡학파도 이기호발설을 공격하며 자파의 이론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기(氣)를 중심으로 보는 입장이 선명해져서 마지막에는 주기설을 주장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하였다. 이리하여 이이는 최초로 ‘심시기(心是氣)’라는 말을 사용했다. 곧 이이는 ‘심(心)의 주된 작용은 허령불매(虛靈不昧)한 지각(知覺)에 있으며, 이 지각은 이가 아니라 기에 속하는 것’이라 하여 ‘심시기’라고 하였다. 그후에 송시열은 이이의 해석을 따라 ‘심의 허령은 분명히 기’라고 하였고, 한원진(韓元震)은 ‘성(性)과 심을 구별하여 성이 이에 속한다고 한 이상 심은 기에 속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임성주(任聖周)는 ‘심즉기’가 진리일 뿐 아니라 심과 성은 둘이면서도 하나이므로 성도 기라는 입장을 취하고 우주나 심의 본체가 오로지 기 하나 뿐이라고 주장하여 주기론의 정점을 이루었다.&lt;br /&gt;
&lt;br /&gt;
*주기론에 속하는 학자는 임성주(任靖周)·임노(任魯)·임헌회(任憲晦) 등이다.&lt;br /&gt;
&lt;br /&gt;
===참고 자료 ===&lt;br /&gt;
[http://ko.wikipedia.org/wiki/%EC%A3%BC%EA%B8%B0%EB%A1%A0 위기피디아 주기파]&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8%B0</id>
		<title>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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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lt;/p&gt;
&lt;hr /&gt;
&lt;div&gt;===내용===&lt;br /&gt;
*중국철학 용어로 모든 존재현상은 기의 취산(聚散), 즉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데 따라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생명 및 생명의 근원으로 보기도 한다. 원래는 호흡을 하는 숨[息], 공기가 움직이는 바람[風]을 뜻하는 가벼운 의미에서 시작하였으나 도가(道家)인 노자 ·장자가 우주의 생성 변화를 기의 현상이라고 하는 데서부터 여러 가지 어려운 뜻을 가지는 철학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한(漢)시대에는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기의 이론이 복잡하게 전개되면서 우주 자연의 운행 천문 지리, 그리고 양생(養生) 의학 및 길흉 화복과 관련되는 일상생활에까지 기를 적용하여 모든 것을 설명해 나갔다. 송(宋)대에 와서는 유가(儒家)에서 이(理)의 존재를 생각하게 됨으로써 그 이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기를 다루어 나간다. 모든 존재의 원인 또는 이치로서 형이상(形而上)의 보편자를 이라 하였고, 기는 형이하(形而下)의 구체적인 개체의 존재현상으로 생각하여 이기(理氣)철학의 중요개념으로 다루었다. &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0542&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445 네이버 지식백과 기(氣)]&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A3%BC%EC%9E%90%ED%95%99</id>
		<title>주자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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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Created page with &amp;quot;== 요약 == 중국, 남송의 주희(주자)에 의해서 집대성된 사상체계.  == 내용 ==  12세기에 주자에 의해 역설된 신(新)유교. 당(唐)대 불교...&amp;quot;&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중국, 남송의 주희(주자)에 의해서 집대성된 사상체계.&lt;br /&gt;
&lt;br /&gt;
== 내용 == &lt;br /&gt;
12세기에 주자에 의해 역설된 신(新)유교. 당(唐)대 불교의 화엄교의(華嚴敎義)의 빈틈없는 이론체계는 유교에 큰 자극을 주어, 이(理 : 본체)와 사(事 : 현상)의 상즉(相卽)으로써 세계를 설명하는 법계관(法界觀)에 자극받아 북송의 주염계, 장횡거, 정자 등은 태극, 기(氣), 음양 등의 전통적인 존재론에 기초하여 이기설(理氣說)적 세계관을 탐구하였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대성한 사람이 남송(南宋)의 주자(朱子)이다. &lt;br /&gt;
&lt;br /&gt;
주자는 세계를 이(理)와 기(氣)의 상즉(相卽)으로 보아, 기를 형이하(形而下)의 실재라고 보고 이것과 상즉인 이(理)는 만물의 생성을 관장하는 근본인(根本因) 또는 질서인(秩序因)으로서 객관화시켰다. 이러한 이(理)는 인간에게는 본연의 성(性)으로서 만인에게 구비되어 있는데, 인간은 기를 통하여 구체적 실재가 되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성(性)은 기질의 성(性)에 지나지 않는다. 기질의 성은 그것이 혼탁한 정도에 따라 개별적 차이가 생긴다. 사람은 내관적(內觀的)인 수양 즉, '거경'(居敬)을 통하여 기질의 혼탁을 극복하고 보편적인 본연의 성에 이를 수 있다. &lt;br /&gt;
&lt;br /&gt;
한편 이(理)는 만물(萬物)에 보편적으로 내재하여 관통함과 동시에 만물에 개별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사물에 내재해 있는 그 자체의 이(理)를 추구하여(窮理), 활연관통(豁然貫通)할 수 있게 되면 보편적인 이(理)를 우리 것으로 할 수 있다. 주자학은 이 거경과 궁리를 가지고 이(理)를 지향하며, 이 경우에 이 둘은 대립적, 병렬적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lt;br /&gt;
&lt;br /&gt;
그런데 기질의 성에 의한 인간의 개별적 차별을 전제로 하여 본연의 성을 완전하게 구현하는 상태, 즉 성인(이것이 위정자가 된다.)에 이르는 것을 지향하는 주자학은 사회의 봉건적 신분질서를 그대로 인정하고 수학(修學)에 의한 신분의 이행을 상정하는 것으로, 과거에 의한 단계적인 계층 관계에 매우 적합하기 때문에 체제 유지적 학문의 위치를 청(淸) 말까지 유지하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이 때문에 혁신사상은 반(反)주자학을 표방하는 것이 많았는데, 이들은 주자학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이기(理氣)의 세계관 구조를 부정하며 나타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오히려 이 세계관에 기초하여 일어난 사상의 변혁이었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는 주자학이 중국사상의 변화발전에 기여한 역할이 충분하다고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lt;br /&gt;
&lt;br /&gt;
== 참고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88700&amp;amp;cid=282&amp;amp;categoryId=282 주자학(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30959&amp;amp;cid=275&amp;amp;categoryId=1105 주자학(종교학대사전, 1998.8.20, 한국사전연구사)]&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B%AC%EC%A6%89%EB%A6%AC(%E5%BF%83%E5%8D%BD%E7%90%86)</id>
		<title>심즉리(心卽理)</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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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Created page with &amp;quot;== 요약 == * 중국 남송(南宋)의 육상산(陸象山)이 제창하여 명대(明代)의 왕양명(王陽明)이 계승한 학설.  == 내용 == * 주자(朱子)가 주...&amp;quot;&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 중국 남송(南宋)의 육상산(陸象山)이 제창하여 명대(明代)의 왕양명(王陽明)이 계승한 학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 주자(朱子)가 주장하는 ‘성즉리(性卽理)’(인간의 本性은 곧 天理로서 도덕적 善이라는 사상)에 대항하여 제창한 것으로 주자가 마음(心)에는 성(性)과 정(情)의 두 요소가 있으며 정을 억제하고 본성(本性)으로 돌아가라는 엄격한 수양법을 주장하는 데 대하여, 육상산은 정이란 말하자면 환영(幻影)과 같은 것이므로 본심(本心:本性)이 곧 천리(天理)임을 믿고 적극적으로 실천하자고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 이와 같은 사상은 곧, 엄격한 도덕주의에 대한 낙천적인 도덕론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왕양명은 이 ‘심즉리’의 입장을 더욱 진전시켜 천리, 즉 도덕적인 원리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면서, 성과 정을 포함한 마음 전체의 모습이 천리라고 주장하였다. 양명학(陽明學)에 입각한 ‘심즉리’는 인간의 정욕(情慾)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측면이 있으며, 주자학(朱子學) 비판에서는 육상산의 입장보다 한결 강렬하였다.&lt;br /&gt;
&lt;br /&gt;
== 참고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19792&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464 심즉리(두산백과)]&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B1%EC%A6%89%EB%A6%AC(%E6%80%A7%E5%8D%BD%E7%90%86)</id>
		<title>성즉리(性卽理)</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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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Created page with &amp;quot;== 요약 == * 중국 송대(宋代)의 철학자 정이천(程伊川)이 주창하고 주자(朱子)가 계승한 주자학의 근본 명제(命題).  == 내용 == * 혼탁...&amp;quot;&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 중국 송대(宋代)의 철학자 정이천(程伊川)이 주창하고 주자(朱子)가 계승한 주자학의 근본 명제(命題).&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 혼탁한 '기(氣)'로 더럽혀지지 않은 '성(性:본연의 성)'이야말로 천리(天理)라고 주장하는 설(說)이다. 성(性)과 정(情)을 분명하게 구별한 연후에, 그 성을 함양하기 위해 엄격한 도덕적·학문적 수양을 요구하는 주자학 특유의 엄격주의의 기본이 되었다. 후에 육상산(陸象山)·왕양명(王陽明) 등의 '심즉리(心卽理)'설(說)이 이 명제에 대한 대립이론으로 나타났다.&lt;br /&gt;
&lt;br /&gt;
== 참고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12753&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479 성즉리(두산백과)]&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B%88%EA%B3%A0%ED%95%99(%E8%A8%93%E5%AD%B8)</id>
		<title>훈고학(訓學)</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B%88%EA%B3%A0%ED%95%99(%E8%A8%93%E5%AD%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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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Created page with &amp;quot;==요약== * 언어(言語)를 연구함으로써 문장을 바르게 해석하고 고전(古典) 본래의 사상을 이해하려는 학문.  == 내용 == * 중국의 경서(...&amp;quot;&lt;/p&gt;
&lt;hr /&gt;
&lt;div&gt;==요약==&lt;br /&gt;
* 언어(言語)를 연구함으로써 문장을 바르게 해석하고 고전(古典) 본래의 사상을 이해하려는 학문.&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 중국의 경서(經書) 연구로부터 일어났으며, 좁은 의미로는 한(漢) ·당(唐) 및 청대(淸代)의 훈고학을 일컫는다. ‘訓’은 언어라는 뜻, ‘詁’는 옛 언어를 말한다. &lt;br /&gt;
* 어느 나라에서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전의 탐독은 어려워지게 마련이지만, 특히 중국에서는 진(秦)의 시황제(始皇帝)의 분서갱유(焚書坑儒:BC 213∼BC 212) 사건과, 한초(漢楚)의 흥망(BC 209∼BC 202), 그리고 진(秦)에서 한초(漢初)에 걸쳐 한자(漢字)의 일대 변혁이 있어 짧은 기간 동안 학문적 단절이 있었다. 그래서 한나라 이전의 서적을 읽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한나라 때는 유교가 가장 중요한 학문으로 자리를 잡아나갔고 중국의 학문은 유교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한나라(漢:BC 202∼AD 8)에 들어서 사라진 유교경전의 내용을 발굴하고 그 뜻을 밝히는 학문이 발달했는데 이를 훈고학이라고 한다. &lt;br /&gt;
* 《시경(詩經)》의 〈모전(毛傳)〉은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아(爾雅)》는 자전(字典)의 원시적인 것으로서 문자의 학문인 소학(小學)의 전문서이다. 후한(後漢:25∼220)에서는 폭넓은 연구가 이루어져 마융(馬融) ·정현(鄭玄) ·가규(賈逵) 등이 나타났고,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소학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이와 같이 한의 훈고학은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밝혀 원래의 의미를 밝혔는데 이런 훈고학의 흐름은 삼국 ·육조(六朝)를 거쳐 당나라까지 이어졌으며, 당나라의 공영달(孔穎達) 등이 칙명을 받아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집하므로(640) 큰 성과를 올렸다. 그 후 유심적(唯心的) 경향이 강한 송학(宋學)의 유행으로 훈고학은 일시 쇠퇴하였으나, 청나라(淸:1644∼1911)에 이르러는 서양과학의 영향을 받게 되어 실증적인 고증학(考證學)이 일어났으며, 한학 부흥을 목표로 내걸었다. 청의 훈고학 특징은 《설문해자》를 기초로 하는 소학을 존중한 점에 있으며, 대진(戴震) ·단옥재(段玉裁) ·왕염손(王念孫) ·왕인지(王引之) ·유월(兪樾) 등이 그 대표적인 학자이다.&lt;br /&gt;
&lt;br /&gt;
== 참고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56232&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464 훈고학(두산백과)]&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6%84%EC%84%9C%EA%B0%B1%EC%9C%A0(%E7%84%9A%E6%9B%B8%E5%9D%91%E5%84%92)</id>
		<title>분서갱유(焚書坑儒)</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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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09T13:56: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Created page with &amp;quot;== 요약 == 진나라의 승상(丞相) 이사(李斯)가 주장한 탄압책으로 실용서적을 제외한 모든 사상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를 생매장한 ...&amp;quot;&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진나라의 승상(丞相) 이사(李斯)가 주장한 탄압책으로 실용서적을 제외한 모든 사상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를 생매장한 일.&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 상앙(商鞅) ·한비자(韓非子) 등의 법가(法家)는 우민 정책과 법에 의한 획일적인 사회 통제를 주장하기 때문에 법치 노선을 비판할 수 있는 일체의 학문과 사상을 배격하였으며, 특히 선왕 도를 내세워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유가(儒家)를 배척하였다. 진(秦)나라는 상앙 변법 이래 법치 노선을 견지하였고 천하 통일 이후에도 이 정책은 변하지 않았다. 시황제(始皇帝) 34년(BC 213년) 전국의 유생들이 진나라에서 실시하는 중앙집권적 군현제를 반대하고 봉건제 부활을 주장함으로써 불행한 사태가 시작되었다. 시황제는 일단 그 의견을 조정의 공론에 붙였으나, 철저한 법가로 일관한 승상 이사(李斯)는 그에 반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차제에 사적인 학문으로 정치를 비판하는 일체의 행동을 본원적으로 봉쇄하기 위하여 진나라 이외의 모든 책은 불태우고, 《시》 《서》 백가어를 소장한 자는 30일 이내에 모두 관에 신고하여 불태우게 했다. 이를 어긴 자는 관노 성단(城旦)으로 삼으며, 감히 《시》 《서》를 논한 자는 기시(棄市)에 처하고, 옛것을 들먹이며 현실 정치를 비방한 자는 족형(族刑)에 처할 것, 단 의약 ·점복 ·농업 관계 서적은 제외할 것을 건의하자, 시황제는 이를 재가하였다.&lt;br /&gt;
&lt;br /&gt;
* 이듬해(BC 212년) 불로장생약(不老長生藥)을 구한다는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이라는 방사(方士)가 많은 재물을 사취(詐取)한 뒤 시황제의 부덕(不德)을 비난하며 도망을 치자, 시황제는 함양(咸陽)에 있는 유생을 체포하여 결국 460여 명이 구덩이에 매장되는 형을 받았다. 이것이 역사상 악명 높은 시황제의 분서갱유인데, 처형 규모도 크지 않고 실제 유생이라기보다는 사기성이 농후한 일부 방사를 겨냥한 것이라는 점을 들어 유가(儒家) 탄압을 과장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또 분서도 그 실제적인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진제국에서 유가가 환영받지 못한 것은 명백하며, 한제국이 BC 191년 새삼 ‘협서율(挾書律:금서 소지를 금하는 법)’을 폐지할 때까지 원칙상 유가의 고전이 자유롭게 학습될 수 없던 것도 사실이라면, 분서갱유가 유가를 일시나마 크게 위축시킨 것은 사실이다.&lt;br /&gt;
&lt;br /&gt;
== 참고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466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787 분서갱유(두산백과)]&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8%88(%E7%A6%AE)</id>
		<title>예(禮)</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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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Created page with &amp;quot;== 요약 == * 넓은 의미로는 풍속이나 습관으로 형성된 행위 준칙, 도덕 규범, 등 각종 예절.  == 내용 == * 사회의 질서를 위해 만들어진...&amp;quot;&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 넓은 의미로는 풍속이나 습관으로 형성된 행위 준칙, 도덕 규범, 등 각종 예절.&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 사회의 질서를 위해 만들어진 유교적 윤리규범을 지칭한다. 예(禮)는 본시 고대 사회에서 복을 받기 위해 귀신을 섬기는 일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예(禮)’자의 ‘示’는 ‘神’자에서, ‘豊’은 그릇에 곡식을 담은 모양이라고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풀이한다. 유가에서 예를 매우 중요시하여 《시경(詩經)》에는 ‘사람이면서 예가 없다니 어찌하여 빨리 죽지 않는가(人而無禮胡不遄死)라고 하였고 심지어 예로써 짐승과 구분 기준을 삼았다. 예의 종류로 오례(五禮)라 하여 길례 ·흉례 ·군례 ·빈례 ·가례(吉禮 ·凶禮 ·軍禮 ·賓禮 ·嘉禮)를, 구례(九禮)라 하여 관례(冠禮) ·혼례(婚禮) ·조례(朝禮) ·빙례(聘禮) ·상례(喪禮) ·제례(祭禮) ·빈주례(賓主禮) ·향음례(鄕飮禮) ·군여례(軍旅禮)를 말하여 한국에도 전래되었지만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일상 생활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례(四禮), 곧 관례, 혼례, 상례, 제례이다. 이 사례를 일컬어 가례(家禮)라 하며 주자의 예설을 모아 편한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조선시대의 모든 가례의 표준이 되었다.&lt;br /&gt;
&lt;br /&gt;
* 지금까지도 항간에서 많이 쓰이는 《사례편람(四禮便覽)》을 비롯하여 《사례찬설》 《사례촬요》 《사례훈몽》 등 예절에 관한 많은 책들이 한결같이 《주자가례》를 모범으로 삼았을 정도로 주자의 예설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런데 이런 예법은 주로 양반 계층에서 지켜졌으며 이른바 상민계급에게는 별로 통용되지 않았다. 중국은 양반계급에서조차 한국만큼 예가 철저하게 준용되지 않았다. 한국의 지나친 예의 준용은 당쟁이나 사화를 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하여 사회에 끼친 부정적 영향이 매우 컸다. 이는 공자가 강조한 예의 본질은 차츰 퇴색하고 예의 형식이 위세를 떨쳤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27525&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532 예(두산백과)]&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B8(%E4%BB%81)</id>
		<title>인(仁)</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B8(%E4%BB%81)"/>
				<updated>2014-06-09T13:50: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Created page with &amp;quot;== 요약 ==  공자(孔子)의 중심 사상. 인은 ‘어질다’는 뜻으로, 선(善)의 근원이 되고 행(行)의 기본이 되는 것을 이른다.  == 내용 ==  ...&amp;quot;&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lt;br /&gt;
공자(孔子)의 중심 사상. 인은 ‘어질다’는 뜻으로, 선(善)의 근원이 되고 행(行)의 기본이 되는 것을 이른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 중국사상이 인에 심원한 내용이 부여되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춘추시대 전후부터이다. 공자가 인을 자기의 사상의 핵심을 표현하는 개념으로서 정립한 이후, 공자학파에서는 &amp;lt;인간다움의 극치&amp;gt;를 표징하는 최고의 덕목이 되었다. 인의 내용에 대해서 공자 자신 여러 가지로 주장하는데, &amp;lt;사람을 사랑하는&amp;gt;것으로 일반화되었다. 유가는 사랑에 차등을 두는 것을 시인하기 때문에,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인 &amp;lt;효(孝)&amp;gt;의 실천이 인을 실현하는 제1단계라고 하며, 친근한 자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해서 그 사랑이 미치는 범위를 점차 확대해가면 종극적으로는 인류애에 도달한다고 생각하였다. &amp;lt;겸애(무차별의 사랑)&amp;gt;를 주장하는 묵자에게서 이 &amp;lt;인애(仁愛)&amp;gt;는 &amp;lt;별애(차별애)&amp;gt;라고 비판되었는데 가족애나 애국심이 반드시 인류애와 양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비판이다.&lt;br /&gt;
* 또한 공자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인식과 함께 &amp;lt;극기복례&amp;gt; 즉 자기 멋대로의 기를 극복하고, 사회적 규범인 예에 따르는 것이 인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성선설을 주장하는 맹자는 묵자의 겸애를 자기의 부모와 타인의 부모를 구별하지 않는 &amp;lt;금수의 사랑&amp;gt;이라고 공격하고, 공자의 인설을 발전시켰는데 인의 근거를 사람의 마음, 즉 인간의 불행을 묵시할 수 없다는 &amp;lt;사람에 인내하는 마음&amp;gt;에서 구했다. 공자는 개인의 존재방식에 따라서 인을 주장하는데, 맹자는 사회적 타당성을 의미하는 &amp;lt;의(義)&amp;gt;에 인과 대등한 가치를 주고, &amp;lt;인의의 도&amp;gt;를 주장하고, &amp;lt;사람에게 인내하는 마음&amp;gt;에 의거한 &amp;lt;사람에게 인내하는 정치&amp;gt;의 실현을 지향하는 것이 참된 &amp;lt;왕자&amp;gt;의 임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 &amp;lt;인정(仁政)&amp;gt;의 주장은 &amp;lt;인간다움&amp;gt;의 표현인 인은 개인의 노력, 존재방식만으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 등의 사회적 힘에 뒷받침되어서 보다 고도로 달성된다는 인식을 배후에 지니고 있다.&lt;br /&gt;
* 그후 송대가 되어서 인설은 독자적으로 철학적 전개를 하고, 주돈이는 우주론적으로 인을 해석해서 인류 최고규범이라고 하였으며, 정호(명도)는 인을 사람 중에 있는 &amp;lt;천의 원리&amp;gt;라고 보고, 이 &amp;lt;원&amp;gt;의 유행을 인의 본질이라고 하였다. 정이는 인을 &amp;lt;이(理)&amp;gt;라고 하며, &amp;lt;공(公)&amp;gt;이라고 주장하고, 정이의 설을 계승한 주희(주자)가 &amp;lt;인은 사랑의 이치, 마음의 덕이다&amp;gt;라고 정의한 것은 사랑을 작용으로 보고, 인을 본체로 보는 입장에 서있기 때문이었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30699&amp;amp;cid=275&amp;amp;categoryId=1105 인(종교학대사전, 1998.8.20, 한국사전연구사)]&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6828&amp;amp;cid=1621&amp;amp;categoryId=1621 인(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A7%B9%EC%9E%90(%E5%AD%9F%E5%AD%90)</id>
		<title>맹자(孟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A7%B9%EC%9E%90(%E5%AD%9F%E5%AD%90)"/>
				<updated>2014-06-09T13:42:5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Created page with &amp;quot;== 요약 == * 중국 전국시대의 유교 사상가. 전국시대에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이다. 공자의 유교사상을 공자의 손자인...&amp;quot;&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 중국 전국시대의 유교 사상가. 전국시대에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이다. 공자의 유교사상을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에게서 배웠다. 도덕정치인 왕도(王道)를 주장하였으나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어 제후에게 채택되지 않았다. 그래서 고향에 은거하여 제자교육에 전념하였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 기원전 372년 지금의 산둥성[山東省] 쩌우청시[鄒城市]에 있었던 추현(鄒縣)에서 출생하였다. 이름은 맹가(孟軻)이고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라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맹자가 태어난 나라는 춘추전국시대에 존립했던 추(鄒)라는 작은 소국(小國)이었다. 추나라는 이후 노(魯)나라에 합병되었는 설도 있고 초(楚)나라에 합병되었다는 설 두가지가 존재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맹자의 어린시절과 성장기에 관해서는 신빙성있는 자료가 전해지는 바가 없으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맹자가 학문을 익힌 것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후대 문하생에게서 유가사상을 배웠다고 전해지며 시(詩)와 서(書)에 능했다고 전한다. 맹자의 어머니 장(仉)씨는 현모(賢母)로 알려져 있으며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유명한 고사이다. &lt;br /&gt;
&lt;br /&gt;
* 맹자가 살았던 시기는 7개의 제후국이 패권을 두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던 전국시대였다. 전국시대는 합종(合從)과 연횡(連衡)으로 대표되는 외교적 책략으로 천하통일의 꿈을 이루려는 인재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제후는 유능한 인재들을 찾아 패도의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으며 맹자도 전국시대에는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으로서 BC 320년경부터 약 15년 동안 각국을 유세객으로 돌아다니며 제후들을 만났다. 당시 제후가 찾은 이상적인 인물은 나라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한 정책이나 뛰어난 외교적 책모(策謀)를 갖춘 인물이였으나, 맹자가 내세우는 것은 도덕정치인 왕도(王道)였으며, 따라서 이는 전국시대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치게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었다. 《맹자》에는 맹자의 주유천하 한편이 소개되고 있는데 53세에 위(魏)나라 양혜왕(梁惠王)을 만나 문답을 통해 자신의 왕도정치 소신을 펼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양혜왕이 죽고 아들 양양왕의 군주로써 인물됨이 부족하자 위나라를 떠나 제(齊)나라로 갔으며 제선왕(齊宣王)을 만나 인정으로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인물인지 살피는 장면이 묘사된다. 맹자는 결국 왕도정치라는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낙향하여 제자교육에 전념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의 생에 대한 기록이 전하는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맹자의 사상을 담고있는《맹자》 7편은 맹자의 말을 후세의 제자들이 모아 만든 편찬물이며, 내용은 맹자의 사상 뿐만아니라 당시 제후와 재상을 만나 문답을 나눈 맹자의 행적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한때 《맹자》는 주목받지 못하는 서(書)였고 금서(禁書)로 취급되기도 하였다. 주자학(朱子學) 이후로 《맹자》는 《논어》, 《대학》, 《중용》과 더불어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유교의 주요한 경전이 되었다. 맹자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이며, 또 전국시대의 양상을 전하는 흥미있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문장은 변론조이며, 예부터 유가의 명문으로 여겨지며 조선시대 사유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lt;br /&gt;
 &lt;br /&gt;
*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충만한 인간상을 주창하였는데 이는 서두르거나 조급하지 말고 일상적으로 인간 내면에 의(義)를 배양하고 기르는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本性)은 본디 선(善)한 것이라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다. 사람은 본디 4가지의 본성적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첫번째가 남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 두번째가 자신의 옳지 못한 행실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한 행실을 미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세번째가 겸손하여 타인에게 양보하는 마음인 사양지심(辭讓之心), 네번째가 잘잘못을 분별할 줄 아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이 4가지의 마음가짐이 사단(四端)이며 측은지심은 인(仁)의 단이고, 수오지심은 의(義)의 단이며, 사양지심은 예(禮)의 단이며, 시비지심은 지(智)의 단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단을 가지고 있으며 신체의 두팔과 다리와 같기 때문에 사단을 실천하지 못함은 자신의 신체를 해치는 것과 같다고 했다.&lt;br /&gt;
&lt;br /&gt;
== 참고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92262&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403 맹자(두산백과)]&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3%B5%EC%9E%90(%E5%AD%94%E5%AD%90)</id>
		<title>공자(孔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3%B5%EC%9E%90(%E5%AD%94%E5%AD%90)"/>
				<updated>2014-06-09T13:37: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중국 고대의 사상가, 유교의 시조. 최고의 덕을 인이라고 보았다. 인(仁)에 대한 공자의 가장 대표적인 정의는 ‘극기복례(克己復禮)’ 곧,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에 따르는 삶이 곧 인(仁)”이라는 것이다. 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孝悌)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仁)의 출발점으로 삼았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 제자백가 중 유가(儒家)의 시조.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노(魯)나라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그곳에서 자리잡고 정치를 담당하였지만, 실권자와 충돌한 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제후들에게 자기의 사상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뜻을 얻지 못하자 만년에는 노나라에서 제자 교육과 고전 편찬에 종사하였다.&lt;br /&gt;
&lt;br /&gt;
* 공자가 중국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공헌은 최초의 민간사상가로서 주대(周代)의 관학(官學)으로부터 학문을 해방하고 처음으로 사학(私學)을 창시하여 중국사상사의 기초를 이룬 점과 동시에 그후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사상이 된 유교의 골격을 쌓은 점에 있다. 공자가 태어난 춘추 말기는 정권이 밑으로 옮겨가 농민, 수공업자, 상인 등의 신흥계급이 출현하여 힘을 내세우고 씨족적 혈연사회와 그 예제(禮制)가 붕괴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씨족귀족이 그 지위를 지키기가 곤란하였다. 공자는 이러한 새로운 요소를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예(禮)의 질서, 씨족귀족 중심의 질서의 붕괴를 막으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 그 해답은 '덕'에 기초한 정치, '인'에 바탕을 둔 위정자의 자기개조였다. 이러한 변동기에 종래의 지배자인 군주가 법률과 형벌만으로 백성을 다스리려고 한다면, 백성은 그것을 빠져나가 부끄러움(恥)을 모르게 되고 점점 종래의 질서를 혼란시키기 때문에 군주는 '덕'을 바탕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이끌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덕이란 '인'으로서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이겨 예(禮)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명한다. 이 '인'의 수양법으로 주목되는 것은 예(禮)가 '극기'의 규범이 되고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고, 움직이지 말라'고 하는 점이다.&lt;br /&gt;
&lt;br /&gt;
* '예'(禮)는 주대의 씨족귀족 지배하의 혈연적 신분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제도였지만, 그것이 형식화되고 붕괴된 춘추 말기에 공자는 '예'(禮)를 '인'(仁)과 관련시켜 규범화하고 군주에게 내재화시켜 예를 국가사회 질서의 계속적인 기본원리로 존속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인'은 '예'에 의해 깊이 규정되어 그 밑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인'의 성격은 '군자소인(君子小人)론'에서 보다 명확히 밝혀졌다. 즉 공자는 '인'을 체득하여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노동하지 않는 '군자'뿐이고, 직접 생산에 종사하고 그것에 관심을 가지는 '소인'은 '인'과 무관하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인'이 '예'의 질서를 규범으로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논리였다.&lt;br /&gt;
&lt;br /&gt;
* 그렇다고 공자가 농민과 수공업자들의 '소인'계급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공자의 제자 대부분은 바로 이 계급 출신자로서, 공자는 이들을 열심히 가르쳤지만, 그는 생산기술의 습득은 '소인'의 일이라 하여 거부하고 과거의 지식 및 주대의 '시서예악'(詩書禮樂)에 대한 학습만을 강조하였다.&lt;br /&gt;
&lt;br /&gt;
* 공자의 입장은 결국 씨족귀족 계급과 농ㆍ공ㆍ상 신흥계급의 대립이 격화되는 시대에 있어서, 전자에게는 인에 의한 자기개조를 요구하고 후자에게서는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면서 씨족귀족의 입장에서 모순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개량주의였다. '애'(愛)라는 보편적인 덕목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지니면서 '예'(禮)에 규정되어 '군자'의 속성으로 여겨지는 '인'의 사상적 모순은 이러한 입장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논어』 20편은 제자들이 편찬한 공자의 언행록이다.&lt;br /&gt;
&lt;br /&gt;
== 참고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89002&amp;amp;cid=1010&amp;amp;categoryId=1703 공자(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3613&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8 공자 [孔子] (두산백과)]&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9C%EB%8B%B9_KU</id>
		<title>서당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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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 향촌사회에 생활근거를 둔 사족(士族)과 백성이 주체가 되어 면·동·이를 기본단위로 설립한 초중등 단계의 사설교육기관.&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논자에 따라서는 고구려시대의 경당(扃堂)과 같은 학교제도를 서당교육의 출발로 이해하기도 한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을 세워 관학교육(官學敎育)의 출발로 삼는 한편, 민간교육기관으로서 [[경당]]을 두었다. 중국의 사료(史料)인 ≪신당서 新唐書≫와 ≪구당서 舊唐書≫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구려 사람들은 책을 사랑하여 벼슬아치 집에서 평민의 집에 이르기까지 저자거리에 큰 집을 지어 이를 경당이라 부르고, 혼인하기 전의 자제들이 여기에서 밤낮으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경당에서는 [[문무겸비]]의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이는 신라의 [[화랑도]]와 마찬가지로 교육기관인 동시에 청소년들의 결사조직체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지닌 맹점은 경당의 사회적인 역할이 과연 어느 정도로 서당의 사회적 역할과 일치하였는가를 명확히 해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앞으로 경당에 대한 정밀한 성격규명이 있은 다음이라야 서당과의 상호 동질성과 이질성이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신라에서도 [[설총(薛聰)]]이 [[경서(經書)]]를 이두로 풀어서 제생(諸生：여러 학생)을 가르쳤다고 하였으니, 그가 가르친 곳이 사숙일 가능성이 짙고, 이 또한 서당교육의 연원의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는 경관(經館)과 서사(書社)라는 서당 형태의 교육기관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lt;br /&gt;
&lt;br /&gt;
*서당의 사회적 의미가 증대한 것은 16세기 [[사림파]]의 등장과 시기를 같이 하는 것으로, 중종대 사림파의 [[향약]]보급운동과도 일련의 연관성을 지닌다. 16세기 서당 설립의 주도 세력은 대부분 당시 향촌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던 명문사족 출신인 대토지 소유자였다. 예를 들면, 안동의 의성 김씨(義城金氏) 가문, 고평(高坪)의 청주 정씨(淸州鄭氏) 가문, 의성의 함양 박씨(咸陽朴氏) 가문 등이 그 전형적인 사례들이다. 당시 서당 설립의 주도 세력의 신분은 입사(入仕：벼슬한 뒤에 처음으로 그 벼슬자리에 나감) 이전의 생원·진사들이 주류였고, 설립의 명분은 대체로 반상(班常：양반과 상사람) 구별을 비롯한 유학적 질서율을 향촌사회에 정착시키려고 하는 데서 찾고 있다. 서당의 교육내용은 고급 성리서(性理書)를 위주로 하거나 과거응시를 목적으로 하는, 이른바 고제적 서당(高弟的書堂)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한편 서당의 설립은 관(官)의 지원을 최대한 배제하고, 경내 백성들의 공동체적 일체감 속에서 민간자산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양란 후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사족들은 약화된 재지기반을 강화하는 방안으로 서당을 중심으로 관권 및 외부 사림과의 결합을 시도하였다.&lt;br /&gt;
&lt;br /&gt;
*오늘날 서당은 크게 세가지 유형으로 나뉘는데, 대부분은 서당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초보적인 수준부터 중·고급 수준까지 한자 능력 습득을 목적으로 하는 사설학원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이 곳에서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예와 예절교육을 담당하기도 하며, 방학을 이용한 특별강좌를 운영하기도 한다. 두 번째로는 전통적인 서당 교육방법을 고수하며, 한자로 된 고전을 능숙하게 해독해낼 수 있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서당이 극소수 존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인터넷의 빠른 보급과 확산에 힘입어 사이버 서당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로 기존의 서당이나 한학연수원에서 운영하는 것으로서, 한자인구의 저변 확대라는 점에서 향후 역할이 주목된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4121&amp;amp;cid=404&amp;amp;categoryId=404 서당(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201310212 이지형 ]]&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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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향약</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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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 조선 시대에 권선징악(勸善懲惡)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들어 실시했던 향촌의 자치규약&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 조선시대의 향약은 11세기 중국 송나라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모방한 것으로 조선 중기 이후 지방의 양반·토호·유림 등의 상류계급에 의하여 전개되어 영·정조 때에는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향약의 핵심적 내용은 그 4대 강령에 나타나 있는데, 첫째 주민들의 선행(善行)을 장려하고 생업(生業)에 충실하게 하며[덕업상권], 둘째 서로 간에 잘못이 있으면 이를 지적하여 고치도록 하며[과실상규], 예의범절이나 미풍양속을 잘 지키고 이에 따라 허뭇한 인관관계를 가지며[예속상교], 병환이나 재난 등의 어려운 처지에 놓일 때는 서로가 돕도록 한다[환난상률]는 것이다. 향약은 뒷날 그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상류계급이 서민계급을 지배·착취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기도 하였으나 그 내용에 담겨져 있는 상부상조의 협동정신과 사회복지 사상은 높이 평가된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60074&amp;amp;cid=492&amp;amp;categoryId=492 향약(이해하기 쉽게 쓴 행정학용어사전, 2010.11.23, 새정보미디어)]&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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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경서(經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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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 유학(儒學)의 근본이 되는 문헌.&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 경(經)이라고도 한다. 경(經)은 직물의 주축이 되는 날실을 가리키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성현의 가르침을 기록한 것을 ‘경’ 또는 ‘경서’라고 하게 되었다. 맹자(孟子)는 《시(詩)》 《서(書)》 《춘추(春秋)》를 경이라 하였고, 순자(荀子)는 여기에 《예(禮)》와 《악(樂)》을 추가하였으며, 장자(莊子)는 다시 《역(易)》을 추가하여 그 하나하나에 ‘경(經)’을 붙여 《시경(詩經)》 《역경(易經)》 등이라 하게 되었다. 이들 육서(六書)를 ‘육경(六經)’이라 하며, 한(漢)나라 때는 ‘육예(六藝)’라고도 하였다. &lt;br /&gt;
&lt;br /&gt;
*시대가 흐름에 따라 경서의 수가 증가하여 남송(南宋) 시대에 이르러서는 《역》 《서》 《시》와 《주례(周禮)》 《의례(儀禮)》 《예기(禮記)》의 ‘삼례(三禮)’에 《춘추》의 《좌씨전(左氏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의 3전(傳) 및 《논어(論語)》 《효경(孝經)》 《맹자(孟子)》 《이아(爾雅)》를 추가하여 ‘13경’이 되었으나, 정호(程顥) ·정이(程頤)의 이정자(二程子)와 주자(朱子)는 《예기(禮記)》 속의《대학(大學)》 《중용(中庸)》 2편과 《논어》 및 《맹자》를 합하여 ‘사서(四書)’라 하고, 《역경》 《서경》 《시경》 《예기》 《춘추》의 ‘오경(五經)’과 합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이라 하고 중히 여겼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0058&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465 경서(두산백과)]&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B%90%ED%9A%A8(%E5%85%83%E6%9B%89)</id>
		<title>원효(元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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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617(진평왕 39)∼686(신문왕 6). 신라시대의 승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성은 설씨(薛氏), 원효는 법명(法名), 아명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 경상북도 압량(押梁: 지금의 慶山市) 출신. 잉피공(仍皮公)의 손자이며, 내마(奈麻) 담날(談捺)의 아들이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0527&amp;amp;cid=1620&amp;amp;categoryId=1620 원효(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 ]]&lt;br /&gt;
&lt;br /&gt;
[[Digerati Wiki]]&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A4%EC%B4%9D(%E8%96%9B%E8%81%B0)</id>
		<title>설총(薛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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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655(태종무열왕 2)∼? 신라 중대의 대학자.&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 자는 총지(聰智). 증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赤大公), 할아버지는 나마(奈麻) 담날(談捺)이고, 아버지는 [[원효(元曉)]],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다. 육두품 출신인 듯하며,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증보문헌비고≫에는 경주설씨(慶州薛氏)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출생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원효불기 元曉不羈＞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태종무열왕 때, 즉 654∼660년 사이에 출생한 듯하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했으며, 우리말로 구경(九經)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10현(新羅十賢)의 한 사람이며, 또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더불어 신라3문장(新羅三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삼국사기≫에 “우리말(方言)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훈도하였다(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라 했고, ≪삼국유사≫에는 “우리말(方音)로 화이(華夷 : 중국 민족과 그 주변의 오랑캐)의 방속(方俗)과 물건의 이름을 이해하고 육경(六經)과 문학을 훈해(訓解)했으니, 지금도 우리 나라［海東］의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이가 전수(傳受)해 끊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lt;br /&gt;
&lt;br /&gt;
* 이 두 기록을 근거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설총이두창제설(薛聰吏讀創製說)이 비롯되었으나, 이는 틀린 것이다. 여러 기록에서 ‘吏讀·吏道·吏吐·吏套·吏頭·吏札’ 따위로 불리는 이 방법은 향가 표기법인 [[향찰(鄕札)]]을 가리키는 것인데, 우리말로 육경을 읽는 데 능통했다고 해서 이것을 이두 또는 향찰의 고안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향가 표기식 방법, 즉 향찰은 설총 이전부터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568년(진흥왕 29)에 북한산 비봉(碑峯)에 세운 진흥왕순수비의 비문에도 이미 나타나 있고, 또 설총 이전에 향찰로 표기된 향가 작품으로는 진평왕 때의 ＜서동요 薯童謠＞·＜혜성가 彗星歌＞와 선덕여왕 때의 ＜풍요 風謠＞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설총이 향찰(이두)을 창안한 것이 아니라 향찰을 집대성,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설총은 향찰의 권위자로 봄이 타당하다. 설총은 육경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함으로써 한문을 국어화하고, 유학 또는 한학의 연구를 쉽게 그리고 빨리 발전시키는 데 공이 컸다. 또 관직에 나아가 문필에 관계되는 직, 즉 한림과 같은 직에 있었을 것이며, 신문왕 때 국학(國學)을 설립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719년(성덕왕 18)에는 나마의 관등으로서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를 저술하였다. 이 밖에도 많은 작품이 있었을 것이나 ≪삼국사기≫를 엮을 때 이미 “글을 잘 지었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지금도 남쪽 지방에 더러 설총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으나 글자가 떨어져 나가 읽을 수가 없으니 끝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다.”라고 하면서 완전하게 남은 게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lt;br /&gt;
&lt;br /&gt;
*한편, 오늘날 설총의 문적(文蹟)으로는 우화적 단편 산문인 ＜화왕계 花王戒＞가 당시 신문왕을 풍간(諷諫)했다는 일화로서 ≪삼국사기≫ 설총열전에 실려 전한다. 이 ＜화왕계＞는 ＜풍왕서 諷王書＞라는 이름으로 ≪동문선≫ 권53에도 수록되어 있다. 죽은 뒤에도 계속 숭앙되어 고려시대인 1022년(현종 13) 1월에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문묘(文廟) 동무(東廡)에 신라2현이라 해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5353&amp;amp;cid=1590&amp;amp;categoryId=1590 설총(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3%A8%ED%92%88%EC%A0%9C(%E9%AA%A8%E5%93%81%E5%88%B6)</id>
		<title>골품제(骨品制)</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3%A8%ED%92%88%EC%A0%9C(%E9%AA%A8%E5%93%81%E5%88%B6)"/>
				<updated>2014-06-09T12:52:5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Created page with &amp;quot;== 요약 == *신라시대의 신분제도  == 내용 == * 이 제도는 골품(骨品), 즉 개인의 혈통(血統)의 높고 낮음에 따라 정치적인 출세는 물론,...&amp;quot;&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신라시대의 신분제도&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 이 제도는 골품(骨品), 즉 개인의 혈통(血統)의 높고 낮음에 따라 정치적인 출세는 물론, 혼인, 가옥의 규모, 의복의 빛깔, 우마차(牛馬車)의 장식에 이르기까지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이 가해졌다. 세습적인 성격이나 제도 자체의 엄격성으로 보아, 흔히 인도(印度)의 카스트제도(Caste制度)와 비교되고 있다.&lt;br /&gt;
* 신라의 국가형성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해 6세기 초는 이미 법제화되었으며, 신라의 삼국통일을 거쳐 멸망에 이를 때까지 약 400년 동안 거의 변함없이 신라사회를 규제하는 중요한 근본으로서 기능, 작용하였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23433&amp;amp;cid=1590&amp;amp;categoryId=1590 골품제도(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 ]]&lt;br /&gt;
&lt;br /&gt;
[[Digerati Wiki]]&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9%94%EB%9E%91%EB%8F%84</id>
		<title>화랑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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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09T12:50: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Created page with &amp;quot;==요약== *신라시대 화랑을 우두머리로 한 청소년 수련단체.  ==내용== *화랑이라는 말은 ‘꽃처럼 아름다운 남성’이라는 뜻인데, 혹...&amp;quot;&lt;/p&gt;
&lt;hr /&gt;
&lt;div&gt;==요약==&lt;br /&gt;
*신라시대 화랑을 우두머리로 한 청소년 수련단체.&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화랑이라는 말은 ‘꽃처럼 아름다운 남성’이라는 뜻인데, 혹은 화판(花判)·선랑(仙郎)·국선(國仙)·풍월주(風月主)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단체정신이 매우 강한 청소년 집단으로서 교육적·군사적·사교단체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lt;br /&gt;
*무엇보다도 많은 인재를 배출해 신라의 삼국통일 뿐만 아니라, [[골품제(骨品制)]] 사에서의 여러 계층간의 긴장과 갈등을 조절, 완화하는 데도 이바지하였다.&lt;br /&gt;
&lt;br /&gt;
==참고 자료==&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28858&amp;amp;cid=1590&amp;amp;categoryId=1590 화랑도(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AC%B8%EB%AC%B4%EA%B2%B8%EB%B9%84</id>
		<title>문무겸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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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09T12:47: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Created page with &amp;quot;== 요약 == 글 솜씨와 무예를 두루 갖춤.  == 내용 == 문예와 무예를 두루 갖춘 인물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문무겸전(文武兼全)이라고...&amp;quot;&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글 솜씨와 무예를 두루 갖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문예와 무예를 두루 갖춘 인물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문무겸전(文武兼全)이라고도 합니다.&lt;br /&gt;
&lt;br /&gt;
== 참고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70369&amp;amp;cid=432&amp;amp;categoryId=4148 문무겸비(고사성어랑 일촌 맺기, 2010.9.15, 서해문집)]&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2%BD%EB%8B%B9</id>
		<title>경당</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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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09T12:44: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Created page with &amp;quot;== 요약 == 삼국시대 고구려의 민간 교육기관.  == 내용 == *《구당서(舊唐書)》 [열전(列傳)-고려(高麗)]에 따르면, 고구려 사람들은 &amp;quot;책...&amp;quot;&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삼국시대 고구려의 민간 교육기관.&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구당서(舊唐書)》 [열전(列傳)-고려(高麗)]에 따르면, 고구려 사람들은 &amp;quot;책을 좋아하여 문지기·말먹이의 집에 이르기까지 거리마다 큰집을 지어 경당이라 부르며 자제가 결혼하기 전에는 밤낮으로 이곳에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힌다&amp;quot;고 하였으며, 《신당서(新唐書)》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lt;br /&gt;
&lt;br /&gt;
*이로써 경당이 평민층의 미혼 남자들에게 글과 활쏘기를 가르치는 민간교육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경당이 언제 처음 설립되었는지는 기록이 전혀 없어 알 수 없는데, 촌락사회 이래의 미성년자 집단교육 전통을 이은 것일 수 있으며,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에 설치한 태학(太學)이 중앙의 상류층 자제들을 가르치는 국가교육기관으로서 자리잡은 뒤에 널리 유행했을 개연성이 있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5984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723 경당(두산백과)]&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9C%EC%9B%90_KU</id>
		<title>서원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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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09T12:28: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lt;/p&gt;
&lt;hr /&gt;
&lt;div&gt;==요약==&lt;br /&gt;
*조선 중기 이후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운 사설기관(私設機關).&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북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경북유형문화재 제51호. 조선시대. 조선 선조 때 문신이었던 한강 정구가 1583년에 회연초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1627년 정구를 주향으로 건립하였으며 1690년 사액되었다.&lt;br /&gt;
&lt;br /&gt;
*원의 명칭은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궁중에 있던 서적(書籍)의 편수처(編修處)이던 여정전서원(麗正殿書院)·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에서 유래한 것인데, 송나라 때 지방의 사숙(私塾)에 조정(朝廷)에서 서원이라는 이름을 준 데서 학교의 명칭이 되어 수양(睢陽)·석고(石鼓)·악록(嶽麓)·백록동(白鹿洞) 등의 4대 서원이 생겼으며, 특히 주자(朱子)가 강론(講論)을 하던 백록동서원이 유명하였다.&lt;br /&gt;
&lt;br /&gt;
*이후 서원은 선현(先賢)과 향현(鄕賢)을 제향(祭享)하는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를 아울러 갖추게 되었는데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서재(書齋)·서당(書堂)·정사(精舍)·선현사(先賢祠)·향현사(鄕賢祠) 등과 문익점(文益漸)을 제사하는 도천서원(道川書院)이 1401년(태종 1) 단성(丹城)에, 김굉필(金宏弼)을 제사하는 천곡서원(川谷書院)이 1528년(중종 23) 성주(星州)에, 김구(金坵)를 제사하는 도동서원(道洞書院)이 1534년(중종 29) 부안(扶安)에 각각 세워졌으나 모두 사(祠)와 재(齋)의 기능을 겸비한 서원은 없었는데, 1542년(중종 37) 경상도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世鵬)이 관내 순흥(順興) 백운동(白雲洞)에 고려 유교(儒敎)의 중흥자(中興者) 안향(安珦)의 구가(舊家)가 있음을 알고 거기에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지내고 경적(經籍)을 구입하여 유생들을 모아 가르치니 이것이 사와 재를 겸비한 최초의 서원으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lt;br /&gt;
&lt;br /&gt;
*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와서 이를 보고 중국 백록동 고사(古事)처럼 조정에서 사액(賜額)과 전토(田土)를 주도록 건의함에 따라 명종은 1550년(명종 5) 이를 권장하는 뜻에서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친필로 쓴 액(額: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학전(學田)·노비(奴婢)를 급부(給付)하면서 이들 토지와 노비에 대한 면세(免稅)·면역(免役)의 특권을 내려 이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서원의 설치는 전국에 미쳐 명종 이전에 설립된 것이 29개, 선조 때는 124개에 이르렀고, 당쟁이 극심했던 숙종 때 설치한 것만 300여 개소에 이르러 1도에 80~90개의 서원이 세워졌으며, 국가 공인(公認)의 절차인 사액(賜額)의 청원에 따라 사액을 내린 서원도 늘어나 숙종 때만 해도 130여 개소에 이르렀다.&lt;br /&gt;
&lt;br /&gt;
*기의 서원은 인재를 키우고 선현·향현을 제사지내며 유교적 향촌 질서를 유지, 시정(時政)을 비판하는 사림(士林)의 공론(公論)을 형성하는 구실을 하는 등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였으나 증설되어감에 따라 혈연(血緣)·지연(地緣)관계나 학벌(學閥)·사제(師弟)·당파(黨派) 관계 등과 연결되어 지방 양반층의 이익집단화(利益集團化)하는 경향을 띠게 되고 사액서원의 경우 부속된 토지는 면세되고, 노비는 면역되기 때문에 양민의 투탁(投託)을 유인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 때문에 서원은 양민이 원노(院奴)가 되어 군역(軍役)을 기피하는 곳이 되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군정(軍丁)의 부족을 초래하였고 불량유생의 협잡소굴이 되는가 하면 서원세력을 배경으로 수령(守令)을 좌우하는 등 작폐도 많았다. 또한 면세의 특권을 남용한 서원전(書院田)의 증가로 국고 수입을 감퇴시켰으며, 유생은 관학(官學)인 향교(鄕校)를 외면, 서원에 들어가 붕당(朋黨)에 가담하여 당쟁에 빠져 향교의 쇠퇴를 가속시켰다.&lt;br /&gt;
&lt;br /&gt;
*원의 폐단에 대한 논란은 인조(仁祖) 이후 꾸준히 있었으나 특권 계급의 복잡한 이해 관계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하고 1657년(효종 8) 서필원(徐必遠)은 서원의 폐단을 논하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효종·숙종 때는 사액(賜額)에 대한 통제를 가하고 누설자(累設者)를 처벌하는 규정까지 두었으나 잦은 정권 교체로 오히려 증설되었다. 1738년(영조 14) 안동 김상헌(金尙憲)의 원향(院享)을 철폐한 것을 시발로 대대적인 서원 정비에 들어가 200여 개소를 철폐하였으나 그래도 700여 개소나 남아 있었으며 이 중 송시열(宋時烈)의 원향이 36개소나 되어 가장 많았고, 유명한 것으로는 도산서원(陶山書院)·송악서원(松嶽書院)·화양서원(華陽書院)·만동묘(萬東廟) 등이 있었다. 1864년(고종 1)에 집권한 대원군(大院君)은 서원에 대한 일체의 특권을 철폐하여, 서원의 설치를 엄금하고 그 이듬해 5월에는 대표적인 서원인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폐쇄한 이후 적극적으로 서원의 정비를 단행하여, 사표(師表)가 될 만한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lt;br /&gt;
&lt;br /&gt;
==참고자료==&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11344&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732 서원(두산백과)]&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B1%EA%B7%A0%EA%B4%80_KU</id>
		<title>성균관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B1%EA%B7%A0%EA%B4%80_KU"/>
				<updated>2014-06-09T12:26: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lt;/p&gt;
&lt;hr /&gt;
&lt;div&gt;[[File : tjdrbsrhks.jpg]]&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성균관(成均館)은 고려 말부터 이어진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이다. 한국의 옛 대학(大學)으로 그 명칭은 고려 충렬왕 때 국학(國學)을 성균관으로 개명한 데서 비롯하였다. 공민왕 때는 국자감(國子監)이라 부르다가 곧 성균관으로 복귀되었는데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기까지 조선 일대를 걸쳐 한국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ko.wikipedia.org/wiki/%EC%84%B1%EA%B7%A0%EA%B4%80 위키피디아 성균관]&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4%80%ED%95%99_KU</id>
		<title>관학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4%80%ED%95%99_KU"/>
				<updated>2014-06-09T12:24: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 조선시대의 교육 제도&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조선시대 성균관(成均館)과 사부학당(四部學堂, 四學이라고도 함)을 합쳐 부른 칭호.&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24153&amp;amp;cid=1592&amp;amp;categoryId=1592 네이버 지식백과 관학(館學)]&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C%A8%EA%B3%A1%EC%9D%B4%EC%9D%B4_KU</id>
		<title>율곡이이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C%A8%EA%B3%A1%EC%9D%B4%EC%9D%B4_KU"/>
				<updated>2014-06-09T12:18: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lt;/p&gt;
&lt;hr /&gt;
&lt;div&gt;[[File : dldl.jpg]]&lt;br /&gt;
&lt;br /&gt;
{{인물 정보&lt;br /&gt;
|이름=이이 &amp;lt;br /&amp;gt; 李珥&lt;br /&gt;
|출생일= 1536년 음력 12월 26일&amp;lt;br /&amp;gt;양력 1537년 1월 7일&lt;br /&gt;
|출생지= 조선 강원도 강릉부 죽헌동 오죽헌 몽룡실&lt;br /&gt;
|사망지= 조선 한성부 대사동 자택&lt;br /&gt;
|사망일= 1584년 2월 27일 (음력 1월 16일) (47세)&lt;br /&gt;
|사망원인= 병사&lt;br /&gt;
|거주지= &lt;br /&gt;
|국적= 조선&lt;br /&gt;
|별명= 호는 율곡, 자는 숙헌&lt;br /&gt;
|학력= 한성시 장원급제&lt;br /&gt;
|직업= 문인, 시인, 사상가, 정치가, 교육자&lt;br /&gt;
|종교= 유교 성리학&lt;br /&gt;
|배우자= 곡산 노씨, 부실 김씨,이씨&lt;br /&gt;
|자녀= 이씨(서녀)&lt;br /&gt;
|부모= 부 이원수, 모 신사임당, 서모 권씨&lt;br /&gt;
|친척= 할아버지 이천, 재종조부 이기 (1476년), 이행, 누이 이매창, 형 이번, 형 이선,&amp;lt;br /&amp;gt;동생 이우 (문신), 종증조부 이의무, 친족 이순신, 사돈 김장생, 서녀사위 김집 (1574년)]&lt;br /&gt;
|서명=&lt;br /&gt;
|웹사이트= [http://www.yulgok.or.kr/ 율곡학회 홈페이지]&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이이(李珥, 1537년 1월 7일(1536년 음력 12월 26일) ~ 1584년 2월 27일(음력 1월 16일))는 조선시대의 문신, 성리학자이며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 작가, 시인이다. 관직은 숭정대부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성혼, 송익필, 김장생 등과 함께 기호 지역이 기반인 서인(西人)의 종주로 추앙된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3년간 여묘살이를 한 후, 아버지가 계모 권씨를 들인 뒤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훗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머리 깎고 중이 되려다가 환속한 자 라고 동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이준경이 죽기 직전 붕당의 폐에 관한 유차를 올리자 '죽음에 이르러 말이 악하다'고 공격하였으며 이후 이준경의 처벌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후일 당쟁이 현실화하자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 동인, 서인 사이의 당쟁 조정을 평생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lt;br /&gt;
&lt;br /&gt;
===참고 자료===&lt;br /&gt;
[http://ko.wikipedia.org/wiki/%EC%9C%A8%EA%B3%A1_%EC%9D%B4%EC%9D%B4 위키피디아 이이]&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8%B0(%E6%B0%A3)_KU</id>
		<title>기(氣)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8%B0(%E6%B0%A3)_KU"/>
				<updated>2014-06-09T12:12:2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lt;/p&gt;
&lt;hr /&gt;
&lt;div&gt;===요약===&lt;br /&gt;
*만물 또는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로 물질의 근원 및 본질.&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중국철학 용어로 모든 존재현상은 기의 취산(聚散), 즉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데 따라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생명 및 생명의 근원으로 보기도 한다. 원래는 호흡을 하는 숨[息], 공기가 움직이는 바람[風]을 뜻하는 가벼운 의미에서 시작하였으나 도가(道家)인 노자 ·장자가 우주의 생성 변화를 기의 현상이라고 하는 데서부터 여러 가지 어려운 뜻을 가지는 철학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한(漢)시대에는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기의 이론이 복잡하게 전개되면서 우주 자연의 운행 천문 지리, 그리고 양생(養生) 의학 및 길흉 화복과 관련되는 일상생활에까지 기를 적용하여 모든 것을 설명해 나갔다. 송(宋)대에 와서는 유가(儒家)에서 이(理)의 존재를 생각하게 됨으로써 그 이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기를 다루어 나간다. 모든 존재의 원인 또는 이치로서 형이상(形而上)의 보편자를 이라 하였고, 기는 형이하(形而下)의 구체적인 개체의 존재현상으로 생각하여 이기(理氣)철학의 중요개념으로 다루었다. &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0542&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445 네이버 지식백과 기(氣)]&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7%B4%EA%B3%84%EC%9D%B4%ED%99%A9_KU</id>
		<title>퇴계이황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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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09T12:11: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lt;/p&gt;
&lt;hr /&gt;
&lt;div&gt;[[File : dlghkd.jpg]]&lt;br /&gt;
&lt;br /&gt;
{{인물 정보&lt;br /&gt;
|이름=퇴계이황 &amp;lt;br /&amp;gt; 李滉&lt;br /&gt;
|출생일= 1501년 음력 11월 25일&amp;lt;br /&amp;gt;양력 1502년 1월 3일&lt;br /&gt;
|출생지= 조선 경상북 안동시 안동군 도산면 토계리&lt;br /&gt;
|사망지= 조선 경상북도 안동시 안동군 도산면 토계리&lt;br /&gt;
|사망일= 1570년 음력 12월 8일&amp;lt;br /&amp;gt;양력 1571년 1월 3일 (70세)&lt;br /&gt;
|사망원인= 병사 (노환)&lt;br /&gt;
|거주지= 조선 경상북도 안동, 한성부, 안동&lt;br /&gt;
|국적= 조선&lt;br /&gt;
|별명= 자는 경호, 호는 퇴계·퇴도·퇴도만은·도수, 시호는 문순, 별칭은 이자, 이부자&lt;br /&gt;
|학력= 한학 수학&lt;br /&gt;
|직업= 학자, 문인, 사상가, 시인, 정치인&lt;br /&gt;
|종교= 유교 성리학&lt;br /&gt;
|배우자= 부인 김해 허씨, 후처 안동 권씨&lt;br /&gt;
|자녀= 아들 이준&lt;br /&gt;
|부모= 이식&lt;br /&gt;
|친척= 숙부 이우 (1469년), 형 온계 이해&lt;br /&gt;
|서명=&lt;br /&gt;
|웹사이트=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퇴계이황(李滉, 1502년 1월 3일(1501년 음력 11월 25일) ~ 1571년 1월 3일(1570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교육자, 화가, 시인이다. 조선 명종·선조 시대의 사상가, 교육자이자 화가, 대성리학자였다. 정치보다는 학자 지향형 인물이다. 과거 급제 후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사화(士禍)와 훈구파 내부의 정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관직을 사퇴한다.&lt;br /&gt;
&lt;br /&gt;
===참고 자료===&lt;br /&gt;
[http://ko.wikipedia.org/wiki/%ED%87%B4%EA%B3%84_%EC%9D%B4%ED%99%A9 위키피디아 이황]&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B4(%E7%90%86)_KU</id>
		<title>이(理)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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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4-06-09T12:08:4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lt;/p&gt;
&lt;hr /&gt;
&lt;div&gt;===내용===&lt;br /&gt;
*사물은 각기 하나씩의 이를 갖추고 있다. 하늘에도 이가 있기 때문에 이를 천리(天理)라고 하며, 사물에도 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물리(物理) 또는 사리(事理)라고 한다.&lt;br /&gt;
마음 속에도 이가 있기 때문에, 인(仁)은 사랑［愛］의 이, 의(義)는 당연［宜］의 이, 예(禮)는 공경의 이, 지(智)는 분별의 이로 파악된다. 이들 이는 원리의 이요, 법칙의 이다.&lt;br /&gt;
&lt;br /&gt;
*천도(天道)가 유행해 만물을 조화 발육시키는데, 조화 발육시키는 까닭은 바로 이다. 이 이는 이른바 태극(太極)으로, 태극이 동(動)하여 양(陽)을 낳고, 정(靜)하여 음(陰)을 낳아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해 오행(五行)을 낳는다.무극(無極)의 진(眞)과 이오(二五)의 정(精)이 묘합(妙合), 응결해 만물을 화생(化生)하게 한다. 이런 경우의 이는 본체의 이다.&lt;br /&gt;
&lt;br /&gt;
*본체의 이는 하나며, 원리의 이는 사사물물에 모두 있기 때문에 무궁무진하다. 원리의 이는 본체의 이에서 나온 것이므로 만리(萬理)는 일원(一原)에서 나온다. 나의 이와 다른 사람의 이가 다르지 않고, 사람의 이가 사물의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은 본체의 이를 말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참고 자료===&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1122&amp;amp;cid=1621&amp;amp;categoryId=1621 네이버 지식백과 이(理)]&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8%81%EB%82%A8%ED%95%99%ED%8C%8C_KU</id>
		<title>영남학파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8%81%EB%82%A8%ED%95%99%ED%8C%8C_KU"/>
				<updated>2014-06-09T12:03: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학문상의 유파로서 영학파(嶺學派)·퇴계학파·남명학파(南冥學派)의 총칭.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먼저 영학파는 정몽주에서 비롯되어 길재·김숙자를 거쳐 김종직(金宗直)으로 이어지는데, 김종직은 당대 유학의 조종으로서 많은 제자를 두었다. 특히 김굉필과 정여창은 도학에 정진하여 후대 한국성리학이 발전할 수 있는 학문적 토양을 조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연산군 때 훈구파와 갈등하여 정치적으로 희생되었지만, 그 도학정신은 이어져 한 갈래는 조광조를 통해 기호지방으로 전해졌고, 다른 한 갈래는 이언적을 거쳐 이황·조식으로 전승되었다. &lt;br /&gt;
&lt;br /&gt;
*조선 중기에 경상좌도에서 이황의 학문사상을 추종하는 유파가 형성되었는데, 이를 퇴계학파라 하며 조목(趙穆)·기대승·김성일·유성룡 등이 유명했다. 같은 시기에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조식의 학식과 덕행을 추종하는 남명학파가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조식의 영향을 받아 기절(氣節)과 의리를 숭상했으며 곽재우(郭再祐)·정인홍(鄭仁弘) 등이 이에 속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남명학파는 쇠퇴하고 퇴계학파가 성해지면서 좌도·우도의 구별이 흐려지고 퇴계학파로 흡수되어, 나중에는 퇴계학파가 영남학파의 대명사가 되었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19028&amp;amp;cid=828&amp;amp;categoryId=828 네이버 지식백과 : 영남학파]&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8%B0%ED%98%B8%ED%95%99%ED%8C%8C_KU</id>
		<title>기호학파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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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lt;/p&gt;
&lt;hr /&gt;
&lt;div&gt;===요약===&lt;br /&gt;
*조선 중기 기호지방을 근거지로 한 이이(李珥)·성혼(成渾) 학파를 통칭한 말&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원래 기호지방은 경기도와 호서지방·해서지방을 포괄하는 지역을 의미하지만, 역사적 개념에서 기호학파는 경기도·충청도 지역의 이이·성혼의 문인과 학자들의 집단을 지칭한다. &lt;br /&gt;
*조선 전기에 영남지방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왕조교체에 불만을 품고 은거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일단의 학자군이 형성되고, 조선 중기에 이황(李滉)이 배출되면서 영남학파가 성립되었지만 기호학파는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학문적 결속력이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조 후기에 동서분당이 형성되고 영남학파의 다수가 [[동인]]이 되면서 이에 대항하는 [[서인]]세력이 기호지역을 중심으로 결집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참고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1673&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450 두산백과 기호학파]&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6%95%EB%8B%B9%EC%A0%95%EC%B9%98_KU</id>
		<title>붕당정치 KU</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6%95%EB%8B%B9%EC%A0%95%EC%B9%98_KU"/>
				<updated>2014-06-09T11:57:4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lt;/p&gt;
&lt;hr /&gt;
&lt;div&gt;===내용===&lt;br /&gt;
*조선 시대에 붕당이 발달하게 된 원인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유학파(儒學派)의 대립, 둘째, 왕실 내척(王室內戚)의 내분, 셋째, 제도상의 결함이다. 특히 제도상의 결함은 양반의 수는 늘어가는데 양반에게 수급권을 줄 토지가 모자라게 된 데에도 원인이 있다. 이 와중에 과전법은 직전법으로 바뀌면서 기성세력과 신진 세력 사이에 알력이 생겨났다. 이는 달리 보면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었다.&lt;br /&gt;
이러한 대립은 성종 때까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연산군 때부터 차츰 불거지게 되었고, 결국 선조 때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대립이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하면서 붕당 정치가 시작된다.&lt;br /&gt;
&lt;br /&gt;
===참고 자료===&lt;br /&gt;
[http://ko.wikipedia.org/wiki/%EB%B6%95%EB%8B%B9%EC%A0%95%EC%B9%98 위키피디아 붕당]&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2%AC%EC%95%A1%EC%84%9C%EC%9B%90(%E8%B3%9C%E9%A1%8D%E6%9B%B8%E9%99%A2)</id>
		<title>사액서원(賜額書院)</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2%AC%EC%95%A1%EC%84%9C%EC%9B%90(%E8%B3%9C%E9%A1%8D%E6%9B%B8%E9%99%A2)"/>
				<updated>2014-06-09T11:48:2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 조선시대 국왕으로부터 편액(扁額)·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사적 제154호. 조선시대. 1572년(선조 5)에 경주 부윤 이제민과 유림들이 이언적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1574년(선조 7)년에 '옥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lt;br /&gt;
1543년(중종 38) 경상도 풍기(豊基)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의 건의에 따라 50년(명종 5) 명종이 이를 권장하는 의미에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서원 소속의 토지 및 노비에 대한 면세·면역(免役)의 특권을 내림으로써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7628&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732 사액서원(두산백과) ]&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A3%BC%EC%84%B8%EB%B6%95</id>
		<title>주세붕</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A3%BC%EC%84%B8%EB%B6%95"/>
				<updated>2014-06-09T10:47: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 내용 */&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 서원을 창시한 조선의 학자·문신이다. 자는 경유(景遊), 호는 신재(愼齋)·손옹(巽翁)·남고(南皐)이며, 시호 문민(文敏)이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 주세붕(周世鵬, 1495년 ~1554년)은 서원을 창시한 조선의 학자·문신이다. 자는 경유(景遊), 호는 신재(愼齋)·손옹(巽翁)·남고(南皐)이며, 시호 문민(文敏)이다. 본관 상주(尙州).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漆原)면 출생하였다. 1522년(중종 17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가 되어 사가독서한 후 검열·부수찬 등을 지내었다. 1541년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나가 이듬해 백운동(白雲洞:順興)에 안향(安珦)의 사당 회헌사(晦軒祠)를 세우고, 1543년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본받아 사림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紹修書院)을 창설하니 이것이 한국 최초의 서원이다. 도동곡(道東曲), 육현가(六賢歌), 엄연곡(儼然曲), 태평곡(太平曲) 등 장가(長歌)와 군자가(君子歌) 등 단가 8수가 전한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칠원의 덕연서원(德淵書院)에 배향되고, 백운동 서원에도 배향되었다. 저서에 무릉잡고(武陵雜稿), 편서로는 죽계지(竹溪誌), 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 심도이훈(心圖彛訓)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ko.wikipedia.org/wiki/%EC%A3%BC%EC%84%B8%EB%B6%95 위키피디아 주세붕]&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0%B1%EC%9A%B4%EB%8F%99%EC%84%9C%EC%9B%90(%E7%99%BD%E9%9B%B2%E6%B4%9E%E6%9B%B8%E9%99%A2)</id>
		<title>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0%B1%EC%9A%B4%EB%8F%99%EC%84%9C%EC%9B%90(%E7%99%BD%E9%9B%B2%E6%B4%9E%E6%9B%B8%E9%99%A2)"/>
				<updated>2014-06-09T10:44: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 참고자료 */&lt;/p&gt;
&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서원의 시초. 조선 중종 때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서원으로 안향(安珦)을 봉사함&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조선시대의 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와 학문 연구, 사림의 자제 교육 등을 담당하였는데, 이 서원의 시초가 백운동서원이다. 중종 때(1543) 풍기 군수인 주세붕이 안향이 살던 경상도 순흥면의 백운동에 그를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자제들의 교육 장소로 삼은 데서 '백운동서원'이라고 하였다. 그 후 명종 때는 이황의 건의로 백운동서원이 소수서원으로 사액(賜額)되고, 국가로부터 서적과 토지, 노비 등을 받고 면세와 면역의 특권까지 받아 경제적인 기반을 확립할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이후 많은 서원들이 지방에 설치되었는데, 선현을 받들고 교육과 연구를 하던 서원은 향교와 다르게 각기 다른 선현들을 제사지냈으며, 그 운영에서도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서원의 증대에는 특히 이황과 그 제자들의 노력이 컸다. 선조 때는 편액을 하사받은 사액 서원만 100개가 넘었으며, 18세기에는 700여 개소, 고종 때는 1,000여 개소나 되었는데 그중 사액 서원이 약 1/3을 차지하였다. 이 서원은 영조 때와 대원군 때 대폭 정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참고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34010&amp;amp;cid=525&amp;amp;categoryId=525 백운동서원 (시사상식사전, 박문각)]&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6%8C%EC%88%98%EC%84%9C%EC%9B%90(%E7%B4%B9%E4%BF%AE%E6%9B%B8%E9%99%A2)</id>
		<title>소수서원(紹修書院)</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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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 요약 ==&lt;br /&gt;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에 있는 우리 나라 최초의 서원.&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 1541년(중종 36)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이듬해에 이곳 출신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祠廟)를 설립하였다가 1543년에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lt;br /&gt;
&lt;br /&gt;
*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은 서원을 공인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1550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되고 아울러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 이 밖에도 임금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성리대전 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하사하였다.&lt;br /&gt;
&lt;br /&gt;
* 소수서원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한 부분을 담당하면서 향촌 사림의 정치적·사회적 기구로 정착되자 전국에 서원이 설립, 운영되어 조선시대 사학의 중심기관으로 발전하였다. 그 뒤 1633년(인조 11)에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서원의 지나친 건립과 부패로 1868년(고종 5)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그대로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lt;br /&gt;
&lt;br /&gt;
* 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현재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내 건물로는 문성공묘(文成公廟)·명륜당(明倫堂)·일신재(日新齋)·직방재(直方齋)·영정각(影幀閣)·전사청(典祀廳)·지락재(至樂齋)·학구재(學求齋)·서장각(書藏閣)·경렴정(景濂亭)과 탁연지(濯硯池)·숙수사지 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보물 제59호)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 그 밖에 국보 제111호인 회헌영정(晦軒影幀),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 영정(周世鵬影幀)이 소장되어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있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7723&amp;amp;cid=404&amp;amp;categoryId=404 소수서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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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4%B1%EA%B7%A0%EA%B4%80_KU</id>
		<title>성균관 K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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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201310212 이지형: /* 웹 자원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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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File : tjdrbsrhks.jpg]]&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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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lt;br /&gt;
*성균관(成均館)은 고려 말부터 이어진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이다. 한국의 옛 대학(大學)으로 그 명칭은 고려 충렬왕 때 국학(國學)을 성균관으로 개명한 데서 비롯하였다. 공민왕 때는 국자감(國子監)이라 부르다가 곧 성균관으로 복귀되었는데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기까지 조선 일대를 걸쳐 한국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ko.wikipedia.org/wiki/%EC%84%B1%EA%B7%A0%EA%B4%80 위키피디아 성균관]&lt;br /&gt;
----&lt;br /&gt;
&lt;br /&gt;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lt;br /&gt;
&lt;br /&gt;
[[분류:서원 KU]]&lt;/div&gt;</summary>
		<author><name>201310212 이지형</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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